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인질 호송은 어느 기사단을 가든 극비로 이루어진단 말이야. 너희들도 알고 있지? 게다가 펜첼에서는 그 수준이 삼엄하고.”
“네, 그런 걸로 알아요.”
“그런데 이게 뚫렸다는 거 자체가 뭘 의미하겠나? 간부급 중에 배신자가 있거나, 배신자가 없다면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불칸이 유리를 찾았던 것에는 우리가 모르는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게 발란트의 요지였다.
하지만.
“야! 너는 뭐, 이런 심각한 얘기를 닭가슴살 씹으면서 듣냐? 인스 형제 묻었어?”
“뭐가.”
자칫하면 그 음모의 중심이 될 수도 있음에도 유진은 그 이야기를 넘겨듣는 모양새였다.
라울러가 소리치자 유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발란트도 유진을 보며 항상 배우며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유진이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나? 아무리 내 의견이 그저 의견에 불과하다지만, 현무 단원들이 몰살당한 큰 사건이니 너도 조사를 면치 못할 수도 있…….”
“큰 일이라고 생각해요.”
닭가슴살을 우물거리던 유진이 표정을 진지하게 꾸몄다.
“전사의 요람, 펜첼. 둘 사이에 어떤 음모가 있게 된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저겠죠. 제가 유리와 싸웠고, 가장 많은 걸 봤으니까요. 애초에 계획도 제가 짰고요.”
그런데 왜 그렇게 태평한 태도냐는 발란트의 표정에 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뭐 어떡해요? 저는 펜첼인이고, 펜첼의 기사단에 속했고, 펜첼의 임무를 하달받아 파견된 건데요. 그 와중에 벌어진 모든 일은 그냥 제가 감당하는 거니까…… 어쩔 수가 없잖아요.”
“……음.”
쉽게 말해 그냥 받아들일 생각이란 말이었다.
발란트는 유진의 말을 듣고는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처음에는 의심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지?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면 저런 태도가 나오는 게 당연한 건가? 하지만, 유진은 15살인데?’
음모론에 골몰해 있던 발란트였기에 지금 유진의 태도마저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유진마저도 그 음모를 꾸민 작자들 사이에 속한 게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다가.
뒤이어진 유진의 말을 듣고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 오로지 저만 감당하진 않겠네요. 저는 제 팀원을 믿었고, 선배님과 동기들이 전부 협조해줬으니까요. 그때 발란트 선배님이 말씀하신 대로요.”
빙긋 웃으며 발란트와 라울러를 번갈아 보는 유진의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발란트는 그 미소의 진중함을 알아챌 수 있었다.
릴리안.
유진의 미소는 그녀가 기사단을 떠나면서 단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기며 지었던 그 얼굴과 닮아있었다.
신뢰와 믿음.
두 가지가 진하게 담긴 눈빛이었으니까.
‘내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군.’
발란트는 고개를 털어버렸다.
‘공명심에 앞서서 흔들릴 법도 한데, 임무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않다니, 좋은 주작의 단원이 되겠어. 아니, 이미 훌륭한가.’
유진도 라울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지만, 굳이 말을 더하진 않았다.
이미 라울러에게 지시했던 게 있었으니까.
‘유리에게 추종향을 묻혀놨으니 다시 찾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발란트의 말대로 펜첼의 계획이 중간에 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야. 전생에서 펜첼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적어도 몇 년 정도는 뒤인데, 변화가 생긴 건가.’
유진의 등장이나, 광마의 존재가 사라짐으로 오는 변화의 여파가 있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가주인 제이드의 죽음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말인데.’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유진도 알지 못했다.
연관된 단체로 꼽을 만한 곳이 몇 군데 있을 뿐이었다.
태양신교, 전사의 요람, 그리고 마탑, 정도.
갑작스레 드러난 변화의 조짐에 유진도 긴장이 되었으나, 일부러라도 뭘 먹으면서 긴장을 풀고자 하는 것이었다.
유진이 라울러에게 물었다.
“형, 나 자는 동안 약제사 아저씨 왔다 갔지? 어디 있어? 지금 약제당에 없을 텐데.”
“어? 맞아. 지금 인스 애들이랑 엘도라 치료하고 있을걸? 아니면 식당에 있던가.”
라울러는 궁귀와 매우 친해진 상태였기에 궁귀의 행방은 라울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궁귀한테 조사해보라고 해봐야겠어. 아마도 이번 건은 궁귀로만은 안 될 수도 있다. 금월단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는데.’
여러 생각을 하며 닭가슴살을 목 뒤로 넘길 때였다.
“지금은 안 되십니다! 절대 안정이 필요하여 신관만이 입장할 수 있습니다!”
