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유진이 목례를 올리며 빙긋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들어와라, 유진.”
뮬이 유진을 맞이한다.
시리우스가 그 광경을 보며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이……! 또 무슨 개짓거리를 하려고……!’
시리우스의 입장에서 유진은 커다란 눈엣가시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뮬과 유진이 손을 잡은 모양새였으니.
‘뮬 형님이 여기에 참석한 것도 저 녀석 짓이겠지.’
시리우스는 사자의 시험 때부터 유진의 존재가 매우 불편했는데, 오늘은 정말 폭발할 것 같았다.
뮬에 대한 감정도 순식간에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시리우스는 최대한 빠르게 자신의 감정을 조절했다.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침착한 마음이 최우선이었다.
‘이 자리에서 흑룡의 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걸 보면, 아마도 흑룡의 피를 먹었다는 것은 공론화해서 나를 보내버리겠다는 생각이겠지.’
그 예상대로였다.
유진이 입을 열자 모두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시리우스 펜첼 경이 지금껏 해온 과오, 정확히 말하면 흑룡의 피를 백호 기사단 단원들에게 먹여온 안건에 대해 이 자리에서 논하려 합니다.”
시리우스는 코웃음을 쳤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재밌을 것 같군. 안 그런가? 백호?”
백호 기사단 단원들도 시리우스를 믿는 눈치인지 여유로운 표정을 꾸몄다.
시리우스도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를 안 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동안 백호 기사단 단원들에게도 흑룡의 피를 소량씩 먹여왔고, 이에 대한 부작용은 최대한 억제한 상황이었다.
물론 흑룡의 피에 대한 아픈 역사가 있기에 쉬이 다룰 문제가 아니긴 했지만.
‘글람푸스탄 사건도 그렇고, 현재 펜첼의 기사단이 가진 명성이 실추된 상황이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흑룡의 피만큼 효과적이고 빠른 수단은 없어.’
시리우스는 추가적으로 백호 기사단 단원을 이용해 영토를 확장하여 펜첼에 기여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짜놓았다.
유진이 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림에 따라 시리우스는 오히려 가문을 위해 더 좋은 일을 했다고 인정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시리우스가 나중에 공식적으로 발표해 가문에서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던 일이기도 했으니.
시리우스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밝혀준다면 나야 좋지. 네놈도 보내고, 나의 명성은 올라갈 테니까.’
* * *
유진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원탁 옆에 설치된 단상에 섰다.
“모두 여기를 봐주십시오.”
자리에 모인 모두가 유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각각이었다.
일개 훈련생이 무려 현무 기사단을 전부 근신에 들도록 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고.
청룡 기사단은 뮬이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 유진의 영향을 받아서라는 걸 알아채고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그들은 뮬에 대한 충성심이 아직까지 남아있긴 했기에, 뮬을 움직인 저 유진이란 소년에 대한 궁금증도 크게 들었다.
그에 반해 백호 기사단은 한 명도 빠짐없이 유진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시리우스가 그동안 유진에 대한 이미지를 한도 끝도 없이 추락시켜놓았기에 이는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주작 기사단은 청룡 기사단과 백호 기사단의 반응이 반씩 섞인 느낌이었다.
단장이었던 릴리안, 그녀의 아들이 자신들의 눈에 띄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과 더불어.
펜첼을 버리고 외가로 나가버린 릴리안에 대한 애증이 섞여 있었다.
물론 유진은 그러한 시선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특히 백호 기사단은 잘 들으십시오.”
“흑룡의 피에 대한 역사는,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 특징에 대해서도 소수는 알겠지요. ‘은’에 대한 거부반응입니다.”
유진의 고개가 시리우스를 향해 돌아갔다.
시리우스는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저는 백호 기사단 단원들의 행동이나 기운에서 묘한 점을 느꼈고, 의심 가는 바가 있어 펜첼 측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밝혀낸 바가 있습니다. 식당에 은식기를 비치한 뒤 관찰한 결과, 적지 않은 수의 인원이 이 은식기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식사를 하지 못하고 금식기를 찾거나 자리를 떠난 점입니다.”
“더불어.”
“약제당에서도 피검사를 명분으로 채혈한 결과, 은식기에 거부반응을 보인 이들의 피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과 성분이 검출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게 해당 인물들의 명단입니다.”
유진이 뮬에게 종이들을 건네줬고, 뮬은 원탁에 이 종이를 모두가 보게끔 배부했다.
청룡과 주작 기사단원들은 눈살을 좁혀가며 그 종이들을 자세히 읽어내려갔고, 백호 기사단 단원들은 복잡한 표정을 숨기며 종이를 빠르게 훑었다.
분명히 그들은 시리우스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었다.
