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제가 하는 걸 봐서 아티팩트를 만들던지, 말든지 하겠다고요?”
“그래, 나도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아이칸이 속으로 히죽 웃었다.
‘300년을 살면서 매번 내게 설설 기는 녀석들만 있었으니 이런 연기는 처음이군. 하지만 꽤 통하는 것 같은데? 역시, 이 꼬마도 다를 건 없…….’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세요.”
“으응?”
“마도구 제작이야 아는 사람이 많아서. 굳이 저도 아이칸님의 시간을 뺏어가면서 부탁하고 싶지는 않네요. 다음에 또 뵐게요.”
꾸벅 인사한 유진이 짐을 챙겨 들고 방을 나가버리자 아이칸이 화들짝 놀랐다.
“잠깐……!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다.”
“아이, 참. 왜 자꾸 이러실까?”
유진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칸을 쳐다보자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알려줘야 할 것 아니냐…… 도면의 이해에 필요한 팁을 주거나, 그게 아니라면 같이 남부에 갈 기회라도…….”
유진이 피식 웃었다.
“같이 갈 수 있다고 하면 가실 거에요?”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어서 말을 못 했지.”
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뭐,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같이 가시죠.”
“정말이냐? 임무에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가도 된다고?”
“싫으시면 말고요.”
“가겠다.”
아이칸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은 질색이지만, 유진의 도안을 보고 솟아오른 창작 욕구를 주체할 수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드린 도면에 관한 보충설명을 해드리는 대신, 다른 아티팩트 제작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죠? 임무에 필요한 걸로요.”
“임무에 필요한 아티팩트? 그런 것들이 한 번에 뚝딱 만들어지는 건 아닌데.”
“제가 도와드리면 가능할 거예요. 싫으세요?”
“아, 아니. 그렇게 해준다면야, 뭐.”
유진은 아이칸을 마치 마법 도구가 나오는 신비한 주머니처럼 보는 듯했다.
‘왜 이렇게 자꾸 말리는 느낌이지? 내가? 이 아이칸이?’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 자꾸 휘둘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이 꼬마의 천재성을 빌릴 수 있다면 어쩔 수 없다……! 하물며 기분이 그렇게 썩 나쁘지도 않으니.’
유진이 히죽 웃었다.
‘아이칸이 같이 가준다면 오히려 좋지. 필요한 아티팩트가 있으면 맡겨버리면 되니까. 게다가 오스틴 왕국은 요정족과 얕지만 인연이 있긴 하다. 그 덕에 마도구 제작에 필요한 재료는 왕국에 있을 테니.’
다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저번부터 왜 이렇게 아티팩트 제작에 목을 매는 거지? 마치 지금이 아니면 만들지 못할 것처럼 말이야.’
유진은 아이칸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혹시,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 와중, 금검이 유진을 찾아왔다.
“공자! 이제 가야 하오. 빨리 나오…… 뭐야, 아이칸 님도 여기 계셨습니까.”
금검이 사뭇 경계 섞인 눈빛으로 아이칸을 응시했다.
유진은 기사단원이 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홀로 보낼 수가 없어 펜첼이 금검과 유진의 동행을 허락한 것인데.
“그렇다. 자네도 같이 가는 모양이지?”
“그렇습니다만, 설마, 아니지요?”
“맞다. 나도 같이 간다.”
아이칸이 사뭇 자랑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이칸님이 거기까지 가서 뭘 하려고 가십니까? 공자. 이거, 얘기 다 된 거요?”
유진은 대답 대신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뭔가를 슥슥 적더니 금검에게 건넸다.
“임무 선택권이야. 펜첼 상부에 보고하면 돼.”
백호 기사단과의 대련에서 승리한 보상으로 얻어낸 임무 선택권이었다.
“응? 이걸 갑자기 왜 사용하는 거요?”
“임무 선택권으로 가게 된 임무지에서는 자유도를 보장하는 조건이 있잖아. 기왕 동행할 사람도 많고, 가서 개인적으로 볼 일도 있고 말이야.”
“……아이칸님도 같이 가신단 말이군.”
금검이 못 미더운 표정을 하고 있자 아이칸이 그를 쏘아보았다.
“왜,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게냐?”
금검은 ‘당연히 이유가 있지.’라며 말을 쏟아내려다가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야 기쁠 따름이오.”
