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유진이 뒤로 크게 물러섰다.
유진의 공격을 방해한 도끼는 바닥에 처박힐법했으나, 희한하게도 위로 떠 올라 다시 날아갔다.
자세히 보니 도끼에 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셋째야, 너의 임무가 펜첼의 주작 기사단과 치고받는 것이었던가?”
그 얇고 고운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휘이이이잉!
갑자기 거센 돌풍이 불더니, 주변의 나무들이 휘청이고 민가의 지붕이 뜯겨나갔다.
뒷짐을 진 도끼의 주인은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유진 쪽으로 걸어왔는데.
쿠오오!
가벼운 걸음걸이마다 강렬한 오러의 폭풍이 유진을 덮쳐 그를 휘청이게 했다.
하급전사들과 라울러는 이미 한쪽 무릎을 꿇고 숨만 간신히 고르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전사의 요람에서 지원을 보낸 것이었다.
‘미친, 저 정도라면 감스탄 부단장님에 비견될 수준이다……!’
유진은 오러 방벽을 둘러 기운을 감당해 내며 내뱉었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냐.”
“설마 했는데, 정말로 사제가 오줌까지 지리며 도망칠 줄은 몰랐지. 그나저나, 재밌는 기술을 쓰는구나.”
녀석은 검은 기운을 직접 보고도 놀랍지 않은지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유진이 놈을 가느다란 눈으로 응시했다.
‘여자보다도 선이 얇은 얼굴, 호리호리한 몸매, 그리고 줄이 달린 양날 도끼를 쓰는 인물이라면. 그 녀석인가.’
욜첸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도끼의 주인을 불렀다.
“대사형……! 여기는 어떻게……?”
“사부님께서는 이러한 상황까지 다 예견하신 거겠지.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대가는 기대해라.”
욜첸은 대사형인 유리가 온 것에 방금 전 그 검은 기운을 마주쳤을 때만큼 놀란 표정이었다.
‘임무가 어그러졌다는 걸 들키면 나는 저 꼬맹이가 아니라, 대사형에게 찢겨 죽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대사형의 존재가 두려운 모양이었다.
욜첸은 방금까지만 해도 목숨이 끊어질 뻔한 주제에 변명을 둘러댔다.
“촌장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일이 뭣 같게 됐지만, 제가 전부 처리하겠습니다!”
“뭘 처리한다는 거냐? 열다섯 살짜리 꼬맹이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는 놈이. 오줌이라도 닦아내고 말해라.”
“여, 열다섯 살이라니요……? 이 녀석이 열다섯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이내 자신이 멍청한 모습을 보였다는 걸 깨닫고 대사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아직도 아둔하기 짝이 없구나.”
돌풍과 오러의 폭풍이 잠시 멎은 사이, 대사형이라 불리는 자는 가볍게 혀를 차더니 손을 휙 들었다.
그와 동시에 또 한 번 도끼가 날아왔다.
도끼는 의외로 유진이 아닌 욜첸을 향했고.
서걱!
놈의 팔을 잘라버렸다.
“끄아아악!”
얼마나 빠르고 날카로웠는지, 욜첸은 제 팔이 날아간 줄을 잠시 자각하지 못한 정도였다.
“이건 임무 실패에 대한 처벌이다.”
“크윽! 할 수 있……!”
“마음 같아서는 팔이 아니라 그 머리통을 쪼개버리고 싶지만, 사형으로서 이 정도 온정은 베풀어주마.”
욜첸은 팔에서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렸다.
“욜첸, 일은 제대로 못 해도 비명소리는 그나마 들어줄 만하구나. 하하하! 여봐라! 욜첸을 이리로 데리고 와라.”
“크으윽, 으으으…….”
극심한 고통으로 문신화까지 풀린 욜첸은 하급전사에게 부축되어 대사형에게로 갔다.
“그리고 너.”
유진에게로 고개를 돌린 대사형이 흥미로운 기색을 띠었다.
“꼬마야. 네가 말로만 듣던 유진이구나. 유진 로베르.”
유진에 대한 소문은 어릴 적부터 자자했으니 흑지에도 유진의 소식이 닿은 모양이었다.
물론 유진도 저 대사형이란 자를 알았다.
“혈귀, 유리.”
“호오?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기특하구나.”
“피와 싸움에 미친 놈, 외모는 고우나 속은 그렇지 못하다더군.”
“하하! 속은 그렇지 못하다니, 서운한데. 그래도 들은 게 있구나. 욜첸도 저 지경으로 만들 녀석이기까지 하고 말이야. 마음에 들어.”
유리의 눈매가 호선을 그린다.
욜첸이 웃으며 여유를 부리는 습관은 유리에게 배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 여유는 욜첸이 부리던 것과는 다르다. 크라우드식 이도류를 익힌 내가 간신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야.’
방금 전 등장에서 보였던 매서운 기세만 봐도 그랬다.
유진이 이를 악물며 유리를 노려봤다.
저 곱게 생긴 사내 하나가 전생에서 얼마나 악명높은 자였는지 알고 있었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사의 요람에서 극상위에서 군림하는 불칸, 그리고 그의 제자가 유리다.’
