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무슨, 독이 네 몸에 닿으면서 오러로 치환되고 있다. 마법인가……? 네 녀석,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만의 노하우야.’
-도대체…….
긴 계단을 내려가 도착한 방 안에는 제단이 하나 놓여있고, 황금빛의 빛무리가 제단 가운데에서 빛나고 있었다.
빛무리를 내뿜는 물건은 바로 웬 모래시계였다.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워 보이는 장식에 유리 안에 있는 모래알들은 범상치 않음을 자랑하듯이 고운 황금빛을 뿜어냈다.
‘전생에도 나 덕분에 찾았던 물건이니 이건 내가 가져가야겠어.’
유진은 묵광을 만들기 위해 태양신교의 모든 정보를 수집했었다.
그것의 연장선으로 무학뿐만 아니라 태양신교의 역사나 문화까지 탐구하곤 했는데, 그 와중에 이 공간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공간은 대체 어떻게 발견한 거지? 아니,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네놈은 15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비범한 거라고 해 두자.’
-태양신교의 본관이 어디 있는 줄도 잘 몰라야 정상이다. 이런 비밀 공간까지도 알고 있다니. 네놈, 혹시 전생자라거나, 그런 거 아니냐? 저 물건을 발견하고도 놀라는 기색도 없고 말이야.
과연 100년을 넘게 산 정령계의 존재라는 것일까.
유진은 뜨끔했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돌렸다.
‘한 수도자의 일기에서 봤어. 이런 공간이 있다고. 그리고 이런 아티팩트가 있다는 것까지.’
그라시안의 모래시계.
그라시안이라는 단련에 미쳐 살아가던 수도사가 만든 물건이었다.
효과는 다소 특이했다.
‘모래시계에 오러를 넣으면 일정 반경을 수련 장소로 인식하며 수련 장소 안의 오러를 모두 흡수한다.’
‘그리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떨어지면 반대로 훈련장소 안에 오러를 방출하여 회복을 돕는다. 애들을 훈련시키는 데에 딱 좋겠어.’
이 모래시계 외에 단련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더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것들은 대륙 곳곳에 퍼져 있다고 했다.
‘단기간에 강해지는 데에는 특화되어 있어서 앞으로 있을 기사단 서열식을 준비할 때 주작 기사단과 라울러나 엘도라, 인스 형제한테 아주 유용하게 쓰일 거야.’
유진의 표정을 보던 체첸이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유진을 보았다.
-그 표정, 사자의 시험에서 나를 몇 번이고 죽일 때 짓던 표정인데. 그 모래시계를 이용해서 얼마나 잔혹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지…….
체첸이 중얼거리는 사이.
유진은 모래시계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뒤돌아서려던 참이었다.
우우웅!
화룡검이 전보다 두 배는 더 크게 진동했다. 마치 여기서 벗어나지 말라는 듯.
-저놈의 화룡이 어디가 아픈가? 왜 저러는 거야?
유진은 이상함을 느끼고 방 안을 다시 살펴보았다.
화룡검이 이 공간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에 진동한다면, 그 어떤 것도 분명 진동할 터.
유진이 오감을 최대한으로 확장하는 데에 이어 기감까지 열었다.
그리고 제단 아래, 조그만 공간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탁.
그 조그만 틈에 손가락을 끼워 힘껏 열어보니.
-어어?
웬 거무튀튀한 색을 띠는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다.
화룡검의 진동이 더욱 거세지는 걸 보면 이 알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뭐지? 무슨 알이냐? 와이번의 알인가? 그것치곤 묘하게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데.
유진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알을 유심히 관찰하다 입을 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뭔데 그러냐? 와이번의 알은 아니구나?
‘이거, 용의 알이야.’
-용……? 용은 전설로만 전해지던 것 아니냐?
유진은 체첸의 말을 들을 새가 없었다. 그 역시도 두근거리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알의 형태, 크기, 화룡검이 진동하는 점까지. 모든 증거가 이건 용의 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사이 팔찌가 더욱 시끄럽게 울렸다.
유진이 팔찌가 끼워진 왼손을 용의 알에 올리자, 화룡검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열기의 방향은, 다름 아닌 알 쪽이었다.
마치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던 알에 유진의 손을 흘러나온 새빨간 열기가 기묘한 문양을 그리며 흡수된다.
