45화
“실수이자 상처라니요?”
뮬은 거듭되는 질문에 결국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흑룡의 피 사건은 200년 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펜첼의 가주인 ‘쿠란 펜첼’은 사흘간의 사투 끝에 북부로 내려온 흑룡을 잡았고 이를 활용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놈의 시체에서는 농밀한 오러가 아직도 흐르고 있었고, 체액에는 강한 독성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에 힌트를 얻은 쿠란 펜첼은 연구진을 꾸려 흑룡의 시체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여러 실험을 통해 흑룡의 피가 오러 증폭에 크게 기여한다는 걸 알아냈다.
실험에 자원한 병사들에게 흑룡의 피를 투여해보았는데, 오러의 향상 폭이 눈에 띄게 올라간 것이다.
그때는 엄청난 수확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왜 그때는 부작용이란 것에 대해 무지했는지 모르겠지만, 펜첼은 큰 과오를 저질렀지.”
시간이 지난 후 흑룡의 피를 먹은 기사들과 병사들의 정신상태가 점점 망가져 가는 것이었다.
잔혹한 폭력성이 드러났으며 점점 성격이 변해가면서 병사들은 백치와 같은 상태가 되기도 했다.
그 수가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오러 향상이라는 극적인 효과에 눈이 멀어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성급하게 피를 복용한 것이 문제였다.
이 일로 펜첼은 흑룡의 피를 먹은 모든 기사와 병사들에게 깊은 사과를 했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상을 지급했다.
하지만 사람이 망가졌는데 보상이 무슨 소용일까?
흑룡의 피 사건 이후, 펜첼의 위신은 급격히 하락했으며 가주인 쿠란 펜첼 역시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 중.
“쿠란 경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그만큼 그 일은 커다란 사건이었고, 죄책감이 컸던 거지.”
그 일이 있던 후에는 흑룡의 피에 대한 언급은 펜첼에서 금기시되고 있었다.
‘하긴, 그 정도 사건은 있어야 흑룡의 피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뮬 삼촌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듣던 유진은 질문을 더했다.
“아무리 그래도 강자존인 펜첼에서 오러를 빠르게 연공할 수 있다는 점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을 텐데, 정말 연구가 멈춘 겁니까? 나중에라도 부작용을 알아내 개량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뮬이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흐른 후 흑룡의 피로 오러를 쌓았던 기사들의 경지가 높아지지 않는 것이 확인됐다. 7성, 거기서 경지가 멈추더구나. 편법으로 쌓은 오러는 가짜라는 것이지.”
7성에 도달하고 난 이후부터는 광증만 심해지고 오러는 더 쌓이지 않았다.
그 결과 흑룡의 피를 마셨던 모든 이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살을 택했다.
흑룡의 피는 전사의 요람에서나 쓴다는 사도(邪道)의 기운.
짧은 시간 만에 힘을 증폭시킬 순 있지만, 오러가 넘칠 만큼 풍부한 흑룡의 피가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그 밀도를 육체라는 그릇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었고.
그 결과 오히려 수련에 방해된다는 것이 정론으로 굳어졌다.
“이게 내가 아는 전부이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나도 잘 알지 못해.”
유진이 뮬을 응시하며 잠시 고민했다.
‘뮬 삼촌과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결론이 났다.
“시리우스 삼촌이 흑룡의 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특정인에게 복용 지시도 내리고 있어요.”
기어코 말을 꺼낸 유진은 뮬의 놀란 얼굴을 봐야 했다.
“뭐……?”
그런데 그 표정이 묘하게 복잡했다.
뭔가 기억나는 게 있는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가, 다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리 그 녀석이 가주에 대한 욕망이 높았다지만, 그럴 일까지 벌일 멍청이는 아닐 것이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뮬 삼촌이 아는 만큼 시리우스 삼촌도 이 사실을 모르고 흑룡의 피를 썼을 리 없겠군요.”
뮬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만약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기사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쓰는 각성제로 활용되는 정도일 거다.”
뮬은 시리우스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확신하듯…….
아니, 확신하고 싶은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용하면 체내에 흑룡의 피를 정화하기 위해 몇 달간은 절대로 다시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 거고 말이다.”
유진은 뮬의 생각을 더 바꿀 수는 없다는 걸 인정했다.
‘제 동생이 그런 중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아무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순순히 믿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일단 오늘은 정보만 더 캐내자.’
