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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112화 (112/151)

112화

지잉!

반달 모양의 푸른빛이 검의 궤적을 따라 라울러의 가슴팍에 치달았다.

월광참은 애초에 방패를 들고 대비하지 않는 이상 방어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깝고, 회피하는 건 더더욱 어려웠다.

달빛 아래에서 바삐 움직인다 하여도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막을 수 없듯 말이다.

하지만 라울러의 대처는 다소 특이했다.

방어를 우선시하는 것도, 회피를 시도하는 것도 아닌-

발을 내디뎌 오히려 월광참의 궤적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자칫하면 월광참에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위험한 움직임이었으나.

라울러는 오히려 히죽 웃고 있었다.

크직!

라울러의 가슴팍에 검흔이 새겨지며 핏물이 튀었다.

“멍청한 놈, 월광참을 뭘로 보고 그따위 보법을 밟…… 읏?!”

에솔이 가슴에 상처를 입은 라울러를 비웃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창이 에솔의 몸통에 이미 거의 다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잇……!”

에솔이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어 찔러오는 창을 회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어떻게 월광검을 정통으로 맞고도 저렇게 멀쩡할 수 있는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곧 알게 되었다.

푸욱!

에솔의 오러홀이 있는 단전에 라울러의 창이 그대로 꽂혔다.

“커억……!”

에솔이 헛숨을 들이키는 동시에, 라울러가 스산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이깟 상처가 두려워서 가족을 못 지킬까?”

“너……!”

“너 같은 양아치는 공감 못 하겠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거 말이야.”

라울러는 유진에게서 받은 특훈 덕분에 신체가 강화됨과 더불어, 그 누구보다도 단단해진 정신력으로 월광검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부상은 꽤나 심각했으나, 베인 곳을 치료하고 또 베이며 단련된 정신에 흠을 내기에 에솔의 공격은 턱없이 모자랐다.

더불어.

“방금, 그건, 도대체……!”

에솔이 경악한 눈동자로 라울러를 쳐다봤다.

라울러는 에솔이 월광참을 시전하는 찰나에 홀로 부단히 수련한 삼염참을 꺼내 들었고, 그것은 에솔에게 그대로 통했다.

유진도 그 광경을 보고 감탄을 삼켰다.

‘그 사이에 저 정도로 숙련된 삼염참을 꺼내다니, 확실히 재능이 있는 녀석이야.’

싸움은 분노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에솔은 냉정해야 했으나, 분노로 얼룩진 무리한 공격을 한 탓에 라울러에게 승기를 내어주었다.

“다시는 같은 기사로서 살지 못하게 해 주지.”

“감히, 너 같은 버러지가……! 내가 에솔 아힌이다! 내가 초신성……!”

라울러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에솔의 오러홀을 완전히 망가뜨리기 위해 창을 더 밀어 넣으려던 차.

덥썩!

바람처럼 나타난 라트비가 라울러의 창을 붙잡았다.

“더 이상의 추가 공격은 지켜보기 어렵군. 패배를 인정할 테니, 이쯤 하도록 하지.”

라트비는 그 말과 함께 악을 쓰던 에솔의 뒷목을 힘껏 쳐버렸다.

결국 에솔은 기절했고, 라울러는 못마땅한 얼굴로 창을 거두었다.

스스스…….

건물의 잔해들이 떨어지며 일은 먼지가 짙게 휘날리는 땅 위, 싸움이 끝난 뒤의 죽은 듯한 정적만이 에이츠 영지를 감쌌다.

“나의 불찰이다. 이만 돌아가겠다.”

라트비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에솔을 한쪽 어깨에 들쳐멘 후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를 유진이 불러 세웠다.

“사과는 하고 가셔야죠, 라트비 경.”

“…….”

라트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에솔 아힌이 방금 그 행패를 부린 덕에 지금 이게 뭡니까? 눈이 있으면 보시죠.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어딜 가시겠다는 건지.”

“나의 불찰이라고 이미 인정했다만.”

“인정하는 건 당연한 거고, 사과를 하라고 했습니다. 장난치는 것처럼 보입니까?”

유진의 강한 발언에 라트비는 순간 노기가 일어 유진을 노려보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로렐리아는 침을 꿀꺽 삼켰고, 전투를 벌였던 당사자인 라울러도 긴장감을 머금었다.

