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혈마법.
오러가 아닌 마력을 원동력으로 부리는 기술이긴 하지만.
혈액이라는 매개체를 추가로 이용해 상대방의 핏속에 녹아있는 기운을 흡수하거나, 단순한 마력보다도 더 강력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엘도라의 역전검은 제이드와의 싸움에서 파훼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상대가 가진 힘의 크기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었어.’
그럼에도 역전검은 가치가 충분한 기술이었다.
-신살비의 파괴력을 감소시킨 후에 역전검을 사용한다면 가능성이 있다! 저 뱀의 말이 도움이 될 수 있어!
마력이 섞인 혈액으로 잔뜩 휘감긴 신살비에 추가로 가진 마력을 다 짜내어 불어넣는다.
“……!”
왕비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 것이 시야에 잡힌다.
그만큼 혈마법이 신살비의 파괴력을 감소시킨 폭이 컸다는 말이었다.
눈에 띄게 느려진 신살비의 속도.
이어 유진이 검을 신살비를 향해 길게 뻗었다 뒤로 확 잡아당기며 각도를 뒤틀었다.
분명 역전검은 엘도라만의 비기였기에 유진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마치 평소에 수백, 수천 번은 연습한 것처럼 동작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정말로 수호 신수, 나막스탈스가 유진의 무의식 속 능력을 일깨워준 것 같았다.
채앵!
신살비가 쿠란의 검에 닿는다.
원래라면 쿠란의 검은 신살비에 죄다 깨어지고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유진이 비튼 검에 의해 신살비는 각도가 휘어지더니, 거짓말처럼 방향을 180도 바꿨다.
아예 반대로 왕비에게 쏘아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
“어떻게 신살비를……! 크윽!”
왕비가 당황하여 당장 몸을 던져 신살비를 피하려 시도했다.
반사한 공격을 왕비가 이대로 회피한다면 또 싸움이 길어질 터.
하지만 여기서 유진은 한 번의 혈마법을 더 사용했다.
피잉!
유진이 왕비의 심장이 위치한 왼쪽 흉부로 혈마법을 쏘아 피를 묻혔다.
직접적인 물리적 타격을 가할 필요도 없었다. 저것은 바로 헤르켈에게 사용했던 추적마법이었다.
무엇이 왕비의 심장을 추적하는가?
그야 당연히 신살비였다.
타앗!
왕비가 엄청난 속도로 몸을 던진다.
“마검사였다고, 하하!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 으읏?”
비웃음을 흘리던 왕비의 표정이 바싹 굳었다.
분명 신살비가 향하는 방향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신살비는 방향을 틀어 왕비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당황한 왕비가 다시 몸을 던졌으나, 소용없었다.
신살비는 죽을 때까지 왕비를 따라갈 기세였다.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것 같으냐……!”
왕비는 죽을 힘으로 위치를 옮겨가며 신살비에 오러 공격을 쏟아부었다.
오러포는 물론, 등 뒤에 오러 단검을 다시 소환해 공격하여 신살비의 궤도를 틀기 위해 거듭 시도했으나.
깡! 까강! 까가강!
신살비는 굳센 심지를 품은 노장처럼 모든 공격들을 죄다 튕겨내고, 파훼해버렸다.
그 어떤 강력한 공격도 신살비를 막아내기란 불가능했고, 결국.
“아, 안 돼……!”
콰즉!
그대로 왕비의 심장에 박혀버렸다.
그와 동시에 신살비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오러가 빛을 발하며 폭발하더니.
꽈아앙!
왕비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자신의 꾀에 자신이 당한 격.
태양신교에서의 불법 인체 개조에 더해 수많은 영약을 섭취하여 강화된 인체였음에도.
신살비는 그런 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제 주인인 왕비를 없애버린 것이다.
후우.
유진이 깊은 심호흡을 쉬었다.
-하, 하하! 살았구나! 살았어!
체첸이 헛웃음을 흘렸다.
도합하여 10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유진과 체첸에게는 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느리게 흘러갔었다.
그리고 결국 목숨을 부지했고, 전생에 이어 현생 15년간의 원수를 갚았다.
문신화가 해제되고, 유진은 오러와 마력을 있는 대로 소모한 덕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시선을 돌려 조각난 왕비의 시체들을 살펴보았으나.
그것들은 어느새 지독한 냄새를 뿜어내며 부식되고 있었다.
시체에서 어떠한 정보를 캐내는 걸 방지하기 위한 태양신교의 수작임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신살비. 이거 하나는 건질 수 있겠네.”
