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생각보다 더 화가 난 듯한 배니커의 모습에 라트비가 긴장감을 머금은 채로 천천히 대답을 이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에솔이 좀 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요지였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싸움은 정당한 대결이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본바, 원인은 모두 에솔에게 있다고 사료됩니다.”
“동생아.”
배니커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네 말대로 나의 아들놈의 행실은 중요하다. 그게 곧 나에 대한 평가이자 나의 명예니까.”
“……예.”
“그러나 더 중요한 게 뭔지 아느냐?”
배니커가 검지로 땅바닥을 가리켰다.
“이 더럽고 비열한 땅 위에서 굳이 그렇게 행실, 예의, 겸손을 따져가며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난 모르겠다.”
“…….”
“내가 그렇게 바보처럼 살아서 그럴까? 나는 내 아들 새끼가 잘 크고 있다고 판단한다. 독재와 패도, 그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배니커의 검지가 북쪽을 가리켰다.
“저 빌어먹을 펜첼 놈들에게 아들놈이 맞고 왔다는 소식을 내가, 두 번씩이나 듣고 와야 하는 게 믿기질 않는구나. 그것도! 아힌의 그림자 무사가 대동했는데도 말이야.”
라트비가 갑갑한 속내를 애써 숨기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미 화가 난 배니커에게 옳은 말, 바른말을 해 봐야 라트비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이는 경험에서 나온 예측이었다.
“……저의 불찰입니다.”
“심지어 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북부의 땅에서도 아닌, 우리 땅인 서부에서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당하고 왔단 말이지? 크하하! 하하하하!”
뚝.
돌연 광소를 터뜨리던 배니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놈도 내가 우스운 것이지?”
“가주님, 그게 아니라.”
“가주님이니, 뭐니 집어치우고, 형과 동생으로 이야기해 보자. 너도 날 떠난 내 마누라처럼 내가 우스워서 내 말이 개 잡소리로 들리는 것이지? 그렇지?”
“절대 그런 게 아닙-”
“아니라면 거기에 있던 놈들을 전부 찢어 죽였어야지!”
배니커 아힌은 라트비 앞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배니커는 제 부인이 떠난 이후로 크게 상심하였고, 그 보상작용인지 에솔을 집착 아닌 집착 수준으로 사랑하며 키운 것이었다.
자기 딴에는 그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감정은 부인에게서 버림받은 것에서 기인한 비뚤어진 결과란 것을 배니커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네놈이 정녕 나를 만만히 보지 않는다면, 그놈들을 사지를 찢어서 벌레들을 먹이로 주고, 뼈까지 씹어먹고 왔어야 했다! 내 말이 틀렸느냐!”
배니커가 분을 참다못해 터져 나온 오러가 살기를 띠며 라트비에게 쏘아졌다.
피이잉!
그에 라트비는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날카로운 오러 세례에 뺨에 긴 자상이 생기며 피를 흘렸다.
“크윽…….”
이어 배니커는 그러고도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지 검까지 쳐들었다.
에솔이 라울러를 상대로 보였던 월광참, 그다음 단계인 월광계를 뿜어냈다.
콰과과!
월광계는 환골탈태를 이루어낸 배니커가 월광참을 발전시켜 만든 기술로, 오러를 이용해 일정 공간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고등급의 기술이었다.
이 공격을 받은 사람은 불빛, 공기도 없는 어둠 속에서 무한히 쏟아지는 월광참을 막아야 했다.
월광계에 사로잡힌 라트비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죽을힘으로 온몸에 오러를 둘렀다.
‘제이드를 넘어서기 위해 만든다던 월광계를 드디어 완성했구나.’
배니커가 이내 월광계를 거두어들였지만, 라트비는 이미 넝마가 되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침 한 번으로 고통을 털어내고 오히려 바닥에 깊숙이 부복했다.
“쿨럭, 제 잘못입니다, 가주님.”
배니커의 종잡을 수 없는 성질에 맞춰주는 건 이제 웬만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형님, 언제까지 에솔을 이렇게 키울 생각이오…….’
배니커는 날이 갈수록 고약해져 갔으며, 자식 사랑에 눈이 멀어 에솔을 엇나가게 키우고 있었다.
겉모습은 오러 9성에 이르며 환골탈태를 했기에 동생인 라트비보다도 젊어 보일 정도였으나, 그와 달리 속이 완전히 비틀어져 버린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라트비의 속마음은 복잡했으나,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절대 없었다.
자격지심이 있는 배니커에게 그런 말을 꺼내놨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놈은 에솔을 보필할 자격이 없다.”
“……면목이 없습니다.”
