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불쑥불쑥 나타나는 사람들.
유진은 태양신교의 참모로 있을 적부터 자신의 높은 신분만 믿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배려하지 않는 자들을 싫어했다.
“분명히 경고했는데, 제 말이 말 같지 않나요?”
유진이 불쾌한 얼굴로 아이칸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이드 앞에서도 농담을 하고 투닥거리던 그 아이칸이 잔뜩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묘하게 차가워진 분위기에 금검과 궁귀, 투귀마저도 유진의 눈치를 보았다.
그때, 릴리안이 손을 내저었다.
“유진, 아이칸 님이 함부로 찾아온 게 아니라, 내가 일부러 이 자리에 초대한 거야. 그래도 멀리서 찾아와 며칠씩이나 기다리고 계신 손님인데, 이 정도 대접은 괜찮지 않을까? 하실 말씀도 있으시고 말이야.”
“……그렇군요.”
유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표정을 풀었다.
그에 따라 아이칸도 호흡을 내쉬었다.
‘나, 참.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 꼬맹이에게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지? 그깟 도면 하나만 보고 찾아온 내가 미련한 건가?’
전설의 마도구 제작자.
대륙에서도 몇 안 되는 초 희귀종.
300살에 가까운 나이로 세상 풍파를 모두 겪으며 지혜를 섭렵한 현자.
하물며 마도구 판매로 확보한 재산 규모만 따져도 로베르가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어떤 인간보다도 아름답고 고혹적인 미모를 소유한 자가 바로 아이칸이었다.
‘가질 건 다 가진 내게 100이면 99는 무언가를 얻어내거나 원하는 게 있는 태도였는데, 이 녀석은 전혀 그렇지 않잖아. 뭐가 나를 기죽게 만드는 거지?’
제이드와 마주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다.
마치 요정족으로서의 본능을 건드리는 느낌.
아이칸이 궁금증에 휩싸여 딴생각에 잠긴 사이.
“자, 자. 죽다 살아난 우리 유진 공자도 왔겠다, 별미를 준비했소이다.”
“궁귀와 저, 투귀의 합작이오.”
투귀가 음식이 가득 채워진 식탁을 공개했다.
“이게 다 뭐야? 언제 준비했어?”
금검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릴리안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론 아이칸은 입맛이 워낙 까다로웠기에 저런 진수성찬은 눈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음, 맛있네.”
유진이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아이칸의 호기심이 동했다.
그녀가 도도한 표정으로 초코 쿠키를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뭐, 얼마나 맛있길…… 음!?’
바삭.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촉촉한 식감.
코끝으로 퍼지는 녹진한 초코 냄새.
그렇다고 너무 달지도 않고 너무 담백하지도 않은 적절한 당도까지.
“목이 막히시오? 이걸 마셔보시오.”
아이칸이 충격으로 물든 얼굴을 하고 있자 투귀가 약차를 건넸다.
‘쿠, 쿠키는 아주 기똥차게 맛있긴 하군. 하나, 약차는 그래봤자 약차일 뿐이겠…… 어?’
호로롭.
아이칸은 약차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거, 도대체 무슨 차인 게냐?”
“호박차이올시다.”
단순히 호박차일 뿐인데.
‘무슨, 이런 차가?’
향긋한 호박 내음과 더불어 입안에 있던 쿠키에 차가 스며드니 그 맛의 조화에 아이칸이 말을 잇지 못했다.
“자네가 만든 것인가?”
“쿠키는 제가 만들었고, 약차는 궁귀와 함께 만들었소이다. 입맛에 잘 안 맞으시오?”
“아니, 아니다. 맛있어. 정말 대단하구나.”
생긴 건 산 도적인데 요리실력이 말도 안 될 만큼 뛰어났으니.
‘도대체 유진, 저 녀석은 어떻게 이런 일류 쉐프를 거느리고 있는 거지?’
저 도도하기 짝이 없는 녀석에겐 도대체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일까.
그녀는 유진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아이칸이 투귀에게 칭찬을 하는 모습을 보던 금검이 괜히 애꿎은 궁귀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하하, 투귀가 요리를 잘하긴 해. 약초밖에 달일 줄 모르는 누구랑은 다르게.”
궁귀가 픽 웃었다.