왕비의 심장에 박혀있다가 바닥에 떨어진 신살비였다.
유진이 지친 몸을 이끌고 걸어가 신살비를 매만졌다.
대륙에 있는 그 어떤 원석에서도 느낄 수 없는 기묘한 기운이 신살비에서 풍겨 나온다.
‘이건 나중에 유용하게 쓸 수 있겠어. 아이칸에게 연구를 맡겨도 될 것 같고, 아니면 내가 직접 이용해도 되고.’
화룡검을 열어 아공간 주머니 안에 신살비를 조심스럽게 넣어 둔 뒤, 미리 준비해 둔 지혈제와 회복 포션을 꺼냈다.
“크으윽……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지금 내 걱정할 때가 아니야, 페드로. 입 벌려봐.”
유진이 한쪽 어깨가 완전히 날아간 페드로에게 급히 달려가 지혈제와 포션을 먹였다.
덕분에 피를 철철 흘리던 페드로가 약간이나마 회복되었으나, 부상이 워낙 심각했기에 최대한 빨리 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국왕님, 페드로를 부축해주세요. 빨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진 경. 정말로…….”
“인사는 밖에 나가서 왕자를 만나면 듣죠. 페드로부터 살려야 해요.”
“예……!”
왕비를 잃었음에도 침착한 모습을 잃지 않은 왕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유진 경이 마검사였다니, 대륙에서도 마검사는 단 한 명도 없다고 알려지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웬 흑갑을 둘러싼 괴물로 변신까지……!’
지금껏 오스틴 국왕도 수많은 기사와 용병들을 보았지만.
‘유진 경처럼 뛰어난 기사는 본 적이 없다. 과연 검룡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구나!’
그리고 마지막.
한쪽 편에서 유진을 지켜보고 있던 나막스탈스가 서서히 사라지며 유진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과연 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구나. 상황이 정리되면 나를 찾아오라.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 * *
왕성 앞.
감스탄은 미심쩍은 자들을 모두 기절시켜버리고 포박한 뒤에 왕성의 입구에 도달했다.
그사이에 금검과 기사단장, 그리고 기절한 왕자가 주작 기사단에 합류했다.
“아아…… 왕성이!”
기사단장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괴로워했다.
화재는 아이칸 덕분에 모두 진압되었으나, 건물들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잔해만 남아 흉측한 모습이 된 뒤였다.
“아이칸님! 괜찮으십니까!”
“후우, 후우, 힘들어 죽겠어! 어디에 있다가 지금 와 가지고, 후우!”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유진이 와이번을 타고 온 수도를 수색해서 1왕자를 찾아냈다. 그래서 저기에 1왕자가 있는 거고 말이야. 유진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느냐? 으휴!”
“그,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 유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거야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든 문제를 해결하고 오리란 건 확실하지.”
유진이 얼마나 잘했는지 자랑하는 데에 바쁜 아이칸을 보며 금검이 코웃음을 쳤다.
‘흥, 할망구가 유진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아는 보는 모양이군. 제대로 홀렸어. 과연 유진은 나의 제자야.’
감스탄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어서 유진을 찾아내야 한다! 혼자서 싸우고 있는 걸 수도 있어! 모두 흩어져서……!”
그때였다.
덜컥!
분수대 쪽에서 문이 젖혀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유진과 오스틴 국왕, 그리고 페드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은 진짜 1왕자를 발견하고는 바깥공기를 맡을 새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뛰어갔다.
“아들아! 내 아들……! 크흑!”
국왕은 한 달여 만에 본 제 아들의 모습에 통곡을 쏟아냈다.
지금까지 항상 침착하고 이성적인 모습만 보아왔기에 금검과 아이칸, 그리고 유진마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현군이고 큰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제 자식 앞에서는 한없이 투명해지는구나.’
그를 뒤로하고, 유진이 지친 얼굴로 감스탄과 상봉했다.
“유진! 어, 어떻게 된 일이냐? 다친 데는 없는 게야?”
“저는 괜찮은데, 보다시피 저 오스틴 기사단의 부단장이 크게 다쳤으니 어서 신관을 좀 불러주세요. 지혈제는 먹여놨습니다. 일은 다 끝났어요.”
그 말을 남기고 유진도 깊은 호흡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감스탄은 아이칸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지? 녀석은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일은 모두 마무리할 거라고.”
“하, 정말.”
감스탄은 유진을 보며 감탄을 삼켰다.
