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제이드가 기대감 섞인 미소를 애써 지우며 유진을 바라보는 동안.
“선배로서 내가 먼저 고르지.”
발란트는 긴장한 기색을 숨겨가며 앞으로 나왔다.
그가 고른 것은 펜첼의 비전.
‘언제까지나 유진을 보면서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오러 수준은 내가 더 뛰어나니,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야 해.’
사실, 혈석을 흡수한 뒤로는 유진에게 오러 수준도 밀리게 되었지만, 발란트는 그 사실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낡은 서적의 모양새를 한 비급을 집어 들고 발란트가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어 엘도라와 라울러, 인스 형제가 보상을 선택했다.
엘도라는 발란트와 마찬가지로 펜첼의 비급을 선택했다.
‘경신보도 그렇고, 나이가 이쯤 되니 오러 수준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
글람푸스탄에서 유진을 보고 따라 했던 경신보를 떠올렸기에 이러한 선택을 한 것.
인스 형제와 라울러는 선택이 달랐다.
“저는 이 영약을 선택하겠습니다. 근데…… 어떤 영약이죠?”
라울러의 질문에 에막스가 빙긋 웃었다.
“복용 후 오러 운용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그 영약의 효과를 체감할 것이다. 창도 잘 다루게 되겠지.”
“아아……!”
라울러는 에막스의 눈빛을 받고 감격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한때는 검이 아닌 창을 다룬다는 게 패널티가 되어 에막스의 지적을 숱하게 많이 받으며 눈물을 흘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에막스를 두려워하던 라울러였으나, 지금은 그의 응원을 받고 있었으니.
“유진…….”
감격스러움에 목이 메이는 걸 느끼며 라울러가 뒤쪽에 앉아있는 유진을 돌아보았다.
‘다 네 덕분이야.’
라울러의 눈빛을 받은 유진이 히죽 웃으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흠흠, 자, 어서 고르도록. 뒤에 손님이 있으니.”
어색해하는 에막스의 말에 라울러가 꾸벅 인사를 올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인스 형제의 차례.
그들은 차례가 되자마자 앞으로 성큼성큼 나오더니, 발란트와 엘도라가 고른 새로운 비전서를 가리켰다.
그리고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제이드가 답했다.
“말해라.”
“이 비전서의 집필자에…… 시리우스 경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제이드가 잠시 멈칫했다.
이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미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시리우스는 집필에 참여하지 않았다. 수정에도 참여한 적은 없어.”
“감사합니다.”
인스 형제는 그제야 비전서를 집어 들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제이드가 물었다.
“그걸 물어본 이유가 무엇이냐?”
인스 형제는 이제 17살로, 곧 성인이 될 나이였다.
그리고 제이드는 인스 형제의 마음이 더욱 단단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이 질문을 한 것이었다.
“저희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쌍둥이로 태어났고, 무엇이든 함께 하면서 자랐습니다. 밥을 먹어도 같은 밥을 같은 양만큼. 검을 휘둘러도 나란히, 같은 궤도로 휘둘렀습니다. 그만큼 사고의 폭이 좁았죠.”
모두가 조용히 인스 형제의 말을 들었다.
“그 덕에 아버지가 저희에게 어떤 짓을 하는 건지에 대해 자각하지 못했는데, 그걸 깨달았습니다.”
“결국 저희는 아버지와 연을 끊었고, 저희는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는 고마운 녀석이 있었습니다.”
“저희 둘이 서로 기대고 머리를 싸매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그 녀석 덕분에 해결했어요.”
그게 누군지는 펜첼에서 먹고 자랐다면 누구나 아는 인물이었다.
제이드가 유진을 봤다.
인스 형제도 고개를 동시에 끄덕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의심스러웠습니다. 저희가 유진을 믿고 따르는 만큼 유진도 저희를 믿어주는지, 같은 동료로 생각하는지 말이에요.”
“아무리 저희가 유진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제인스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번 글람푸스탄 임무에서 깨달았습니다.”
“유진 로베르, 이 녀석은 저희를 믿어주었고, 저희에게 임무를 주었습니다. 당시에 유진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저희는 느꼈거든요. 유진은 우리를 믿고 있다고요.”
제이드가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희를 믿어주는 유진에게 은혜를 갚으려면, 유진을 미워하고 저희까지도 미워하는 아버지…… 아니, 시리우스 경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집필자에 시리우스 경이 있었다면 비전서를 고르지 않았을 것이냐?”
“예.”
단호한 대답에 제이드는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시리우스, 네 아들들이 변했다. 아니, 아주 많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겠군.’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연히도.
‘유진.’
유진이 낯간지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스 형제를 끌어당겼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앉아, 일단.”
“가주님, 유진에게는 그냥 이 세 가지 보상을 다 주시면 안 될까요?”
“맞습니다! 유진이 없었다면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 죽었을 겁, 읍읍!”
유진은 인스 형제의 입을 틀어막고는 인사를 올렸다.
“이제 보상을 고르겠습니다.”
제이드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지우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그, 가주님.”
“……?”
유진이 히죽 웃었다.
“아인스, 제인스 형이 말을 해줘서 말인데, 제가 원하는 보상이 따로 있긴 합니다.”
“그게 뭐지?”
적막에 싸인 가주실 안.
유진의 폭탄 발언이 터졌다.
“가주님이 임무에 나가실 때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원합니다.”
에막스의 입이 벌어지고, 발란트는 헉 소리를 흘렸으며, 동기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제이드도 되물었다.
“나와…… 같은 임무에 나가고 싶다고?”
“예, 그렇습니다.”
“내가 임무에 나가는 때를 너는 언제인지 아느냐?”