‘저 요괴 할망구, 겉은 번지르르하더니 그새 유진 공자를 홀린 건가? 아니, 공자는 그런 것에 쉽게 넘어갈 인물이 아닌데.’
유진은 둘의 대화는 신경도 쓰지 않고 짐을 싸 들고 입구로 향했다.
‘오스틴 왕국에서의 1왕자 호위 요청, 그리고 붉은 전갈. 둘은 분명히 연관이 있을 거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유진이 완전 기억을 활용해 빠르게 과거를 하나씩 떠올렸다.
임무에 나서기 전, 오스틴 왕국에서 유진은 자신이 무얼 해야 하고, 어떻게 판을 깔아야 하는지 계획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짚이는 것이 하나 보였다.
‘오스틴 왕국에 있는 수호 신수, 나막스탈스의 독이 탈취당한 사건이 있었어. 다만 당시에 호위 요청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펜첼에 속해있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유진이 해야 하는 일은 하나였다.
‘독의 탈취와 붉은 전갈 사이에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야 해.’
* * *
탓.
유진과 금검, 아이칸이 이동 관문을 거쳐 오스틴 왕국의 땅을 밟았다.
뛰어난 자연 절경을 자랑하며, 외부와는 독립된 섬 지형인 오스틴 왕국에는 몇 가지 특징이 더 있었다.
지금이야 이동 관문을 통해 왕래가 편해졌지만, 그전까지는 배를 이용해서 와야 했기에 독립적인 문화가 많았다.
이로 인해 변종 동물이나 마수들도 더러 있었다.
또한 관광지로서 아주 유명하며 대륙의 4대 험지를 제외하면 인구 밀도가 제일 적은 땅이었다.
“이야, 경치 보시오! 죽이는구만!”
“봐줄 만하군.”
금검과 아이칸이 푸른 빛이 파릇파릇한 숲과 바다를 보며 감탄하는 사이.
유진은 덤덤한 표정으로 감스탄 부단장과 주작 단원이 머무르고 있다는 오스틴 왕국의 왕성으로 향했다.
아이칸은 말은 새침하게 했지만, 자유를 중시하는 요정족으로서 이러한 임무에 나선 것은 처음이기에 오히려 설레는 느낌으로 들뜬 상태였다.
“호오, 저 벌레! 남부 오스틴에서도 아주 희귀한 벌레인데, 자네, 저게 뭔지 아나?”
“내가 어떻게 알겠소.”
“만지면 행운의 기운이 서린다는 희귀종이야. 실제로 저 벌레를 발견하고 만지기까지 한다면 원하는 것 하나는 무조건 갖게 된다는 속설이 있지. 유명하지. 에잇, 내가 독차지해버릴까?”
“아니? 내가 만져보겠소. 그깟 벌레 하나 만진다고 행운이 따른다면…… 후후.”
금검이 주저 없이 등껍질이 황금빛인 손톱만 한 벌레를 건드렸다.
그러자마자.
쯔즙!
벌레는 아주 지독한 냄새가 나는 액체를 금검의 얼굴에 쏘아버리고는 날아가 버렸다.
“이, 이게 뭐요! 이것도 감내해야 행운이 오는 거요?”
“푸하하! 다 농담이었는데. 순진하긴.”
“이잇!”
금검이 씩씩대는 걸 아이칸은 우습다는 듯 웃기만 했다.
금검은 아이칸을 쏘아본 뒤 유진을 돌아봤다. 금검도 유진에게 뭐라고 말 좀 해보라는 표정이었다.
유진의 말 한마디에 따라 아이칸이 조용히 다닐 것이냐, 자유롭게 다닐 것이냐가 결정된다.
“조용히 따라오세요. 벌레 같은 거는 나중에 보시고.”
“그거 봐라! 하하!”
“크윽…….”
아이칸이 기고만장하여 웃어대었고 금검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다가.
“내 한 100년 만에 남부에 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는데, 최고로군.”
“300살이나 먹으면 기분이 안 좋지 않소이까? 완전 초특급 할머니잖소.”
“뭣이야?”
“아니오. 혼잣말이외다.”
금검은 그저 유진만 믿고 아이칸에게 한 방 먹이고는 킬킬거렸다.
유진은 투닥거리는 둘을 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으로 계속 걸었다.
“그만하고, 이번 임무 내용이나 다시 되짚어보자. 중요한 부분이 뭔지.”