비록 시리우스가 릴리안과의 몸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들은 시리우스의 진짜 힘을 알고 있었기에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가 ‘본연의’ 힘을 꺼낸다면, 릴리안은 상대도 안 될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꼬마 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실리는 묘한 힘에 백호 기사단 단원들은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과 자신감이 깊게 녹아들어 있었으니까.
직관이 말하고 있었다.
오늘이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라고.
잠시간의 정적 뒤, 유진은 좌중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모이자 바로 미스릴 구슬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이 수정구는 미스릴로 만들어졌으며, 흑룡의 피를 마신 자는 이에 반응할 것입니다. 당당하다면 이 미스릴 구슬을 똑바로 응시하십시오.”
“……!”
미스릴로 만든 물건이라는 말에 시리우스의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갔고, 더불어 백호 기사단 단원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저 구슬이 정말로 미스릴로 만든 물건이라면, 모든 게 들통날 상황이었으니까.
몇몇 기사단원들은 미스릴 구슬을 스쳐 지나가듯 보았음에도 눈빛이 흐리멍덩해졌고.
몇몇은 애써 구슬을 회피하고는 유진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게 하기 위해 진한 살기를 내뿜었다.
화아악!
“감히 이래라저래라하지 마라! 네깟 어린놈이 단장님들을 모욕하는 꼴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겠으니!”
당장이라도 유진의 목을 날릴 생각인지, 그들은 검 위에 손까지 올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미봉책이었다. 유진의 말대로 그들이 당당하다면 미스릴을 응시하는 모습만 보이면 그만이니까.
“검에서 손 떼시오!”
“뭐 하는 짓이오!”
미스릴에 반응하여 정신이 나간 백호 기사단 단원들의 거친 살기로 인해 회의장 내부가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다른 기사단원들도 제 몸을 방어하고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기세를 내뿜었다.
쾅!
스릉……!
의자들이 뒤로 넘어지고,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울린다.
아수라장이 된 회의장 사이.
“그만!”
결국, 시리우스가 나섰다.
“저게 미스릴로 만들어졌건 아니건 관심 없다.”
“그럼 무엇에 관심에 가십니까?”
“저따위 물건으로 우리 펜첼의 명예로운 백호 단원들을 불법 약물 섭취자로 몰아가려는 네놈의 수작에 통탄을 금치 못할 따름이다.”
유진이 말없이 시리우스를 응시했고, 시리우스는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드르륵!
“내가 내 입으로 직접 말하지.”
백호 기사단 내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있었다면, 결국 기사단장인 시리우스가 알았는지 몰랐는지가 중요하다.
알았다면 흑룡의 피라는 불법적인 약물을 사용한 단주가 되는 것이고.
몰랐다면 현무 기사단 때와 같이 관리하지 못한 책임자로서 처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한 점 부끄럼 없다는 표정으로 당당히 말했다.
“내가 백호 단원들에게 흑룡의 피를 먹였소. 모두 나의 주관하에 이루어진 일이오.”
그 발언에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 시리우스 경……!”
“네놈이…… 정말로…….”
같은 백호 기사단의 부단장은 정말 이래도 되느냐는 표정이었고, 뮬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럴수록 시리우스는 더욱 당당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흑룡의 피에 대한 아픈 역사가 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는 부작용을 최대한 억제했으며, 연구 결과 몇 개월간의 휴식기가 있다면 충분히 활용 가능한 약물임을 알아냈고, 망설임 없이 사용한 것이오.”
“하지만!”
주작기사단장의 반발에도 시리우스는 눈 깜짝하지 않았다.
“목숨이 위급한 임무 상황에서 흑룡의 피를 통해 살아남는 것이 나쁜 것이오? 펜첼이 언제부터 강자존을 거스르고 패도를 멀리했소? 내 말이 틀렸소?”
펜첼의 기사단은 목숨이 오가는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기 일쑤였고 그러한 환경에서 흑룡의 피는 불법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 요지였다.
모두가 그 주장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사람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말투에 유진과 뮬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하물며, 정말 가주님이 이 일을 몰랐다고 생각하시오?”
제이드는 가주전에서 언제나 모든 일을 파악하고 명령을 내리곤 했으니.
가주도 알고 있는 일이었고, 자신의 행동에는 모두 당위성이 있다는 주장에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거는 과거 일로 묻어두는 게 맞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의기양양해진 시리우스가 유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훈련생 유진 로베르.”
그가 비죽 웃으며 덧붙였다.
“네놈의 수준을 보면 너도 그게 필요할 것도 같으니, 필요하다면 고려해보도록 하지. 대신, 간절히 부탁해야 할 거다.”
유진은 시리우스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뻔뻔스럽고 얄미울 수가 있지.’
유진은 동요하지 않았으나, 시리우스가 보이는 적반하장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따위건 필요 없습니다.”
“……그따위? 네놈이 미쳐버린 거냐!”
유진이 백호 단원들을 주욱 가리켰다.