“알죠. 가주님이 필요할 만큼 커다란 임무에 가주님이 나가시는 거 아닙니까?”
묘하게 당연하고 맞는 말이었다.
“유진 로베르, 네 업적은 알겠으나……!”
에막스가 당황하여 손을 들었지만, 제이드가 에막스를 저지했다.
“나와 동행하려면, 그래야만 하는 합당한 이유를 설명해야겠지.”
유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의 임무는 분명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초고난도의 임무일 것이고, 언제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번 글람푸스탄 임무에서도 느꼈습니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고요. 제가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크나큰 행운임을 압니다.”
“그리고.”
유진이 표정을 진지하게 꾸몄다.
“저는 앞으로 저에게 행운보다는 저의 순수한 실력이 따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 과정에 가주님의 가르침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발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안 단장님은, 도대체 어떻게 저런 훌륭한 자식을 낳고 기르신 걸까.’
에막스는 말문이 막혔다.
‘말 하나는 정말 청산유수구만.’
마지막으로.
제이드가 피식 웃었다.
“그래라. 다만. 목숨이 위험하더라도 나는 도와줄 수 없다. 그게 나의 교육방식이니까.”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유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 * *
주작 단원들이 숙소로 돌아가고.
에막스가 말했던 뒤 손님이 가주전에 들어왔다.
“아이칸, 오랜만이오.”
“오랜만이에요, 제이드 경.”
둘은 서로 존대를 하며 예우를 갖춘 인사를 나누었다.
주작 단원들이 가주전에 들어올 때부터 다리를 떨었던 모습과는 달리, 아이칸은 전혀 흔들림 없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만큼 아이칸은 10성 기사이자 반신의 영역에 다다른 제이드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였다.
이는 웬만한 기세로는 꿈쩍도 않는 요정족만의 특징이자 강점이었다.
“오늘 소란이 있었는데, 왜 그랬던 것이오?”
“소란이요? 아, 병실에서 그랬던 거 말입니까. 그, 작은 꼬마애 하나 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미안해요.”
아이칸은 아주 가끔 릴리안을 만나기 위해 펜첼에 들렀었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그런 이유인 줄로 알았던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꼬마? 혹, 유진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 말을 안 했군요. 네, 맞아요. 그 천재 녀석 말이에요.”
방금 전에도 폭탄 발언을 남기고 간 유진이었는데.
이번에는 뭘 어떻게 했길래 아이칸마저도 현혹시킨 것일까.
제이드가 사뭇 덤덤한 표정으로 툭,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는 것이오?”
“흠, 뭐, 어차피 대륙 전체에 퍼질 소문이니, 말하자면…….”
아이칸이 유진에 대한 칭찬을 줄줄이 꺼내놓았다.
릴리안을 통해 웬 마도구 제작에 관한 도면 하나를 보내왔는데, 녀석의 천재성이 그 단 하나의 도면에서 모두 드러나 보이더라.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와서 녀석을 보러 오니 아주 도도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더라.
내 스타일 알지 않느냐, 나 그런 녀석에게 약한 거. 등등. 이야기를 늘어놓던 아이칸이 결정타를 날렸다.
“녀석은 대륙의 판도를 바꿀 마도구 장인이 될 거에요.”
한참 재밌게 말을 듣던 제이드가 표정을 굳혔다.
“음, 그건 안될 말이오.”
“……? 뭐라고요? 왜요? 마도구 제작에 재능이 있는 건 아주 희귀한 일이에요. 당신과 같은 10성급 기사 만큼이나 귀한 대접을 받을 거라고요.”
제이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유진은 주작 단원으로서 기사의 길을 걷고 있는 녀석입니다. 마도구 제작에는 큰 관심이 없을 거요.”
아이칸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그 아이의 외할아버지요.”
“나는 아이칸인데요.”
“아무리 요정족이라 하더라도, 수년을 함께한 세월은 이길 수 없는 법이외다.”
“참나! 어쨌든 나중에 뭐가 될 건지는 그 도도한 녀석에게 달린 거죠.”
“나한테는 딱히 도도하지 않던데, 하하. 아이칸은 좀 더 노력해야겠소.”
“어어? 이 양반이.”
제이드의 옆에 있던 에막스는 투닥거리는 둘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그 위대한 요정족 아이칸과 북벽 제이드가 한 녀석 때문에 이렇게 귀여운 언쟁을 벌이시다니.’
한참을 더 말싸움을 벌이던 둘은 제풀에 지쳐서 손을 내저었다.
“아휴, 어쨌든, 오늘 소란에 대한 사과는 나중에 아티팩트 하나 만들어서 갚을게요.”
“아티팩트는 필요 없으니, 유진을 탐내는 그 마음이나 거두시게.”
“그건 안 될 말.”
* * *
며칠 뒤.
유진은 이제 병실이 아니라 본래 있던 거처에 돌아왔다.
“유진!”
“공자!”
릴리안과 금검, 궁귀, 투귀까지 한데 모여 유진을 맞이했다.
“뭐, 뭐야. 왜 다들 여기에 있어요?”
릴리안이 유진을 껴안고는 울먹거렸다.
“내 새끼, 그게 죽을 뻔했다가 돌아와서는 할 말이니! 당연히 다 모여야지…….”
그간 병실에는 릴리안도 들어오지 못했기에 이토록 격한 환영을 하는 것이었다.
금검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유진과 릴리안을 안았고, 궁귀와 투귀는 자기네들끼리 준비한 약차와 음식을 꺼내오기 바빴다.
그리고.
“유진, 생각보다 일찍 보네.”
그 옆에는 아이칸도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유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제가 먼저 연락한다고 했을 텐데요.”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