“1년간 면벽수련에 들어가라. 이의 있느냐?”
라트비는 피가 흐르는 머리를 바닥에 더 깊숙이 박았다.
“따르겠습니다.”
“당장 나가라.”
라트비가 인사를 올리고 가주전을 나갔으나.
쾅! 콰앙……!
가주전 안에 남아있던 배니커가 화풀이를 하며 온갖 가구와 물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바깥까지도 울렸다.
“초신성의 파티에서도 그런 모욕을 주더니, 이젠 우리 땅에서까지 개짓거리를 벌여! 감히! 감히이!”
배니커의 오러가 칼바람처럼 휘몰아치며 가주전을 휩쓸고, 가주전 안의 바닥이 깨어지고 부서지며 난장판이 되었다.
후우, 후우.
한참 동안 성질을 부리던 배니커가 거친 호흡을 내쉬며 가주전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불렀다.
“여봐라! 누구 있느냐!”
“예……! 가주님.”
“서부 상단에 서명한 모든 가문에 연락을 돌려라.”
“뭐라고…… 말을 전할까요?”
배니커는 열이 올라 잔뜩 충혈된 눈동자를 부르르 떨었다.
‘태신석도 순조롭게 채굴 중이고 곧 있으면 펜첼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는데, 마침 잘됐군. 이참에 서부의 힘이 뭔지 보여줘야겠어.’
* * *
동부, 금월단 본부.
수십의 단원들이 본부 내부를 바삐 걸어 다니며 무언가를 제작하는 데에 열중이었다.
“유진 공자께서 지시한 아힌 가문의 비리 속보는 진행 상황이 어떤가?”
“순조롭습니다. 이 자식들, 아주 더럽게도 굴었던데요. 이곳저곳 아주 안 쑤신 데가 없어요.”
“좋아, 그럴수록 우리는 좋지.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아힌 가문의 비리를 폭로하는 소식지였다.
<서부, 아힌 가문의 충격적인 비리!>
제보에 따르면, 아힌 가문은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은 영지를 돈이나 권력을 이용해 쫓아내거나 강제로 서약을 맺게 했다고 한다.
작위가 사라진 영주들 또한 아힌 측에서 몰래 암살했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영지민들이 고통에 허우적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배니커가 서부 상단에 연락을 취하기도 전에 이미 소식지는 완성 단계에 다다라 있던 것이다.
추가로 에솔 아힌의 추행들도 낱낱이 밝히는 소식지도 제작 중이었다.
“아, 그리고 마지막에 한 문장만 더 넣어.”
“뭐라고 넣을까요?”
“추가적인 제보도 언제든지 받는다고. 그놈들이 감추고 있던 것, 눈덩이 불어나듯이 굴려보자고.”
“유진 공자께서 만족하시겠죠?”
금월단의 단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만족시켜 드려야지. 지금 우리가 누구 덕분에 밥 벌어 먹고사는데.”
아힌 가문의 위상은 유진이 준비한 대로 철저하게 빛이 바래고 있다.
* * *
에이츠 영지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하루가 다르게 영지에는 못 보던 건축물이 들어서는 중.
“어제저녁에는 없었는데 언제 저런 게 생겼지……?”
“외곽에 살던 한스네 집 앞에는 거대한 거래소가 생겼다던데?”
“그뿐인가? 못 보던 기사 나리들도 계속 오고 있다던데. 다 우리 편이었어.”
영지민들이 바뀌어 가는 에이츠 영지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맞아. 그분들이 곧 동료들도 이끌고 온다고 하더군.”
“하루가 다르게 뭔가가 들어서니 좀 어색하긴 하네.”
“어색하긴 무슨! 이게 다 로렐리아 영주님의 능력이지.”
그사이.
에이츠 영지의 유명한 소식통이라는 남자가 와서 모여있던 영지민들에게 소식을 전달했다.
“최신 소식이라네! 다들 모여봐.”
“그래, 이번엔 또 뭔가?”
“영주님도 영주님이지만 펜첼에 갔던 라울러 공자님이 좋은 친구분을 뒀다고 하더군. 얼마 전에 오셨던 그분 있지?”
“누굴 말하는 거야?”
“아, 그, 왜! 키 크고 잘 생기시고, 오른편에 검 한 자루 차고 다니시는 분 말일세. 유진 로베르 공자!”
한 청년이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어! 라울러 공자님과 같은 소속이라고 들었는데, 주작 기사단! 그래.”
“이명이 무려, ‘검룡’이라더군. 검룡!”
영지민들이 체감하는 만큼, 에이츠 영지는 유진과 라울러가 온 지 단 4일 만에 새롭게 변화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로렐리아의 집무실.