“약초도 달일 줄 모르는 놈보다도 낫지. 순 심술이나 부리는 놈보다도 낫고 말이오.”
“가만 보니 약차가 맛은 있는데, 깊이가 부족해, 깊이가. 이 정도는 개나 소나 다 달이겠는데?”
“네놈에게 준 약차는 조금 맛이 다르지? 특별한 걸 하나 더 넣었거든.”
“……뭘, 무슨 짓을 한 거냐.”
“머리털이 다 빠지는 기묘한 효과가 있을 거요.”
“이 미친 작자가!”
“농담이오, 농담. 하하!”
푸하하!
본전도 못 건진 금검이 입을 삐죽거리는 사이,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다.
분위기가 이쯤 풀어지자 릴리안이 아이칸에게 말했다.
“아이칸님, 이제 유진한테 말하려던 거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우물우물, 음, 그럴까?”
흠흠.
목을 가다듬은 아이칸이 본론을 꺼내놨다.
“일단, 이 도면에 대한 우수성부터 말을 해야-”
“잠깐, 잠깐만요. 아이칸님.”
릴리안이 아이칸에게 작게 속삭였다.
‘칭찬은 이미 너무 많이 하셨으니까, 본론만 꺼내놓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게다가 유진은 칭찬에는 신물이 난 애라서.’
‘아, 그래? 녀석을 꼬시려면 전략이 좀 달라야 한다는 말이지?’
‘맞아요. 유진을 움직이려면 조금 더 도도하게 행동하셔야 할거에요.’
보통 아이칸씩이나 되는 인물이 칭찬을 하면 누구든 간에 까무러치는 게 정상인데, 유진은 다른가 보다.
“뭐길래 그러세요? 둘이서 속닥속닥.”
유진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아이칸을 바라보자 이번엔 금검이 입술을 짓씹었다.
‘나의 공자가 저 요괴 할망구에게 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이칸이 말을 이었다.
“본론부터 말하면, 유진이 건넨 이 도면으로 물건을 만들어 보고 싶은데,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진도가 안 나가는 상황이다. 내가 어려워할 정도라면, 정말…….”
유진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그녀는 참아냈다.
“하여튼, 유진의 도움이 필요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니, 가능하면 시간을 좀.”
유진은 어디가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미래의 기술이니 지금에서는 아직 발전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구나.’
이론과 구조에 대한 설명이야 유진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옆에서 알려만 주면 아이칸은 이해할 터이다.
다만 내용이 길어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 같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나더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 안에 있나?”
발란트였다.
금검이 문을 열자 발란트가 릴리안을 발견하곤 헉 소리를 냈다.
“다, 단장님……!”
릴리안도 작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자 발란트가 원래 할 말도 잊은 채 홀린 듯 걸어들어왔다.
“단장님, 언제부터 와 계셨습니까……?”
“아휴, 얘는 아직도 날 단장이라 부르네. 다친 데는 없니?”
손사래를 치는 릴리안에게 발란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저야 유진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발란트는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죽다가 살아났었기에 릴리안을 다시 마주한 게 무척이나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크흑,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 항상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부끄러운 모습 보이지 않기 위해…….”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발란트의 모습을 보던 유진이 작게 웃었다.
‘발란트는 언제나 어른스러우려 노력했고, 모범이 되려 애썼다. 그건 어쩌면 단순한 책임감이 아니라, 전직 단장이자 롤 모델이 어머니를 닮고자 한 걸 수도 있겠구나.’
허당끼를 보이던 발란트의 이면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유진이 뭐, 잘못이라도 하면 호되게 혼내렴. 알겠지?”
발란트는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제가 유진에게 매번 배우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선배이자 형으로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항상 고마울 따름입니다.”
훈훈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참, 유진이 발란트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무슨 일입니까?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중요한 일 같은데.”
“아, 내 정신 좀 봐. 그, 감스탄 부단장님께서 전서구가 왔다. 임무에 인원 충원이 가능한지 말이야. 물론 강제는 아니고 지원자에 한해서.”
그 말을 들은 아이칸이 벌떡 일어섰다.
“설마, 아니지? 안 갈 거지? 유진. 이건 좀 아니잖아.”
릴리안도 유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엊그제 퇴원을 했는데 이번에는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들.”