금검은 이때다 싶어 얼른 입을 열었다.
“현재 오스틴 왕국의 1왕자가 주작 기사단의 호위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주작이 도착하기 전 실종되어 주작의 임무가 1왕자 ‘호위’에서 ‘탐색’으로 바뀐 상황이오.”
“주변 인물들은?”
“왕의 심기는 매우 불편하고 왕비는 충격으로 쓰러진 상황이라 알려졌소.”
“그에 따른 영향도 알려줘.”
“1왕자가 사라진 덕분에 일반인들은 외부로 이동할 수 없게 봉쇄령이 내려진 상태이오. 들어오는 이동 관문은 괜찮으나 나가는 이동 관문도 폐쇄되었소.”
“왕의 허락이 있다면 나갈 수는 있겠지.”
“그렇소이다.”
이미 임무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지만, 유진이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 듣고는 다시 한번 추측했다.
‘오스틴 왕가는 예로부터 조련사의 자질을 타고나서 하늘길은 와이번으로 바닷길은 씨-서펜트를 통해 통제하고 있어.’
그렇다는 말은.
‘이걸 뚫고 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동 관문 또한 막혀 있으니 분명 1왕자가 왕국의 땅 안에 있는 것은 확실해.’
전생의 기억에 따라 왕자가 있을 만한 곳이 몇 군데 짚이는 곳이 있긴 했다.
하지만 실종 사건은 시간이 생명.
최대한 빨리 왕자를 찾아내야 임무가 끝날 터이고.
‘붉은 전갈이 제 일을 끝내고 또 흩어지기 전에 꼬리를 밟아야 해. 물론 붉은 전갈이 왕자를 직접 납치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쉽게 말해 유진에게는 두 가지 숙제가 있는 셈이었다.
유진의 머릿속에서 경우의 수에 따른 계획들이 착착 잡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보니 오스틴 왕국에 내가 아는 친구가 한 명 있던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군.’
적당히 정리가 될 즈음이었다.
“그, 1왕자인가 뭔가 하는 녀석을 찾는 데에 필요한 마도구가 있을 수 있겠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좋다. 게다가 오스틴 왕국은 우리 요정족들에게 진 빚이 있기도 하지. 마도구 제작에 필요한 재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말이야.”
아이칸이 히죽 웃으며 금검을 곁눈질했다.
‘어떠냐, 점수를 따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다, 요 수염만 잔뜩 난 아저씨야.’
금검은 잔뜩 입을 삐죽거렸다.
‘그깟 마도구가 뭐가 그리 잘났다고, 요괴 할망구! 하!’
어느새 셋은 오스틴 왕국의 정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유진의 예상대로, 그의 아는 친구가 셋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유진 공자님.”
“어어……?”
금검이 앞에서 인사를 하는 사내의 얼굴을 보고 입이 벌어졌다.
사내의 이름은 바로 페드로.
“자네! 오스틴 소속이었어?”
“하하! 금검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이야아! 반갑…… 아, 공자에게 먼저 인사드리게! 몰라보게 많이 달라졌지? 크하하! 이 몸이 업어 키우느라 아주…… 악!”
유진은 금검의 허벅지를 꼬집어 말문을 틀어막고 페드로와 인사를 나눴다.
본래라면 시종이 나와 유진을 인도해야 하지만, 유진이 펜첼의 주작 단원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직접 페드로가 나온 것이었다.
“공자 덕분에 많은 깨달음을 얻어 오스틴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있습니다. 감사 인사를 진즉에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페드로가 훌쩍 커버린 유진과 시선을 나란히 맞추며 작게 웃었다.
“멋지십니다, 페드로 경.”
유진도 조금 감격스러운 마음이었다.
그간 돈과 마음을 쓰며 뿌린 씨앗들이 이제 서서히 되돌아오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페드로뿐만 아니라 어릴 적 스승들이 대륙 각지에서 이름 높은 무인들이 되었기에 앞으로도 활용할 일이 많을 것이다.
아이칸과도 페드로는 유진 일행을 데리고 왕성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페드로. 네가 굳이 직접 저들을 데리고 왔다고?”
“그렇습니다만.”
“명령이나 기다릴 것이지…… 갑자기 독단행동이 웬 말이냐?”
커다란 키와 압도적인 체구.
오스틴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