“아니, 나도 여기서 안 기다린 게 아니야. 잠깐이면 되니 그 녀석만 조용히 만나면 된다니까!”
병실 밖에서 호위기사와 낯선 여자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주님의 명이십니다……!”
“제이드? 제이드 할머니의 할머니 뻘이 나다. 잠깐이면 된다니까? 자꾸 이러면 힘을 써야 한다.”
“그래도 안 됩-”
우당탕!
사람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타난 인물은 다름 아닌 아이칸이었다.
“무, 뭔……?”
“누구세요?”
발라트와 라울러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이칸을 응시했다.
“유진이 누구냐. 딱 봐도 너군. 맞나?”
아이칸이 고개를 홱홱 돌리다가 유진을 가리켰다.
유진은 말없이 아이칸을 바라보았다.
“왜, 말을 안 하지? 이거, 이거 만든 기똥찬 녀석이 너냐고 물었다.”
착!
아이칸이 안주머니에서 도면을 꺼내 펼쳐 보였다.
척 봐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모양과 수식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자, 나도 오래 시간 쓸 생각 없으니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해라.”
아이칸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유진의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으나.
유진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이야기는 들었는데, 지나치시네요.”
“뭐가? 이 몸의 미모를 말하는 거면 됐다 그래라. 나이가 세 자리인데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듣기 싫다.”
유진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이칸의 도면을 확 잡아챘다.
“아이칸 요정님.”
“오오, 그래. 설명해라! 잘 듣고 있으니까.”
“여긴 병실입니다. 이렇게 소란을 피우며 난리나 치는 무례한 분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습니다. 나가세요.”
“……뭐라? 지금, 뭐라고?”
“나가라고요.”
아이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릴리안보다도 나이가 몇 배는 많은 조상뻘이자 요정족으로서 대우를 받아왔다.
하물며 제이드에게도 이런 대접은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꼬맹이에게 푸대접을 받으니 당황스러웠다.
“감히…….”
아이칸이 유진에게 한마디를 하려는 순간.
화아악!
유진의 눈매가 깊어지며 아이칸을 직시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한 아이칸은 순간 뱀 앞의 쥐처럼 머리가 쭈뼛 설 수밖에 없었다.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이런 기운이!’
그 눈빛 안에는 오러가 담겨 있었지만, 아이칸이 놀란 이유는 오러 때문이 아니었다.
원념.
유진의 내면에는 수없이 많은 영혼들과 원념이 들어차 있었다.
원념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주위에 퍼지면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었다.
아이칸은 요정족으로서 긴 세월을 살아가며 이러한 음기(陰氣)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영혼들은 억울한 상태가 아니다. 저 녀석의 내면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 잡은 느낌이야.’
도대체 이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15살의 나이에 저토록 많은 원념을 거느리고 있는 것일까?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아이칸이 우선 유진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유진. 내가 실수를 했구나.”
아이칸은 모르고 있겠지만, 유진의 눈빛에 담긴 원념들은 바로 혈석에서 온 것들이었다.
유진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네. 아이칸도 이걸 감지한 것 같고.’
유진은 아이칸에게 테스트 겸 일종의 혈마법을 섞은 기운을 내보인 것이었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라울러가 유진과 아이칸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진은 그사이에 뭔가 한 가지 무기를 더 얻은 것 같아. 저 요정족과 눈이 마주쳤을 때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어. 아마 이번에도 마법 비슷한 걸 쓴 모양인데.’
라울러는 유진이 마검사라는 사실을 숨기기로 약속했기에 발설할 생각은 없었지만, 매번 유진의 성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 요정족, 진짜 너무 예쁜데…….’
발란트가 라울러에게 귓속말을 했다.
“라울러. 방금 뭔가 이상하지 않았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 저 요정족이 예뻐서 그렇게 느낀 건가?”
“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 같아요.”
그사이 노여움을 푼 유진이 아이칸과 대화를 이었다.
“일단 도면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찾아오신 건 알겠으니 제가 연락드릴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설명하는 데에 1, 2분이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군. 알겠다. 약속은 굳이 안 해도 되겠지? 잘생긴 기사님.”
아이칸이 입꼬리를 올렸다.
잠깐 보아도 유혹적인 미소였기에 라울러와 발란트가 헉 소리를 냈지만.
“빨리 가세요, 피곤하니까.”
“녀석…… 어떤 아이인지 대충 알겠군. 되도록 빨리 만났으면 좋겠구나.”
“알겠으니까, 좀.”
유진은 그 미소를 본 척도 하지 않으며 침대에 벌렁 누웠다.
아이칸은 피식 웃으며 병실을 나섰다.
발란트와 라울러가 닫힌 문을 보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방금 분명히 그 요정족이 유진에게 유혹의 눈빛을 날린 건데, 저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봤나?”
