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수년 전.
아힌 가문에 지원 요청이 하나 들어왔었다.
지원 요청을 한 가문은 머나먼 선조 때 아힌 가문의 피가 아주 조금 섞였다는 방계, 폴른 남작가.
폴른 남작령에서 한 광산을 발견했고 거기에 파견된 인부들이 어째서인지 모조리 광기에 미쳐 살육극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남작령에서는 병사들을 이끌고 진입했지만, 똑같은 결과가 벌어졌다.
이에 아힌에서는 정예병사들을 꾸려 출발했고, 역시나 같은 결과를 맞이했다.
“내가 직접 가보도록 하지.”
이에 호기심이 동한 배니커가 직접 나섰다.
배니커가 직접 오러를 운용하여 탐색한 결과, 아주 희귀한 암석지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태신석 지대였다.
배니커는 그 즉시 폴른 남작령을 사버리고, 팔지 않는 땅은 빼앗으며, 조금이라도 태신석 지대에 가까이 있는 가문은 모조리 쫓아냈다.
“태신석은 아힌만이 가진 힘이 될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
무려 수년에 걸친 커다란 작업이었다.
여기에서 끝났다면 배니커는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터.
태신석 지대를 대대적으로 개발하던 와중, 어두운 빛깔의 태신석들 중에서 한 붉은 빛깔의 주먹만 한 암석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분노의 권능’을 담은 원석이었다.
불길하고도 뜨거운 기운을 내뿜는 그 원석은 자신을 다룰 수 있다면 다뤄보라며 잔뜩 거친 기운을 내뿜었지만, 상대가 배니커 아힌이었으니.
대륙에서 몇 안 되는 9성 기사인 배니커는 이 붉은 원석을 소수의 유능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연구하고.
더불어 7성, 8성에 달하는 기사들을 실험체로 삼아 기운을 흘려보내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 결과 붉은 원석의 효능을 알아내게 된 것이다.
‘분노에 몸을 맡길수록 강해질 수 있다.’
감정을 연료 삼아 끝없이 불타오르는 강력함을 얻는 것이다.
수많은 역사서와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았을 때.
7대 권능 중 하나인 ‘분노’가 아닐까, 하는 강한 추측도 하게 되었다.
* * *
배니커가 잠시 오른쪽 흉부에 감각을 집중했다.
두근!
뜨거운 활화산 같은 기운이 배니커의 폐를 타고 날숨으로 흘러나왔다.
배니커는 무지막지한 오러로 붉은 광석을 녹였고 전부 먹어치웠다.
덕분에 배니커는 ‘분노’를 제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분노의 권능’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사용 시의 특징으로는 잠시 두 눈이 붉게 발광하다 사라진다는 것.
‘권능을 쓰면 쓸수록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지만 상관없다! 이 권능만 있다면 모두가 내 아래에 엎드릴 테니.’
이 힘을 이용한다면 북벽 제이드마저도 상대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마저도 들 정도였다.
수년에 걸쳐 힘들게 얻어낸 이 분노의 권능은 배니커에게 있어 보물과 같았고, 자신감의 근원이 되기도 하였다.
곧 있을 대장전에서 검룡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하는 배니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 * *
마지막 확인이 끝나고, 로스가 전령을 불러 에이츠 영지로 보냈다.
유진은 곧바로 에이츠 영지에서 나와 전장에 서 있던 로스와 마주했다.
“두 가문 모두 영지전의 방식은 대장전으로 진행하는 것에 동의하였으며 각 가문에서 싸울 전사는 배니커 아힌과 유진 로베르요.”
유진이 로스의 뒤쪽에 펼쳐진 전경을 보았다.
수백의 기사와 수천의 병력들.
그들은 이미 저들이 승리하기라도 한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에이츠의 영지민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지 두 손을 맞대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대신, 두 기사의 수준 차이를 고려했을 때 목숨을 건 전투는 공평하지 않다고 보여 특별한 조건을 걸었소.”
“뭐라고 하던가요?”
로스의 표정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젊은 청년은 곧 주검이 되어 치욕스러운 최후를 맞이할 터였으니까.
“배니커 아힌의 ‘월광계’를 한 차례라도 버텨낸다면 대장전은 유진 로베르의 승리로 인정하겠다는 조건이었소.”
8성에서 9성으로 넘어가는 일은 1,000명 중 1명도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환골탈태라는 각성의 과정을 거쳐야 했으니 말이다.
한 등급의 성급이 오를 때마다 전투력은 10배가 오른다는 게 대륙에서 알려진 정설이었다.
그러나 8성과 9성의 차이는 그 격이 전혀 달랐다. 10배가 아닌, 100배, 1000배의 차이가 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결정적인 이유.
9성 기사는 오러를 형상화해 만든 강기, 즉 오러 블레이드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무엇이 있든 베어버릴 수 있는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는 수적인 우세는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배니커의 제안은 배니커, 자신에게 너무도 유리한 측면이 짙었다.