그가 방향을 바꿔 질문을 덧붙였다.
“혹시 흑룡의 피를 오러의 양이 적은 어린 나이부터 꾸준히 먹이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아이에게 흑룡을 피를 먹인다고?”
순간 미심쩍은 눈빛을 띠던 뮬이 생각에 잠겼다.
“그건……. 부작용을 줄였더라도 결국 정신적 충격으로 선천적인 성격이 완전히 바뀌겠지. 그리고 펜첼이 추구하는 바와는 다르게 흑룡의 피의 제약으로 인해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지도 못할 테고.”
유진은 전생에 인스 형제가 어떻게 자라왔을지가 뻔히 보였다.
‘시리우스, 알면 알수록 참, 사람이 별로네. 어떻게 자기 자식한테 그런 걸 먹일 수가 있지?’
조금 더 추측해보자면.
‘전생에는 내가 펜첼에 없었으니 엘도라와 비교하며 인스 형제에게 흑룡의 피를 먹였겠지.’
글람푸스탄에 간 사이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것도 시리우스의 성격을 생각하니 이해됐다.
열등감과 조바심 때문이었을 터이다.
‘같은 훈련생 신분인 내가 임무에 나갈 정도로 인정받으니 다급해진 나머지 인스 형제를 더 몰아붙였던 거야.’
뮬이 유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거냐? 네가 먹어보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하물며 흑룡의 피는 그렇게 쉽게 구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유진은 차마 시리우스가 인스 형제에게 피를 먹였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주 확실한 증거가 없긴 했지만, 그거야 모든 정황과 관찰된 바를 종합해 보았을 때 확신할 수는 있었다.
다만.
‘나 때문에 그 녀석들이 그 지경이 되고 있는 건가.’
유진은 인스 형제의 상태에 자신이 관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유진의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이 있다면.
‘녀석들을 치료하면서 동시에 흑룡의 피를 부작용을 없앤 다음 내가 이용한다. 그 덕에 나의 오러가 급상승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일거양득이 되는 셈.
죄책감과 미안함을 보람과 뿌듯함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란 말이었다.
뮬은 유진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움찔거렸다.
“또 하실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뭔가, 네 앞에서는 묘하게 동질감이 든단 말이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셨군요.”
“사실, 몇 년 전에 내 개인 연구공간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나의 부주의가 원인이었지.”
“그런데요?”
“그중에는 흑룡의 피에 관한 연구 자료도 있었다. 그냥, 이건, 고백하는 거다. 왠지 너라면 아무 데도 이야기하지 않고 나를 이해해줄 것 같다는 마음이 드는구나.”
그러면서 뮬이 슬쩍 금검을 쳐다보았다.
금검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이다, 뮬 경. 이래 봬도 입이 무거운 편이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니 유진은 뮬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흑룡의 피를 써서라도 자신의 오러홀을 고치고 싶었던 시기였다고 한다.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고개를 젓는 뮬의 모습에는 그동안의 고생과 비통함이 엿보였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유진은 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나도 나를 고치려 안간힘을 썼었지. 어떨 때는 나를 혐오하다가 다시 나를 보듬어주면서 힘을 냈어.’
하지만 잘못된 일은 잘못된 일이다.
유진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데도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삼촌도 같은 실수를 저지르신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네요.”
“그래, 맞다. 어쩌면…… 그 사실을 나의 처지를 생각하며 합리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앞에서 어차피 저를 돕겠다고 말을 하셨으니, 두 배로 성실히 도와주십시오.”
“로베르가의 피가 확실하구나. 말해 보거라.”
유진은 곧바로 빚을 갚을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흑룡의 피를 마신 이들이 거부하는 게 정말 ‘은’뿐인지 조사해 주세요.”
“그,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저도 책 좋아합니다. 거기서 읽은 것뿐이에요.”
뮬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대답했다.
“일단…… 그에 대한 답은 여기서 할 수 있단다. 흑룡의 피를 마신 자는, 미스릴, 그러니까 ‘진은’에 더욱 크게 반응한단다.”
“진은…….”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던 사이 뮬의 전담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뮬님, 다음 주에 열리는 월말 회의 참여 여부에 대해서 공지가 왔는데 어떻게 답변드릴까요?”
뮬이 고개를 저었다.
“안 간다고 답변…….”
하나 유진이 뮬을 다급히 말렸다.