그 덕분인지 영 빛깔이 좋지 않던 알은 팔찌의 열기를 받자마자 색깔이 약간 맑아졌다.
유진의 심장이 약간 요동치는 걸 느꼈다.
-내 이름은…….
머릿속으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화룡검과 대화하던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러던 참, 체첸이 유진을 다급히 불렀다.
-유진! 시간이 없다. 이곳의 시간이 좀 더 빨리 가는 건지는 몰라도, 벌써 1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어.
유진은 벅찬 가슴을 가라앉히고 아공간 주머니에 알을 집어넣었다.
그 찰나에, 유진은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카둔, 화룡 카둔이다.’
* * *
유진이 낡은 기도원을 나와 다시 고드릭이 있는 연무장에 도착했다.
‘목걸이가 거의 다 깨져가는군.’
그 점이 살짝 걸리긴 했지만, 해명할 말은 있으니 상관없었다.
연무장의 창고를 여니 마침 고드릭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정신을 차리던 와중이었다.
“피해…… 찔러…… 하하 네놈 정도는 내 선에서…….”
유진이 숨죽이고 다가가 고드릭의 목걸이를 다시 채운 순간이었다.
“허억! 유, 유진 기사! 지금 뭐하는 겁니까?”
고드릭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유진을 놀란 눈으로 보았다.
“잠깐 기절하셨습니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아, 아니……! 분명 내가 이기고 있었는데?”
“꿈속에서 이기는 건 막지 않겠습니다. 다만, 신검합일을 꺼낼 수밖에 없었어요.”
“하, 하하! 이런 망신이. 제가 졌군요. 후우…….”
그제서야 기억이 맞춰졌는지, 고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클클, 조금만 늦었어도 일이 귀찮아질 뻔했군.
유진은 자연스럽게 고드릭의 목걸이로 시선을 돌리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목걸이가…….”
“아, 목걸이, 목걸이……? 괜찮습니다.”
고드릭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목걸이를 전에는 나름 아끼고 있었는데, 지금은 딱히 아끼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걸이보다, 제가 유진 기사님의 신검합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게 더 아쉽군요.”
유진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야간기도회에 참여하지 않고 나와 싸운 것 아닙니까?”
“맞아요, 역시 참된 신자답게 다 알고 계시군요.”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신검합일을…….”
유진이 딱 잘라 말했다.
“승부는 다음에 다시 가리죠. 좋은 결투였습니다.”
유진이 예를 표하고 창고 밖으로 나섰다.
고드릭은 맑지만 광기 어린 눈으로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의 투지를 저 꼬마 아이가 받아내다 못해 이겨내 버렸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교황님이 아주 기뻐하시겠어.’
“유진 기사!”
“……?”
고드릭이 사람의 표정으로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얼굴을 하고서 유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음에 반드시 다시 싸워주십시오. 제 한 몸이 갈가리 찢겨도 좋습니다! 친해지고 싶어요.”
묘하게 살벌하지만 정작 고드릭은 그 점을 모르는 이상한 문장이었다.
유진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 뭐.”
“감사합니다!”
고드릭이 유진과 포옹을 하려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유진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미친 싸이코같은…… 싸이코가 한 명 더 있었군.
‘닥쳐, 좀. 나도 방금은 좀 무서웠다고.’
고드릭은 서운한 표정을 짓다가 히죽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왠지 모르게 목걸이를 소중하게 만지며 걸었다.
목적지는 교황이 있는 알현실이었다.
* * *
“유진 로베르가 가장 강했습니다, 교황이시여.”
교황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아라.”
“녀석은 명문육가의 초신성들을 모두 쓰러트린 것도 모자라, 저와의 대련에서도 승리하였습니다. 신검합일을 이미 깨달은 상태였습니다.”
“네가 졌다는 말이냐? 설마 백익까지 꺼냈느냐.”
“그렇습니다.”
“…….”
교황은 잠시 고드릭을 응시하다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
“고드릭, 네가 대련에서 질 정도라면 그 녀석은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말이지? 8성을 상회하는 건가?”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교황은 고드릭이 패배했다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다만, 유진이 펼쳤을 신검합일을 보지 못했다는 게 더 아쉬운 기색이었다.
“기대되는군. 내일 연회가 아주 기대돼.”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연회 때 내가 명하면 유진 로베르를 따로 불러오라.”
