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권능이다! 배니커의 월광참 안에 분노의 권능이 깃들어 있어!
체첸이 유진에게 알린 대로였다.
카앙! 카아앙!
심연 속에서 쿠란의 검과 화룡검이 월광참과 맞부딪힘에 따라 유진은 절감할 수 있었다.
‘그냥 평범한 월광참이 아니야. 월광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뒤섞여 있다. 그게 분노의 권능인가 본데.’
자고로 분노의 권능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펼치는 일종의 육참골단 식의 공격이었다.
다시 말해 배니커는 유진을 해치기 위해 그만큼 커다란 힘을 사용했다는 말이었다.
‘크윽……!’
유진이 뒤로 서서히 밀려나며 침음을 삼켰다.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일격들을 계속해서 막아내야 하는 입장인데, 심연 속은 애초에 공기도, 빛도 없는 공간이기에 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숨통이 옥죄어 오며 심장이 점점 크게 요동쳤다.
용의 심장 덕분에 두려움은 가셨으나, 보이지도 않는 칼날들을 막아내는 행위 자체가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하나.
‘분노라는 감정에는 항상 빈틈과 약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게 권능이라 할지라도.’
유진은 그 와중에도 묘수를 생각해냈다.
월광계에서 살아남았던 인물은 유진이 알기로 불칸과 더불어 한, 두 명에 불과했다.
완전기억 능력을 사용해, 그는 전생과 현생에 보고 들었던 모든 정보를 취합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네놈이 가진 힘의 근원은 무엇이지? 어떻게 전사의 요람에서 그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나.
-긍지다.
-무슨 긍지를 말하는 건가?
-긍지의 방향은 어디든 간에 상관없지.
태양신교의 참모로서 불칸을 죽이기 전, 그를 심문할 때 받아낸 답변이었다.
그때도 불칸은 전사의 요람 수장답게, 늘 자신들을 지탱하고 이끄는 근본이념인 ‘긍지’를 강조했다.
정확히 불칸이 어떤 기술을 써서 어떻게 월광계를 막아냈는지에 대한 정보는 완전기억을 사용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추측할 수는 있었다.
‘긍지란 자신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가지는 당당함을 말한다. 그러니.’
이 심연 속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월광참을 막아낼 수 있으리란 믿음이 필요했다.
이는 명경지수를 습득할 때와 비슷한, 일종의 정신적 각성을 뜻하는 것일 터.
물론 이에 대해 불칸은 끝끝내 말하지 않고 숨을 거두었지만, 유진은 대략적으로나마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핑-
유진은 순간 빈혈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어지러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정신과 신체 사이에 줄이 여러 가닥으로 이어져 있다면, 그중 하나가 끊어지며 의식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검을 왼쪽으로 향할지, 오른쪽으로 향할지에 대한 결정이 아주 조금 느려지는 느낌이었다. 검이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다.
사자의 시험을 볼 때 체첸에게 수없이 많은 정신공격을 버텨내며 경험했던바, 이는 신체적인 변화가 아닌 정신적인 공격에 의한 것임이 분명했다.
이를 알아챈 체첸이 다급히 소리쳤다.
-네, 네놈! 몸이 느려졌다. 이것도 분노의 권능 때문인 것 같은데……!
‘정신공격이야. 네 덕 좀 보자. 전처럼 어설프게 하지 말고.’
유진은 침착하게 말하긴 했으나 본인이 위험에 빠졌다는 걸 직감했다.
체첸이 다급하게 유진에게 정신 방벽을 걸었다.
-빌어먹을! 무슨 방벽을 걸어야……!
‘분노의 권능이니, 판단력을 흐리는 정신공격일 거야. 판단력과 관련된 방벽으로.’
-알겠다!
쿠란의 검이 강하게 진동하더니, 푸른 빛이 흘러나와 유진의 온몸을 감쌌다.
더불어 유진은 묵광 2성의 부가 효과, 정신 방벽을 이용했다.
유진이 성장하는 사이 체첸도 마법에 조금 더 능숙해진 건지,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탓!
판단력을 되찾은 유진이 다시 검을 올바로 쥐고 월광참을 견뎌내었다.
체첸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이대로 대장전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크하하하! 어떠냐! 이 빌어먹을 검 속에 갇힌 이후 처음 제대로 활약한 것 같은데.