불칸의 뒤를 이어 전사의 요람을 장악한 인물.
전생에서 불칸이 태양신교에 잡힌 뒤, 그 자리를 꿰찬 게 바로 유리였다.
전생에선 전사의 요람이 궤멸될 줄 알았지만, 유리의 집권 이후 전사의 요람은 더욱 잔인하며 끈질기게 버텼다.
‘오히려 불칸보다 유리가 더 뛰어나고 잔혹했다는 평가도 많았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군. 불칸의 뒤를 잇고 갑자기 강대한 힘을 얻었던 이유가 혈석에 있었겠어.’
유진의 머리에 모든 추측과 계산이 마쳐졌다.
혈귀, 유리.
이때쯤이라면 유리의 수준은 7성급 중반일 것이다.
온 정신을 유리에게 집중하는 사이 유진에게 유리의 혼잣말이 들렸다.
“뭐, 이렇게 된 이상 펜첼이든 뭐든 전부 혈석의 제물로 삼는 게 낫겠지?”
유진과 라울러의 경지를 가늠하는 듯하던 유리의 눈동자가 돌연 붉게 변했다.
눈을 마주친 유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듯, 잘 움직여지질 않았다.
이 대목에서 유진은 유리가 욜첸과는 격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대로 맞부딪힌다면 결과는 확신할 수 없다.’
유진이 잔뜩 가시를 세우고 머리를 굴렸다.
할 수 있는 건 죄다 해봐야 했다.
우선 앞서 욜첸에게 사용했던 독 연기 함정이 있었다.
유진이 기어이 몸을 움직였다.
오러를 가느다란 막내기로 만들어 땅바닥에 쏘아냈고, 마법진이 발동했다.
파바박!
다시 한번 독을 머금은 연기가 연달아 터지며 유리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유진은 탐욕을 사용, 유리를 향해 검은 기운을 쏘아 보냈다.
두 가지의 공격을 한 번에 한 셈이었다.
‘이건 막기에 까다로울 거다……!’
라고 생각했지만.
“음? 귀여운 장난을 치는군.”
유리는 그저 오른팔을 한번 공중에 휘젓더니.
화아아아악!
돌풍을 일으켜 독 연기를 말끔히 걷어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왼팔을 들어 올리자.
검은 기운 사이로 어느새 날카로운 단검 하나가 유진의 미간을 꿰뚫으려 날아왔다.
“흡……!”
방어가 우선순위였기에, 유진은 어쩔 수 없이 탐욕마저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위의 차이가 워낙 크니 얕은 마법이나 함정 따위는 통하지 않는 듯했다.
“하하! 뭐, 재치는 좋았다. 물론 재미는 별로 없었지만 말이야.”
과연 전사의 요람에서 후기지수라 불리던 그 혈귀, 유리는 대단히 여유롭고 강대했다.
상황을 파악하던 라울러가 유진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속삭였다.
“유진, 아무래도 저 자식 예사롭지가 않아. 펜첼에 지원을 요청하던가, 그것도 아니면 발란트 선배랑 엘도라와 같이 합공을 하던가 해야 하지 않을까?”
유진이 긴장을 풀려는 듯 픽 웃었다.
“인스 형들은 왜 빼.”
“걔네는 별로 열심히 안 싸울 것 같아서.”
그때.
붕, 붕, 붕.
유리가 말없이 도끼와 연결된 줄을 잡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놈의 긴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고, 덩치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미 외양 자체가 ‘사자’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문신화를 사용한 것이었다.
“너희 작전 회의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녀석의 목소리가 사자의 성대에서 울리는 듯 매우 짙고 두껍게 변했다.
그리고 아마 유리는 방금 욜첸에게 ‘펜첼 기사단이 오고 있다’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유진이 내뱉었다.
“그렇긴 하겠네. 펜첼의 기사단은 너희도 두려울 법해.”
“하하, 딱히 그렇지는 않다만.”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어 보여.”
결국 유리가 도끼를 쏘아냈다.
그런데, 공격 대상은 유진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을 유물 창고 쪽이었다.
“뭣……!”
유진은 유리의 전략을 눈치채지 못했기에 아차 하며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까아앙!
유진이 가까스로 두 검을 교차하여 거대한 도끼를 막아냈다.
화룡검과 묵광의 성취로 강해진 오러와 더불어.
“이, 라울러를, 뭘로 보고!”
라울러가 어느새 유진의 바로 뒤편에서 오러를 중첩시켜 도끼를 막아내고 있었다.
물론, 라울러도 유리의 공격을 홀로 막아냈다가는 두 동강이 날 게 뻔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해야 하지? 창고에 미리 손을 써놨다지만, 미봉책이다……!’
유진이 도끼를 어떻게든 막아내며 묘수를 떠올리려 애썼다.
유리는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더 막아 보거라! 무슨, 벽돌 부수기 놀이를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기를 쓰는 건지 모르겠군.”
유진은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전력을 다해 도끼를 쳐내고 또 쳐냈다.