“유진 경의 도움, 아니, 투자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 건 꿈도 못 꿨을 겁니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로렐리아가 창밖을 한참이나 보다가 유진에게 거듭 인사했다.
유진은 히죽 웃었다.
“가주님께서 열심히 뛰어다니신 덕분에 발전 속도가 정말 빠르네요. 확실히 제가 투자하는 안목 하나는 있는 모양입니다.”
“투자로 브리튼 연합국의 1년 치 재정을 쏟아붓는 게 가능하다니…… 솔직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유진은 머쓱하게 웃었다.
로베르가의 통 큰 투자에 로렐리아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유진이 로렐리아에게 당부하듯 추가로 설명을 이었다.
“건물은 지금 전쟁터에서 유행하는 조립식 건축물을 가져왔기에 저렇게 빠르게 만들어지고 있는 겁니다. 나중에 반드시 보수 공사를 해주셔야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제 어릴 적 스승들이 에이츠로 들어왔습니다. 믿을만한 자들이니 기사단을 꾸리셔서 운용해도 좋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덕을 베풀며 살아오신 건지, 하하.”
로렐리아는 이제 유진을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서른이 가까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로렐리아도 자신이 허투루 살아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앞에 있는 이 청년은 차원이 달랐다.
유진은 작은 미소를 띠었다.
‘나와 라울러가 받은 휴가는 단 일주일. 이제 이틀 남았고, 내가 여기서 직접 판단해야 할 일은 끝났어.’
유진은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체첸이 의아하단 듯 물었다.
-대접도 잘 해주는데, 더 있다 가지 왜 벌써 가는 게냐?
‘할 일 다 했으면 가는 거지. 믿음직한 사업가가 열심히 뛰고 있는데 투자자가 감 놔라 배 놔라 해서 뭐해.’
-저 영주로 있는 자는 믿을 만해 보이는 게냐? 얼마나 많은 돈과 인력이 들어갔는데, 사람 속을 어떻게 알고. 들고 튀어버리면 네놈의 그 어마어마한 용돈도 다 개털이잖느냐.
‘이미 금월단이 서부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중이야. 그리고 스승님들 또한 여기에서 나의 눈과 귀가 되어 줄 거고. 무력도 걱정 없어.’
–어릴 때부터 인맥 관리를 한 거군. 애초에 저 스승들을 부를 생각이었어.
‘보험이지 보험.’
-치밀하기 짝이 없는 놈…….
100년을 넘게 살면서 수많은 수재와 능력자들을 보았지만, 체첸은 유진 덕분에 지겹도록 놀라고 있었다.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돈 앞에 장사 없다지만, 로렐리아가 돈 때문에 누굴 배신할 성정은 아니야. 목숨도 내놓고 영지민들을 지키려던 사람인데.’
전생에 라울러만 이름이 알려졌기에 로렐리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번에 에이츠에 대한 투자를 계획하면서 그녀가 상당한 수완가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이 정도로 영지를 꾸릴 수 있다는 건 인정해야지. 안정된 곳에서 시작했다면 분명 크게 이름을 날렸을 거야.’
그녀는 믿어도 된다는 확신이라는 게 들었다.
그때, 로렐리아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런데 지금 아힌 가문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식지가 돌고 있다던데…… 혹시, 보셨습니까?”
아힌 가문의 비리를 폭로하는 소식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직 전 대륙에 배포되지는 않았지만, 정세에 밝은 로렐리아의 귀에는 이미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힌 가문과는 같이 못 하겠다는 선언을 줄줄이 하고 있다던데, 제가 그 소식지를 구하고는 있는데 아직 전달이 안 되어서…….”
“아, 그렇습니까?”
“예. 일반 영지민들을 상대로 서서히 아래로 올라와서 아힌 가문도 이 소문의 근원을 찾지도 못하고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음.”
유진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 눈치 빠른 로렐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경께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일이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렐리아는 유진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걸 눈치챘다.
‘정말…… 돈과 무력, 그리고 지혜가 있는 사람과는 절대로 척을 지면 안 되겠어. 만약 유진 경이 내 적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기분이었다.
그 사이 유진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한 채 그녀에게 문서 한 장을 건넸다.
“읽어보세요.”
로렐리아의 눈에 문서의 제목이 들어왔다.
<신 서부 상단 계획안>
로렐리아가 어리둥절하다는 눈빛을 냈다.
“이건 아힌 가문이 하려고 했던 계획안 아닌가요? 이게 왜…….”
“제목은 똑같으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내용을 읽어내려가는 로렐리아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