‘후우, 나쁘지 않았어.’
-에잉…… 야박하긴. 그나저나 저 분노, 어떻게든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느냐? 검격이 너무 거칠다 보니 빈틈이 있을 것 같은데.
‘같은 생각이야.’
앞서 유진이 생각한 바를 체첸도 뒤늦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분노라는 감정에 필연적으로 섞이는 빈틈. 그것을 노려야 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반지에 답이 있었다.
우웅!
그가 탐욕의 권능을 꺼내 양손에 든 두 검에 실었다.
유진이 탐욕의 권능에 대해 끊임없이 관찰한바, 권능이 실린 매개체와 탐욕의 기운이 맞닿을 때 비로소 권능을 삼킬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다.
오스틴 왕국의 1왕자가 가진 지배의 권능을 흡수할 때에도 그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까아앙!
흑색의 연기가 두 검에 실려 월광참과 맞닿기 시작하던 때였다.
-네놈의 그 권능이 분노를 흡수하고 있다! 온통 시뻘건 기운이 검 속을 타고 네 몸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가고 있어! 괜찮은 게냐?!
‘성공이네. 괜찮은지는 모르겠어. 빌어먹을, 조금씩 밀리는데.’
유진의 예상대로 탐욕의 권능이 효과를 발한 것이었다.
분노의 기운이 쿠란의 검과 화룡검을 타고 빨려들어 옴과 동시에 유진은 단전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이 분노의 기운을 어느 정도까지 흡수해야 분노의 권능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월광참을 막으면 막을수록 뒤로 밀리고 있었다. 힘도 서서히 떨어진다.
따라서, 힘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이 분노를 최대한 흡수해보아야 했다.
-탐욕으로 분노의 권능을 흡수하려는 거지? 그게 네 목적 맞느냐?
‘그래. 후우……!’
-그건 일단 부수적인 목적이지 않느냐! 탐욕까지 쓰려면 힘이 모자랄 테니 일단 월광참만 막는 데에 집중해야……!
‘아니.’
그렇다면?
‘이 심연 안에서 최대한 오래 있어야 해. 그래야 분노의 권능을 가질 수 있어.’
-미친 소리를! 욕심은 그쯤이면 되었다!
체첸이 느끼기에 유진의 힘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만큼 월광참은 대단히 강한 검격이었다. 애초에 8성의 기사가 9성의 공격을 막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으니, 지금까지만 해도 기적이었다.
하나 유진은 만족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월광참의 폭풍 속에서 두 개의 검만으로 두 발을 붙이고 서 있는다.
피짓!
팔과 다리에 월광참의 기운이 스치면서 깊은 자상이 남았다.
그만큼 커다란 월광참이 거듭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 * *
심연은 완전한 어둠 속이었기 외부에서 직접 관찰할 수는 없었으나, 고성급의 기사들은 그 기운의 충돌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는 있었다.
전장 중앙에 서 있는 로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배니커가 말로만 듣던 월광계를 사용할 줄이야. 이 거리에서도 피부에 오러의 파편이 튀는 느낌이다. 나도 저 공간 안에서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겠어.’
새카만 구체 속에서 유진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은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심연을 보고 있는 에이츠 영지의 사람들과 로렐리아, 라울러도 간절한 표정이었다.
“제발, 유진…….”
“조금만 버텨, 조금만……!”
“아이구, 유진 기사님께서 괜찮으실까요? 저 시꺼먼 게 뭔지는 몰라도, 겁나게 강한 기술 같은데……!”
라울러의 옆에 있던 에이츠 영지민 하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 라울러가 두 눈을 심연에 고정한 채 조용히 답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같아요.”
“예? 뭐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진이 이길 거라는 건 당연하다는 말이에요.”
“아……!”
너나 할 것 없이 에이츠 쪽은 모두가 유진이 저 까만 구체를 깨부수고 벗어나길 애타게 기도했다.
그리고 반대편, 아힌 가문 쪽.
아힌이 돈으로 매수한 용병들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배니커 경께서 화가 제대로 나신 모양이야?”
“저 핏덩어리만 죽여버리면 다 끝난다니, 너무 쉽잖아? 하하!”