‘네 말대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보다 네놈을 죽이는 게 먼저이긴 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유진이 점점 뒤로 밀렸다.
“크으윽……!”
검을 쥐고 있는 손목은 이미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고, 묵광으로 강화된 오러도 절대적인 힘의 차이에서는 별수가 없었다.
조금 전 욜첸과의 싸움보다 유리의 도끼질을 방어해 내는 것이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아하하, 그 사람들이 네놈들에게 그렇게 중요하더냐?”
“빌어먹을, 네놈 따위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욜첸과 싸울 때 힘을 비축해두었기에 다행이지, 유진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유리가 웃겨 죽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어왔다.
“끈질긴 건 좋은데, 상황이 귀찮아지는 건 정말 싫어해, 내가.”
아무래도 펜첼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말이 계속해서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결국.
꽈앙!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도끼가 유진과 라울러를 지나쳐 창고의 벽을 가격했고, 창고의 한쪽 벽이 크게 뚫렸다.
“하하하! 네가 아끼는 사람들이 열댓 명은 죽었겠…….”
“아니.”
유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냐, 벽에다가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지?”
“그런 게 있다. 알면 다쳐.”
유리가 다시 시선을 돌린 곳에는 벽이 뚫렸지만, 다친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다만 겁에 질린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댈 뿐이었다.
“괴물! 괴물이야! 엄마아! 흐아앙!”
“꺄아악!”
하나, 유리는 대략적으로 눈치챈 상태였다.
‘창고에 결계 마법을 쳐 놓은 건가. 그래서 놈이 저 창고 안에 사람들을 몰아넣은 거고.’
유리가 도끼를 고쳐 쥐었다.
“상황 파악이 아직 안 되나 보군. 뭐, 상관없나.”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유리는 본능적으로 유진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좋은 방법이라도 떠올린 모양이야. 하지만 저 희한한 창고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유리가 히죽 웃으며 다시 한번 창고를 향해 도끼를 투척하려던 차.
유진이 유리를 노려보며 발걸음을 슬금슬금 옮겼다.
‘반지가 욜첸과 가까워질 때마다 묘하게 진동했었다. 혈석이란 게 놈에게 있는 거야. 그러니.’
그가 돌연, 욜첸에게로 쇄도했다.
“……!”
유리가 도끼를 멈춰 세웠다. 이런 행동은 예상치 못했다.
어떤 묘수인지는 몰라도 우선 유진의 움직임을 제한해야 했다.
“뭣……!”
유리가 뒤늦게 도끼의 표적을 유진에게로 돌렸으나, 유진은 묵광 4성의 도움을 받아 기척을 죽이는 데에 더해 유령곡예보를 사용했고.
쉬익.
도끼는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헉!”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기던 욜첸이 달려오는 유진을 보고는 헛숨을 들이켰다.
유리 덕분에 건진 제 목숨.
그것보다도 소중한 돌멩이, 혈석.
이걸 지키지 못한다면 유리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임을 당할 건 뻔한 일이었으니까.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욜첸은 혈석을 남은 손으로 꽉 쥐고 있다가, 얼른 생각해냈다.
‘X팔, 그냥 이걸 먹어버리면 나를 함부로 대하진 못하겠지!’
이렇게라도 혈석을 지켜야 유리에게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유진의 공격도 한 박자 늦출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욜첸이 혈석을 입으로 욱여넣고 식도로 밀어 넣은 순간.
텁!
욜첸에게 다다른 유진이 욜첸의 목을 으깨버릴 듯 세게 붙잡더니.
푸욱-!
검을 가슴팍에 꽂아버렸다.
“컥……!”
“어딜 개수작을 부려.”
그는 욜첸의 식도를 타고 넘어가던 혈석을 빼내기 위해 가슴을 째 버렸고, 벌어진 식도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르륵…….”
욜첸은 그대로 절명했다.
그 대신 유진의 손에는-
“이게 너희들이 그렇게 아끼는 돌멩이다, 이 말이지?”
혈석이 쥐어져 있었다.
그런데 유리의 태도가 의외였다.
“하, 뭘 하나 했군. 혈석을 노린 거냐.”
“이걸 혈석이라 하는구나? 그래. 이게 네놈들한테 꽤 소중한 물건 같은데.”
유리가 아무렇지 않단 듯 어깨를 으쓱였다.
“완성되지 않은 혈석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왜, 그걸 볼모로 삼기라도 하게?”
“부숴버리는 수가 있다.”
“부서지기에는 너무 단단한 돌인데. 하하하! 차라리 그걸 들고 도망치는 게 더 현명한 방법 같다만. 꽁무니 빠지게 말이야.”
유진이 히죽 웃었다.
“도망치는 건 멋이 안 나잖아.”
“그럼, 뒈져라.”
유리가 도끼를 들었다.
유진은 재빨리 혈석을 움켜쥐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에 끝내자!’
그 손을 욜첸의 벌어진 가슴팍 사이에 쑤셔 넣고는, 바로 시전어를 외웠다.
‘먹어치워라.’
쭈우우욱!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