“아니, 아니에요. 삼촌, 이번 월말 회의에는 참석하셔야죠.”
“음……? 어째서냐, 나는…… 자세한 이야기는 어렵지만, 가 봤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
유진이 답답하단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삼촌은 지금 중책을 맡고 있잖아요……!”
바로 마탑과의 연결점을 짓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유진은 지금부터라도 뮬이 청룡 기사단의 기사단장으로서 그들을 책임지고 다시 우두머리가 되길 원했다.
본래 힘없는 자의 고함에는 힘이 없어도, 힘 있는 자는 잠꼬대에도 힘이 실리는 법이니까.
또한, 머지않아 뮬은 유진의 도움을 받아 오러를 되찾을 것이니까.
유진의 속내를 알아차린 뮬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 그러면, 일단 참석한다고 전해주어라.”
“예, 알겠습니다.”
유진이 한숨을 돌린 후에 속으로 차근차근히 계획을 세웠다.
‘월말에는 각 기사단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는 회의가 열린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분명 제인스를 데리러 왔던 기사에게도 반지가 반응했어.’
폭군의 반지가 흑룡의 피에 반응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필시 반지에 혈마법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일 터. 어떠한 원리로 반지가 반응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인스 형제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에게 이 상황을 득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반지의 특징을 이용해야 한다.’
유진이 간단한 계획을 마친 뒤 한 마디를 더했다.
“그러면 미스릴 원석을 좀 준비해주세요. 이 정도는 해주시겠죠?”
“미스릴은 구하기가 힘들지만…….”
유진의 눈초리를 받은 뮬이 피식 웃었다.
“일단은 알겠다. 내 동생 놈이 바보가 아니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유진과 금검이 자리를 비웠다.
뮬은 폭풍이 지나갔다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재능 많은 조카 덕분에 펜첼에서 중책도 맡아보는군.”
이에 대한 감사 인사를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들면서, 녀석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병을 열심히 치료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날 밤, 유진의 숙소.
금검과 궁귀, 투귀가 유진과 함께 한자리에 모였다.
“궁귀는 뭐라고 하고 여기에 온 거야?”
“몸에 좋은 차를 준비하여 대령한다고 하였소.”
“그 양반 눈을 피하는 게 어려웠을 텐데.”
“유진 공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니 에막스 일등 집사도 이해하더이다.”
“투귀는?”
“저도 간식을 준비하여 대령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들 적당히 이야기하고 빨리 나가야겠군. 괜히 의심 사지 않으려면 말이야.”
금검이 궁시렁거렸다.
“공자의 심부름은 내 역할인데, 지들이 왜 여기까지 와서 내 일을 뺏고 난리야?”
그러자 궁귀가 도끼눈을 뜨며 따졌다.
“일을 뺏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거요, 이 양반아. 성격이 빼뚤어져도 어찌 그러는 건지 참.”
“도와달라고 한 적 없다만.”
“어쨌든 나는 공자에게 도움이 되고 있소! 하는 일도 없이 술이나 퍼마시면서, 확 그냥 마수 포획망에 넣어서 몽둥이찜질을 할까 보다.”
“당신도 술 마셨잖아! 거, 저, 여인네랑……!”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투귀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이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다, 유진에게 물었다.
“공자님, 오러 봉인을 명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려 좋아. 불편함보다는 가주님께 절이라도 하고 싶은 와중인데.”
“예? 어째서입니까?”
유진은 이 오러 봉인이 주어진 덕분에 시야를 넓혀 마법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단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아직은 이들이 몰라도 되는 정보였으니까.
아직도 싸우고 있는 궁귀와 금검에게 유진이 내뱉었다.
“자꾸 싸우면 다 그냥 본가로 보내버리는 수가 있어.”
“…….”
“…….”
유진의 한마디에 두 사내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가 그제야 지령을 내렸다.
“궁귀는 약제당에서 백호 기사단 단원이 오면, 무조건 채혈을 해. 건강검진이 목적이든, 알레르기 반응을 보아야 한다는 게 목적이든, 뭐라고 둘러대서라도 말이야.”
“알겠소.”
“투귀는 백호 기사단의 식기를 따로 마련해. 무조건 은이 포함된 식기여야만 해.”
“알겠습니다.”
비록 궁귀와 투귀가 유진의 동의 없이 몰래 펜첼에 따라오긴 했지만, 그들은 유진에게 톡톡히 도움이 되고 있었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