“기사단원들이야 상호 동의하에 수혈했죠, 맞습니까?”
“하! 그야 당연한 말-”
“인스 형제도 동의했습니까?”
난데없이 인스 형제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시리우스에게로 향했다.
“백호 단원들이야 이미 오러를 충분히 쌓은 기사들이며, 본인들의 선택에 의해서 수혈을 받았다고 하지만.”
유진이 시리우스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제인스와 아인스도 정말 본인이 원해서 수혈을 받았는지 말하십시오.”
시리우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인스 형제에 대한 언급이 나오리란 건 예상치 못했으니까 말이다.
유진이 백호 단원들이 흑룡의 피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면, 인스 형제도 그러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시리우스가 이내 머리를 굴려 반박했다.
“내 자식의 양육에 네가 관여한다니, 이 문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안 아니냐? 너는 그냥 나를 싫어하는 거고, 꼬투리를 잡고 싶어 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에는 설득력이 담기지 않았다.
모두의 표정이 그러했다.
‘그 어린 녀석들에게도 흑룡의 피를 먹였다니…….’
‘유진의 말이 맞다. 분별력이 부족한 어린아이들에게 흑룡의 피를 먹이는 건 부도덕한 일이야.’
애초에.
유진은 흑룡의 피를 먹은 백호 기사단원을 통해 시리우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나, 인스 형제에게 흑룡의 피를 사용한 일은 시리우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공식적인 징계는 어렵더라도, 시리우스가 그렇게 중요시하는 ‘명성’에 진한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특히.
“시리우스…… 실망이구나. 아무리 권력에 취했다지만, 자식마저도 네 권력의 일환으로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뮬이 묘한 분위기에 방점을 찍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던 말을 뮬이 정확히 집어준 것이다.
“형님, 그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시리우스의 변명이 이어질 찰나.
덜컥.
한 남자가 등장했다.
뮬과 시리우스가 동시에 놀란 눈을 떴다.
“가주님.”
“아, 아버지.”
제이드였다.
그는 회의실에서 이루어진 모든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펜첼은 강함을 숭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성공이 있었고 역사에 가려진 실패도 있었다.”
제이드의 짙은 목소리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수많은 실패 속에서 성공이 피어난다고 생각한다.”
“맞습니다, 아버지.”
시리우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제이드의 말에 담긴 뉘앙스는 필시 흑룡의 피를 끝까지 연구하여 이용한 자신의 공을 알아준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리우스의 미소가 굳었다.
“가족마저도 제힘의 제물로 바치는 쓰레기는 펜첼이라고 할 수 없다.”
“……!”
유진은 제이드의 말 속에서 과거 자신과 제이드의 대화를 떠올렸다.
펜첼에 온 이유는 가족 때문입니다.
당시 제이드의 표정에 일어났던 변화는 유진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예측건대, 힘만을 숭상하던 제이드의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에 유진이 돌을 하나 던져 파문을 일으킨 것 같았다.
“아, 아버지! 아닙니다! 제 자식들은 흑룡의 피를 통해 더 강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자식들의 뜻을 이루어 주기 위해-”
“원했다라. 그래, 그 말이 맞다면 얼마나 강해졌느냐? 인성을 포기하면서까지 강해진 걸 증명할 수 있겠느냐?”
“증명이요, 할 수 있습니다!”
시리우스는 자신이 있었다.
글람푸스탄에 유진이 간 사이 인스 형제가 흑룡의 피를 마시는 양을 급격히 늘렸고.
상징검술은 깨달음의 영역이기에 아직 이르지만 가진 오러만큼은 5성급에 달한다고 자부했다.
“15살에 오러의 수준이 5성급이라면,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제인스는 아직 이르지만, 아인스는 충분히 강한 상태입니다.”
말을 듣던 와중, 유진이 조용히 한 마디를 던졌다.
“그렇다면 오러가 봉인된 훈련생 정도는 쉽게 이기겠네요?”
시리우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네놈을 지칭하는 것이냐? 네깟놈이 내 아들, 아인스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오러 봉인이 풀려도 모자랄 판에, 너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그게 뭐 어렵다고.”
“뭐?!”
유진은 시리우스의 말을 무시하고 제이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주님.”
“말하라.”
“제가 흑룡의 피로 만들어진 강함을 깨부수겠습니다.”
오러 봉인을 당했다는 건, 기사가 아닌 평범한 일반인이 되었다는 말.
그런데 그런 유진이 오러 5성급에 다다른 기사를 상대하겠다?
“아인스…… 아니, 귀찮으니 한꺼번에 상대하겠습니다. 제인스와 아인스 두 형제를 전부 붙여주십시오.”
유진이 차갑게 웃으며 덧붙였다.
“한 합에 이겨 보이겠습니다.”
모두가 경악에 휩싸였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