“알겠습니다!”
고드릭은 절도있게 고개를 숙인 뒤에 나가려다가, 멈칫하더니 뒤를 다시 돌았다.
“교황이시여, 미천한 질문이오나 한 가지 궁금한 사항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혹시, 저를 키워주시고 이 목걸이를 주셨던 기도원의 원장님은 잘 계시는지요?”
그 질문에 교황의 눈썹이 잠시 꿈틀했다.
“베드로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교황은 이내 은은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지금 교지에서도 가장 안전하다는 서부에서 포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교황이시여.”
고드릭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문을 열고 나갔다.
교황은 닫힌 문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베드로…… 서부 어딘가에서 뼈만 남아 개 먹이가 된 지 오래겠지.”
교황은 가볍게 혀를 찼다.
“고드릭의 세뇌가 약해진 건가. 조만간 징벌방에 한번 보내야겠어.”
그는 고드릭의 세뇌가 약해진 데에는 유진의 역할이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 * *
유진은 현무 기사단의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삼촌, 저 왔습니다.”
클라크가 유진을 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무슨 대화를 얼마나 깊게 했길래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이냐.”
“그런 게 아니라.”
“어허! 대답을 원하고 질문한 게 아니다. 내가 그 정도 센스도 없을까 봐?”
레나 스피어를 보내고 바로 고드릭과 싸운 뒤, 그라시안의 모래시계까지 가져왔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 상황이었다.
그 때문인지 클라크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 모양이었다.
“몸의 성장이 빠른 만큼, 마음의 성장도 빠른 건 알겠다만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게 있다.”
“뭘요.”
“사랑이란 감정은 그 어떤 오러나 마력으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기운이니, 잘 조절하고 활용해야 한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연애 조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찾아오거라. 그나저나, 내 딸은 언제 시집을 보내야 하나? 흐음…….”
체첸이 킬킬 웃었다.
-현무기사단주가 저렇게 수다스러운 성격인 줄은 처음 알았다. 크하하!
‘나도.’
* * *
다음 날.
웬만한 대광장만큼 큰 건물 안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태양신교의 고위급 사제들은 물론, 중위, 하위급 사제들.
그 아래 급에 있는 수백의 부제들.
추가로 태양신교의 안보를 맡는 수많은 호위 기사들은 물론.
태양신교가 교지를 통치하는 데에 주축이 되는 태양신교의 101인 정예 기사단, 백염(白炎)까지도 이 자리에 모조리 모인 상태였다.
추가로 명문 육가에서 초신성들과 함께 동행한 각 가문들의 식솔들까지 모인 상태였으니, 그야말로 인산인해가 따로 없었다.
그 사람들 중간중간에는 화려한 금빛으로 빛나는 장식과 더불어 먹음직한 음식들이 곳곳에 놓여있고.
백여 명에 달하는 ‘태양의 합창단’이 2층 입식 좌석에서 태양신교를 상징하는 고유의 교향곡을 부르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태양신교란 이 정도 규모는 돼야 연회라 한다.’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닐까 싶은 수준이었다.
그만큼 이번 명문 육가가 모인 ‘초신성의 파티’가 가지는 의미를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초신성이라는 단 여섯 명을 위해 태양신교에서 이토록 호화스러운 연회를 준비했다는 것.
그만큼 초신성들은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말이겠지.
유진이 클라크를 옆에 두고 연회장 내부의 수많은 사람들을 천천히 훑었다.
‘정말 죄다 모였군. 심지어는 백염까지 왔어. 초신성의 파티가 커다란 규모라는 건 원래 알았지만, 태양신교의 위치가…… 높긴 높아.’
전생에서는 2인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기에 체감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반대로 올려다보니 새삼 느껴지는 점이었다.
그때, 계단 위, 2층 자리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주목하시길 바라오.”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신자들과 더불어 초신성들, 그리고 유진마저도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등장에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지며 가히 압도적인 기운이 내려앉았다.
달리 그가 사나운 기세를 꺼낸 것은 아닌 게 분명했지만, 모든 이들이 절로 고개를 숙이며 침음을 흘렸다.
하나, 단 한 사람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유진.
그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빛났다.
‘드디어 만났구나, 테오스.’
태양신교의 교황, ‘마케드로 테오스’였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