발란트는 유진의 답을 기다리며 한 마디를 보탰다.
“이미 네 동기들한테는 물어봤는데, 전부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못 갈 것 같다고 하더군. 혹시나 해서 너에게도 의사를 묻는 거다. 부담은 가지지 마.”
그러면서 발란트는 은근히 유진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유진이라면 충분히 지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병실에서 아이칸에게 펼쳐 보였던 유진의 매서운 기운.
분명 유진도 부상과 더불어 내력 손상이 있었지만, 궁귀의 뛰어난 약제와 더불어 투귀의 영양 만점 음식으로 유진은 이미 회복은 물론 성장까지 한 상태였다.
게다가 체첸을 협박한 덕분에 정신적인 안정도 빠르게 되찾은 상태였다.
유진도 발란트의 눈빛을 읽고 잠시 고민했다.
‘혈석의 원념이 들어오면서 몸이 눈에 띄게 달라졌어. 웬만한 부상에는 티도 안 날 것 같은데.’
아이칸에게 테스트를 해보았지만, 지금의 수준은 유진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당장 느껴지는 바만 해도 신체의 회복력과 내구도가 말도 안 되게 좋아진 상태였다.
실험 삼아 몸에 작은 자상을 내보았을 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가 아무는 광경을 보았다.
“언제까지 말씀드리면 되죠?”
“오늘 안에만 말해주면 된다.”
“알겠습니다.”
발란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릴리안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건강하세요, 단장님. 꼭 다시 돌아오시리라 믿습니다.”
“돌아올 일이 없는 게 좋지 않을까? 잘 지내고 있어. 또 보자.”
발란트는 릴리안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유진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시끌벅적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모두가 떠난 자리.
유진이 궁귀를 조용히 불렀다.
“조사는 다 됐어?”
“전사의 요람과 펜첼 사이에 뭐가 오갔는지는 아직 진행 중이오. 워낙 펜첼의 기밀은 삼엄하다 보니.”
“알겠어. 붉은 전갈은?”
궁귀가 짧게 설명했다.
“공자가 글람푸스탄으로 떠난 사이 붉은 전갈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고, 현재는 대륙 남부에 위치한 ‘오스틴 왕국’에 집결 중이오.”
“오스틴 왕국? 거기엔 뭐 때문에?”
“그게 문제요. 이번 기회에 아주 뿌리를 뽑아버리려 했는데, 놈들이 우리 존재를 눈치챈 건지 감독을 강화하는 바람에.”
붉은 전갈은 유진에게 있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언제, 어디서 또 나타나 유진을 노릴지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소탕을 해야 했다.
그런데.
“잠깐, 오스틴 왕국이면…….”
감스탄 일행은 대륙 남부 왕국의 왕이 펜첼에 직접 보내온 호위 요청 건으로 파견되었다 했다.
그런데 붉은 전갈이 대륙 남부 소재의 오스틴 왕국에 있다?
“하, 붉은 전갈 놈들 때문에 감스탄 부단장님이 고생하고 있는 거였군.”
발란트에게 말하러 갈 게 생겼다.
* * *
다음 날.
발란트를 통해 임무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유진이 짐을 싸고 대륙 남부의 오스틴 왕국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또 임무에 간다고? 또?”
아이칸은 이제 유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마도구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슬쩍슬쩍 던지고 있었는데,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유진, 이제 이 아이칸은 안중에도 없어진 게냐? 나 지금 너만 몇 주째 기다리고 있는데? 제이드도 나를 이렇게 취급하지 않는데?”
“지금 하시는 걸 보니까, 도면에 대해서 설명 시작하는 순간부터 한 일주일 잡아먹을 것 같아서 엄두가 안 나네요.”
아이칸은 속내를 들켜 움찔하다가 릴리안의 말을 떠올렸다.
-유진을 움직이려면 조금 더 도도하게 행동하셔야 할거에요.
아이칸이 돌연 팔짱을 꼈다.
“그래, 좋다.”
“네, 제가 그 아티팩트가 그렇게 급한 게 아니라…… 갔다 와서 이야기하죠.”
“아니?”
아이칸이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다.
“그건 너 하는 거 봐서 생각해봐야겠다.”
유진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