방금 라트비의 움직임을 보았을 때, 그는 척 봐도 상당한 수준의 기사였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진과 맞붙는다면 결과야 모르겠지만, 굳이 싸움을 더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하나, 유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아하니 계약서에 서명도 강요하던데, 같은 명문육가로 불리는 게 수치스러울 지경입니다. 제가 무례한 겁니까?”

오히려 유진이 역으로 묻자, 라트비도 제 가문이 저지른 행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덕분일까, 이내 라트비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과하겠다. 여기서 일어난 전투 때문에 생긴 모든 피해는 아힌 가문에서 전적으로 배상하겠다. 라울러 경에게도 사과와 더불어 부상의 치료를 위한 금전적 지원을 약속하마.”

“흠.”

“다시 한번 사과하겠다. 용서해다오.”

생각보다 더 신사적인 태도.

제 잘못도 아니고, 제 가문 사람이 저지른 일에 대한 사과였다.

게다가 라트비는 위치가 위치인 만큼 자존심이 크게 상할 법했으나, 그런 점을 감내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에 유진이 라울러에게 시선을 던졌다.

“형이 결정해. 사과하신다는데, 받아줄 거야? 아니면…….”

유진이 검 위에 손을 올렸다.

“더 확실한 사과를 원해?”

원한다면 라트비마저도 쓰러트려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이는 곧 일종의 도발이었으나, 라트비는 깊은숨을 내쉬며 진심으로 반성하는 얼굴을 보였다.

라울러도 더 이상의 싸움은 원하지 않았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약속한 바는 확실하게 지키십시오.”

“알겠다, 아힌의 그림자 무사로서 명예를 걸고 약속은 지키마.”

그제야 유진은 검에서 손을 뗴고, 라트비도 다시 제 갈 길로 돌아갔다.

라울러더 참아오던 신음을 삼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팍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부상의 정도가 가볍지는 않았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을 쓴 덕분에 에솔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월광참의 위력은 분명히 대단했던 것이다.

쯧.

유진은 라트비의 뒷모습을 언짢은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라울러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방금은 무리였어. 너무 위험했다고.”

정말로 방금 상황은 위험했다. 상대방이 비기를 꺼내는데 그 안으로 몸을 들이밀다니.

하지만 라울러는 히죽 웃으며 유진에게 몸을 기댔다.

“그동안 내가 누구한테 배웠는데, 이 정도는 싸워줘야지.”

“아무리 그래도, 아니다…… 잘했어.”

“크흐흐, 억…… 웃으니까 졸라 아프네.”

“로렐리아 가주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쪽으로……!”

로렐리아도 라울러를 부축하며 그를 타박하는 동안, 체첸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 아힌의 라트비를 상대로 꽤나 당차게 나왔군. 아니, 당찬 정도가 아니지. 네놈은 목숨을 여벌로 들고 다니는 게냐?

‘목숨은 하나로 충분해.’

-큭큭, 그건 그렇긴 했어. 네놈이라면 라트비도 상대할 수 있을지도. 그런데, 이상하구나.

‘뭐가?’

-애초에 라트비가 먼저 나섰다면 굳이 저렇게 고개를 숙여 가며 사과할 일도 없는데, 왜 싸움을 지켜보기만 한 거지?

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에솔이 시야를 좀 넓혔으면 하는 마음이었겠지. 라트비 같은 성격이라면, 에솔이 서부의 왕 노릇을 하다보니 편협한 시야로 살아온 걸 아니까 녀석이 뭐라도 깨닫길 바라지 않았을까.’

-흠, 똥구멍 녀석의 측근치고는 훌륭한 마인드로군.

‘아힌 가문만의 전통이지, 뭐. 싸우면서 깨닫는다…….’

물론.

유진은 에솔이 기절하기 직전 부라리던 눈동자에서 짙은 살기를 보았다.

‘에솔이 좋은 쪽으로 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 *

유진과 라울러, 로렐리아는 폭삭 주저앉은 건설 현장에서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가문에서 소양 교육을 받고 있던 라울러의 동생, 아일러도 찾아왔다.

라울러는 에이츠 가문에 상주하던 치료사들에게 급히 치료를 받아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가 되어서야 로렐리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너는 그냥 적당히 하고 마무리 짓지, 뭐 하러 그렇게 무리를 해서 이 지경이 되니?! 어휴, 진짜…….”

“누나가 그따위 대우를 받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참아. 나라도 나서야지.”

“대우를 받아도 내가 받고, 나서도 내가 나서! 너까지 이렇게 다치면 내 속이 남아나겠니?”

“헤헤.”

“으휴, 정말…….”