“네, 저도 봤어요.”
“임무 수행에서 아주 적합한 면모를 지닌 셈이긴 한데, 방금 그 요정족은 말이 안 되는 미모였어.”
“제 말이요. 가만 생각하니, 여자를 좋아하는 건 맞는지 의심스러운…….”
이불을 덮어쓰고 있던 유진이 내뱉었다.
“라울러 형.”
“으, 응?”
“엘도라 앞에서 그랬다가는 목숨이 남아나질 않을걸.”
폐관 수련을 하고 오는 사이 라울러는 엘도라와 부쩍 친해지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함구해주라.”
“알겠으니까 그만 속삭이시고 좀 더 자.”
* * *
흑지, 청마탑의 꼭대기.
줄리아가 온갖 서적이 가득 쌓인 책상 앞에서 공부에 몰두하고 있던 때였다.
똑똑.
“줄리아님,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집사가 문을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지만, 줄리아는 듣지 못했는지 답이 없었다.
한참이나 들려오는 말이 없자, 집사는 결국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를 불렀다.
“줄리아님?”
“앗, 깜짝아. 언제 들어왔어?”
“부탁하신 교지의 소식지를 들고 왔습니다.”
줄리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유진의 소식이 있어?”
“한번 보시면 될 것 같은데요. 후, 그거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녀가 부리나케 소식지를 받아들고 글을 읽어내려갔다.
북부의 펜첼가에 소속된 유진 로베르 경이 흑지 소속의 전사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상대의 이름은 ‘유리’로, 혈귀라는 이명으로 명성을 떨치던…….
“혈귀 유리를 이겨서 포로로 삼았다니……!”
줄리아가 놀라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마력을 흩뿌렸다.
화아악!
그에 집사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줄리아님!”
“앗, 미안.”
마력이 너무 농밀했기에 집사는 순간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줄리아가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초상화가 실린 부분을 마법으로 도려내 벽에 붙였다.
“히히, 유진은 여전히 강하고 멋지구나.”
줄리아는 히죽거리며 제 방의 벽면에 온통 붙여진 유진의 사진과 소식지를 둘러보았다.
집사는 진땀을 닦아내고는 물었다.
“유진님이 그렇게 좋으세요? 오매불망이시네요, 정말.”
“언젠가 만날 날이 있지 않겠어?”
그녀의 말대로, 줄리아는 유진과의 인연이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발란트와 유진, 동기들이 제이드의 명으로 가주전으로 향하고 있다.
유진을 제외한 일행은 가주전에 직접 방문한 적이 매우 드물었기에 긴장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데를 혼자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냐? 와…….”
라울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제인스가 라울러에게 말했다.
“하하, 라울러. 17살이 되어도 애송이 같군. 가주님이 우리를 해하실 것도 아닌데 왜 긴장을 하지?”
“손이나 떨지 말고 말해, 제인스.”
“크흠.”
발란트와 엘도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리 나지 않게 침을 삼키던 발란트는 유진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왜 가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걸까? 설마 현무 단원들의 죽음에 대해서 신문하시려는 걸까?”
발란트는 제 위치도 까먹을 정도로 긴장을 했는지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글람푸스탄 임무의 책임자이자 팀장이었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모양.
유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가보죠. 죽기보다 더하겠어요.”
가주전 앞에 유진 일행이 서자, 커다란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두 명.
“들어와라.”
제이드와 에막스였다.
유진 일행은 긴장한 기색을 숨기며 제이드 앞에 서서 인사를 올렸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제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막스가 본론을 꺼냈다.
“이곳에 부른 이유는, 이번 임무에 대한 보상을 수여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말도록. 라울러는 다리에 지진이 났나?”
“아, 아닙니다!”
에막스가 종이를 펼쳐 읽었다.
“주작 기사단의 신분으로 글람푸스탄 마을의 유지 보수 임무를 맡았고, 이후에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서 훌륭히 대처한 일을 높이 사는 바이다.”
그리고 에막스가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 하나를 유진 일행의 앞에 놓았다.
“셋 중 하나를 골라라.”
열린 상자 안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대륙 최고의 은행에서 발행한 백지수표.
척 봐도 희귀해 보이는 영약.
그리고.
“마지막, 서적들은 펜첼의 비급이다. 다만, 따라 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비급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겠지.”
유진과 일행이 고민에 빠졌다.
라울러는 돈다발과 영약을 번갈아 보았다.
‘비급은 지금 상황에서 필요 없다. 나는 창을 쓰니까. 다만, 여동생이 걱정되는데…… 돈이 나을까? 아니면 영약이 나을까?’
각자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제이드가 고민을 고민하는 유진을 보며 히죽 웃었다.
‘유진, 너라면 뭘 선택하겠느냐.’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