그냥 공격도 아닌, 비기인 월광계를 버텨내야 했으니까.
“그리고 설령 이 승부에서 검룡, 유진 로베르가 죽더라도 배니커 아힌에게는 죄가 없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요.”
한마디로 배니커 아힌은 유진이 죽든지 말든지 최강의 공격을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앞선 모든 내용은 유진도 이미 알고 있는 점이었다.
‘쉽지 않겠지. 월광계의 위력은 대륙에서도 한 손에 꼽는 수준이니까.’
전생에서는 전사의 요람 수장인 불칸도 월광계에 고역을 면치 못했었다.
때문에 유진 역시도 긴장감을 머금어야 했다.
하지만.
‘분명히 녀석의 몸속에 깃든 권능, 혹은 기운을 뺏을 수 있을 거야. 탐욕을 이용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거다.’
물론 유진은 이미 오스틴 왕국 때 비슷한 상황을 겪어봤기에 이와 같은 예상을 할 수 있었다.
‘놈의 재능을 조금이라도 흡수한다면 어떻게든 발전시킬 수도 있을 거고.’
목숨이 달린 결투를 치르기 바로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니커의 능력을 가질 생각에 기대감이 가득 차올랐다.
-진짜 미친놈인가?
체첸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무시했다.
“이제 자리를 옮깁시다.”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움직였다.
저벅, 저벅.
전장의 중앙으로 다가갈수록 아힌 쪽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체인 플레이트 갑옷과 더불어 시퍼런 날붙이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전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개중에 있던 아힌이 돈으로 매수하여 끌어모은 몇몇 병사들은 유진을 보며 킬킬거렸다.
“저 자식이 펜첼의 초신성이지? 나이가 15살이라고?”
“그렇다는데? 어려서 그런가, 겁대가리를 아주 밥 말아 먹은 거지. 가주님과 대장전이라니.”
“크흐흐, 에이츠에는 봐줄 만한 여인네들도 많을 거야. 재미 좀 보자고.”
그들은 이미 에이츠를 완전히 흡수하고 영지민들을 유린할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배니커 아힌이 우뚝 자리 잡은 상태였다.
척.
유진과 배니커 아힌이 드디어 마주 섰다.
배니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로베르와 펜첼을 믿고 그렇게 까분 거냐? 꼬마야?”
유진도 히죽 웃었다.
“전 제 실력만 믿습니다. 뒷배경만 믿고 까부는 건 아힌 가문에 있지 않던가요?”
“도대체 누가 너처럼 까불었다는 말이지?”
“에솔 아힌이지 누구겠습니까. 내가 바보랑 이야기하는 건가?”
“……곧 머리가 떨어지고도 네 그 주둥이가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지금은 당신 뒤에 있는 저 떼거지들을 믿고 나한테 까부는 겁니까? 친구들을 많이도 데려오셨군요.”
말싸움에서 밀리자 배니커는 슬슬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들뻘의 녀석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그럴 수밖에.
하나 유진은 배니커가 열을 받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네놈의 그 얌체 같은 금월단 놈들이 뒤를 캐고 다닌 것도 다 알고 있다. 남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니 재밌더냐?”
“재밌긴 하더군요. 나이가 육십이 넘어서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다니는 당신의 꼴이 우습기도 하고요.”
“후우, 내가 반드시 네놈의 아가리를…….”
“그리고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영지전까지 선포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번번이 말싸움에서 밀리자 배니커가 이를 뿌득 갈았다.
“……아들을 잃게 된 로베르와 초신성을 잃게 될 펜첼에게 유감이군. 미리 명복을 빈다.”
“혹시 모르죠. 9성을 상대로 8성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온 대륙에 전할지. 배니커 아힌의 무능력함도 만천하에 밝히고요.”
“닥쳐라. 이제 시작하지. 금방 끝내주마.”
이를 지켜보고 있던 로스가 뒤로 물러섰다. 이는 동시에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배니커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이 싸움은 배니커의 공격이 더 강한가, 아니면 유진의 방어력이 더 강한가를 일 합으로 판단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말대로 금방 끝날 터였다.
휘유우웅-
전장에는 분명 수만의 병력이 주둔하였기에 숨소리만 내어도 소란스러울 터였는데, 지금은 고요한 풍랑만이 전장을 휘감고 있었다.
배니커가 언제 공격할지는 정해진 바가 없기에 모두 그의 움직임만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쿠웅!
배니커가 오러를 분출했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땅이 깨어지면서 일렁이던 바람이 배니커를 잔뜩 감쌌다.
무시무시한 대기압이 발생하며 그의 반경에 있던 아힌의 기사 수십이 무릎을 휘청였다.
“크읍……!”
안 그래도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있었는데, 배니커의 기세가 나오자 호흡을 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는 유진도 마찬가지로 절감하는 바였다.
그의 옷이 배니커의 오러에 닿자마자 조금씩 헤지고 찢어졌다.