로렐리아는 겉으로는 라울러를 질책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표정에는 그를 기특해하는 기색이 잔뜩 담겨있었다.

늘 철없이 놀기만 좋아하던 남동생이 어느새 남자가 되어 돌아왔으니 뿌듯할 만도 했다.

한참 대화를 하던 그녀가 뒤쪽에 서 있던 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유진 경. 인사가 늦었습니다. 로렐리아 에이츠라고 해요. ”

“반갑습니다, 가주님. 유진 로베르입니다.”

“가주라는 호칭은 빼주셔도 좋습니다. 면목이 없네요.”

로렐리아는 어색하게 겸손을 떨었으나, 유진이 본 그녀는 소문대로 단단한 기개를 가진 자였다.

“이렇게 큰 도움을 주실 줄 몰랐습니다. 어떻게 사례를 해 드려야 할지 고민이 되네요.”

“도움이라기보다는 투자입니다. 에이츠 가에서 제가 투자한 만큼 보상을 돌려주시리라 믿는 것일 뿐이죠.”

“음! 그저 일방적인 도움이었다면 자존심이 상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의욕이 더 샘솟는군요.”

로렐리아의 웃는 얼굴에는 그녀의 말대로 일에 대한 열의가 엿보였다.

‘과연 가주로서 있는 자라서 그런가, 목소리에 단단함이 묻어있네. 여장부라는 별명이 무색하지가 않아.’

라울러는 참 든든한 누나를 가졌구나, 싶다.

“아,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뭐든 간에 준비해 오겠습니다.”

“아뇨, 뭐, 딱히. 그냥 단백질 많은 고기로 아무거나 부탁드립니다.”

라울러가 끼어들었다.

“누나, 나 먹고 싶은 거 있어, 그, 내가 좋아하는 거 있잖아. 양고기-”

“넌 조용히 하고 있어. 유진 경, 그러면 최대한 준비해서 내올게요.”

“아니 누나 나 양꼬치…….”

라울러의 여동생인 아일러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금방 내올게요. 언니, 내가 내올게.”

“그래. 재료 아끼지 말고 다 넣으라고 하렴.”

“응! 유진 오빠 먹을 거니까!”

라울러가 눈물을 삼켰다.

‘여기 우리 집 맞나?’

* * *

라트비가 아힌 가문의 가주전에 들어섰다.

에솔 아힌의 아버지이자 가주 아힌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라트비도 딱딱한 표정으로 그간의 사정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에솔이 에이츠 가문의 로렐리아 가주와 이야기를 나눴으나, 계약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에솔이 나섰느냐?”

“그렇습니다.”

“뭘 어떻게 나섰길래 저 지경이 돼서 돌아왔지?”

“……펜첼의 주작 기사단 단원과 전투를 벌였고, 패배하였습니다.”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느냐? 당연히 그 주작 단원 놈이 얼토당토않게 먼저 시비를 걸었겠지? 그렇지?”

이미 답을 정해놓고 묻는 질문.

라트비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에솔이 말도 안 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치렀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려다가 참은 것이다.

정말, 참고 넘어가려 했으나.

“라트비, 내가 너에게 준 임무는 단 하나다. 에솔이 제 뜻을 펼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보필하라는 것.”

“…….”

“그저 뒤를 봐주란 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더냐? 내가 수천의 마수를 썰어서 내 앞에 가져다 놓으라고 하였느냐? 아니면 에솔을 지금 당장 10성급 기사로 만들어놓으라고 하였느냐? 내 바람이 지나치더냐?”

배니커 아힌은 어느새 노기를 잔뜩 실어 라트비를 거세게 질책하기 시작했다.

분명 모든 잘못은 에솔에게 있었지만, 라트비가 죄다 떠안는 셈이었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가주님.”

“말해보아라. 입이 있으면 말 해보란 말이다.”

“모든 책임은 에솔이 져야 하는 게 맞습니다.”

“……뭐라?”

라트비는 억울한 마음과 더불어 배니커의 근시안적인 안목을 질책하고 싶은 마음까지 애써 숨기며 말을 이었다.

“상대편이었던 녀석이 에솔에게 얼토당토않은 시비를 건 것도 아닙니다. 에솔이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계약 조건을 걸고 서명을 강요했다는 말입니다.”

분명 옳은 말이었고, 사실을 전달한 것일 뿐이었으나.

“……내 아들의 잘못이 컸다, 이 말인 게냐?”

배니커의 얼굴에 진한 분노가 드리웠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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