‘녀석이 주작 기사단을 맨 위로 올려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오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릴리안님보다도 더 출중한 녀석이다.’
어쩌면.
‘정말로 단장 자리가 채워질지도 모르겠어.’
오스틴 왕국의 재건과 왕비 자리를 다시 채워 넣는 일에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고맙습니다, 유진 경……. 그대가 있었기에 이 정도에서 일이 끝난 겁니다. 고맙습니다…….”
국왕은 유진에게 그저 감사를 표하며 허리를 숙였다.
이로써, 오스틴 왕국의 1왕자 납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감스탄 부단장님,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디를 말이냐?”
유진의 눈동자에서 짙은 안광이 빛났다.
“진짜 마무리를 해야죠.”
* * *
“허억, 허억…….”
수도를 벗어나 도망치고 있던 헤르켈은 쉼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붉은 전갈의 수장과 연결되어 늘 빛나고 있던 팔찌 아티팩트의 빛이 사그라들었고, 헤르켈은 그 즉시 왕국에서의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그의 바로 뒤에는 헤르켈을 따르던 부하 한 명도 함께 뛰고 있었다.
“선배님……! 저희, 잘하고 있는 거 맞겠죠? 아니면 일단 남은 단원들을 모아서 다시 조직을 구성해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닥쳐라! 병신같은……! 태양신교에서 그 많은 지원을 받던 수장님이 뒈졌는데 우리가 놈을 어떻게 상대해?! 힘을 합친다고 뭐가 달라질 성싶으냐?”
“그래도……!”
“정 그러면 너라도 돌아가! 나는 내 목숨이 백배는 더 중요하니까!”
“크윽…… 아, 아닙니다.”
헤르켈과 부하가 어두운 골목에 들어서서 계속 달린다.
“내 이럴 줄 알고 섬 외곽에 배를 한 척 대놨지! 너는 내 아래에 있는 걸 천운으로 여겨! 알겠어?”
헤르켈은 비죽 웃다가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미친놈은 15년간 어떻게 그 정도 수준이 된 건지……! 너는 못 봤지? 어? 내가 약한 게 아니라, 놈이 미친 거였다니까? 진짜라고.”
헤르켈은 말을 하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대답이 없어?”
그런데.
“어……?”
분명 방금까지 바로 뒤를 따라오던 부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 헤르켈의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어디, 장난치는 거냐……? 빨리 나오라고……! 시간 없-”
의미 없는 메아리가 어두운 골목을 울리던 와중.
“헤르켈.”
그의 바로 뒤에서 붉은 전갈 수장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허억! 수, 수장님! 어, 어떻게……!”
“어떻게라니? 내가 그 녀석 하나 못 처리할 것 같았더냐? 도망가는 것이냐?”
소스라치게 놀란 헤르켈이 펄쩍 뛰다가, 금세 머리를 굴려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아닙니다! 다, 다만 저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주위에 흩어진 단원들을 모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네놈의 아가리에서 그렇게 구린내가 풀풀 풍기는 거야. 거짓말을 할 때만 나는 그 역한 냄새.”
“거짓말이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실력도, 긍지도, 양심도 없는 쓰레기 같은 놈. 돈만 주면 다 하는 벌레 같은 놈들.”
“……예?”
헤르켈은 이쯤 되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허리춤에 끼워진 단검에 손을 올렸다.
“그 목의 상처, 상처로만 남기에는 내가 분해서 안 될 것 같아.”
“너……!”
유진은 수장의 모습을 풀어내며 헤르켈에게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헤르켈이 오러를 가득 실어 단검을 휘둘렀으나.
쉬이익!
유진은 유령곡예보를 사용, 단검을 피해낸 뒤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쩌저적!
검과 닿은 단검은 그대로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7성급 무인의 오러가 실릴 대로 실린 무기가 박살 나려면 웬만한 필살기와 맞닿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방금처럼 가벼운 휘두름에 단검이 저 지경이 됐다는 건.
“어, 어떻게……!”
“네놈 조직의 수장 덕분에 깨달은 기술이 한둘이 아니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나.”
중검(重劍).
무거운 검이란 뜻으로, 검술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들만이 펼칠 수 있는 검이었다.
유진은 이제 가벼운 공격으로도 힘을 다한 일격의 효과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이 사람, 저 사람 죽여가면서 떵떵거리며 잘도 살았겠지.”
“아…….”
“값을 치를 때가 됐다. 물론.”
유진의 입꼬리가 크게 말려 올라갔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