기본적인 오러 방벽을 온몸에 두른 상태였음에도, 이를 뚫고 유진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히히히힝!
더불어 유진이 타고 있던 말이 불안한 듯 거칠게 다리를 털더니, 앞발을 위로 높이 쳐들며 투레질을 거듭했다.
그에 유진은 말을 도망치게 보낸 뒤 홀로 땅 위에 두 발을 붙이고 섰다.
‘기세가 강하긴 하다. 무시할 수준은 절대 아니야.’
아톰을 맹렬하게 회전한다.
묵광이 힘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오러가 급격히 공기 중에 흩뿌려지자 배니커의 오러를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묵광이라고 하더라도, 환골탈태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이상 유진이 9성급의 오러를 펼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방어는 가능했다.
츠츠츠!
“음?!”
제 오러의 위력을 펼쳐 유진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흘리던 배니커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녀석은 분명 8성이다. 오러를 뿜어내는 건 공격으로 치지 않기에 기선제압을 하려 했는데, 통하질 않는다고?’
물론 유진의 오러 수준은 배니커보다 명확하게 한참 낮았다. 애초에 8성과 9성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유진은 오러를 어떻게든 물려내며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전장 위에 서 있었으니.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유진은 배니커의 오러를 거의 막아내고 있었다.
“어, 어어……?”
“저 자식, 어떻게, 버티고 있긴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야?”
뒤쪽에서 병사들이 작은 목소리로 웅성대는 게 들린다.
빠득.
배니커가 이를 거칠게 갈며 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서부 명문, 아힌의 가주로서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나왔는데 이런 꼴을 보이다니.
그게 잠깐뿐일 저항일지는 몰라도, 배니커는 이 치욕스러운 광경을 계속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채앵!
결국 검을 뽑아낸 배니커가 자신을 거칠게 휘감던 오러의 폭풍을 제 검에 몰아넣었다.
검의 주위 공간이 일그러지며 ‘오러 블레이드’가 발현, 스산한 기운이 전장 전체에 물밀 듯이 퍼져나갔다.
방금까지는 배니커의 기세를 어떻게든 물려냈지만, 유진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저 검이 공중을 갈라 유진을 향하면, 아힌 가문의 최고 비기이자 그 악명높은 불칸조차도 큰 상처를 입혔던 기술, 월광계가 펼쳐진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항복하지 않은 걸 영원히 후회하길 바라마.”
배니커가 검을 몸 뒤로 힘껏 빼더니, 그대로 유진이 있는 방향으로 찔러넣었다.
쿠우우!
칠흑같이 어둡고, 심해처럼 깊은 거대한 구체의 공간, ‘심연’이 유진을 향해 쏘아졌다.
반응할 새도 없이 그는 심연 안에 육체를 가두게 되었고, 동시에 시각과 호흡을 포기해야 했다.
“흡!”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목을 틀어쥔 듯, 숨이 쉬어지지도 않았다.
유진은 이 심연 안에 있을 때의 상세한 감각이나 경험담을 듣기 매우 어려웠었다.
애초에 월광계에 갇힌 이들 중 100에 99는 주검이 되어 나왔으니까.
배니커가 라트비에게 쏘아냈던 월광계는 살해의 목적이 아니었기에 논외로 해야 했다.
‘이제 시작이군.’
유진은 이를 까득 깨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를 모두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에는 쿠란의 검을 쳐들고, 왼손에는 화룡검을 꺼내 든다.
이어 펜첼 최고의 검술인 크라우드식 이도류 특유의 방어 자세를 갖추고.
묵광으로 단련된 최고 효율의 오러를 온몸에 짙게 두른다.
마력을 있는 대로 꺼낸 뒤, 줄리아에게 배운 신체 강화 버프 마법을 스스로에게 시전했다.
또한 왼쪽 가슴에서 박동질을 하고 있을 용의 심장에 신경을 집중, 거센 패기를 흘려 두려움을 축소했다.
지금껏 그 어떤 적과 싸울 때도 이 정도로 힘을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크으윽……!’
유진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심연 안에서 그대로 죽어버릴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아직 월광참은 쏟아지지도 않았는데도 심연 속의 강대한 압박은 유진을 사지로 내몰고 있었다.
이 모든 준비는 단 1초도 채 되지 않은 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이윽고.
콰과과과과!
무수한 월광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솔 아힌이 라울러의 숨통을 끊기 위해 꺼냈던 아힌의 비기.
그러나 이번에는 에솔이 아닌, 9성이라는 인외의 경지에 이른 기사가 살의를 있는 대로 담아 쏘아낸 공격이었다.
유진은 시야가 전혀 트이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 대신 머릿속에 날아오는 월광참들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몸을 뒤틀고 손목을 움직이며 월광참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월광참을 쿠란의 검으로 튕겨냈을 때였다.
우우웅!
그 위력이 대단하다는 건 차치하고, 갑자기 유진의 왼손에 끼워진 폭군의 반지가 반응한 것이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