심지어는 아힌의 정식 기사들도 조용히 작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모두가 배니커의 승리를 점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 그 말소리를 들은 아힌 기사단장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말을 삼가라. 배니커 경께서 집중하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
“아하, 예.”
“예, 실례했수다.”
기사단장은 오랜 시간 동안 배니커의 옆에서 그를 지켜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의기양양하던 배니커의 얼굴에서 옅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 * *
‘크으으……!’
그는 고통스러운 침음을 삼키면서도 심연 속에 있기를 더 고집했다.
분노의 권능을 구성하는 기운이 조금씩 빨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게 느껴졌기에 유진은 멈출 수 없었다.
-당장 탐욕을 거두어들여라! 그건 에너지가 너무 많이 쓰이는 기술이다!
‘방법이 있으니까 호들갑 좀 그만 떨어.’
쿡!
월광참이 유진의 어깨에 박혔을 때, 유진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리란 걸 깨달았다.
결국, 유진은 지금까지 숨겨온, 가진 가장 강한 수를 꺼내기로 했다.
문신화였다.
화아아악!
유진이 속으로 흑색 용인(龍人)의 모습을 상상하자, 문신화가 이루어졌다.
팔과 다리, 어깨에 새겨진 깊은 검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철갑처럼 두껍고 단단한 비늘이 그곳을 가득 메웠다.
그러자 유진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후우, 이걸 기다리고 있던 게냐? 이제 저 심연의 눈을 썰어버리면 월광계는 끝난다! 어서 저기에 검격을……!
‘아니, 문신화도 썼는데, 이제 끝까지 버텨야지. 분노의 권능을 흡수해야 한다니까?’
-미친놈! 아무리 문신화를 썼다고 해도 심연이 언제 끝날 줄 알고?
체첸의 말대로 심연의 끝에서 아주 작은 빛줄기 하나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심연의 눈’이라 하는 일종의 약점이자 탈출구였다.
저 작은 구멍에 검격을 거듭 가하다 보면 심연은 무너지고 월광계도 끝이 난다. 대장전에서 승리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대장전에서 내가 이기는 거야 당연한 거고, 배니커가 가진 분노의 권능까지 뺏어가야 진짜 이득이라고 볼 수 있지.’
유진은 만족할 생각이 없던 것이다.
지잉, 지이잉!
유진이 신들린 것 같은 솜씨로 월광참을 막고, 또 막아냈다.
문신화를 사용한 덕분에 움직임이 훨씬 쉬워졌기에 상처도 잘 나지 않았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크흐, 숨 막히네. 빌어먹을.’
심연 속에는 공기가 없기에 숨을 계속 참고 있었다. 심지어 그 와중에 거친 움직임으로 검격을 막아내고 있었으니, 몸에서 산소를 내놓으라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1분이 지났다.
월광참의 세기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숨은 계속해서 차고 있다.
2분이 지났다.
이제는 무의식에 맡겨 월광참을 막아내고 있었으나, 힘이 점점 빠지는 건 문신화로도 역부족이었다.
3분이 지났다.
심장이 산소를 갈급하며 미친 듯이 뛴다. 어쩌면 분노의 권능이고 뭐고 당장 탈출해야 할 수도 있었다.
문신화로 인한 검은 비늘로 단단해진 신체였음에도 상처가 나면서 비늘이 너덜너덜해졌다.
이게 9성급 기사의 공격이라는 듯, 매서운 기세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그만! 그마안! 미친 새끼야, 그만하라고오!
체첸이 절규하여 유진을 만류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때였다.
카앙……!
커다란 월광참 하나를 가까스로 막아냈을 때였다.
-궈, 권능을 흡수한 것 같은데?
유진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권능의 전부는 아니고 극히 일부만 가져왔지만 충분히 더 발전시켜서 이용할 수 있겠어.’
고개를 끄덕인 유진이 심연의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오러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했다.
탓!
월광참을 한 번 흘린 유진이 자세를 잡았다.
분노의 권능을 갖기 위해 일부러 월광계 속에 머물렀다. 덕분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기에 시간을 끌 여유는 없었다.
심연의 눈을 향해 검격을 내지른다.
그냥 검격이 아닌, 신검합일이었다.
쾅!
심연의 눈이 신검합일에 의해 찢기자마자 빛무리가 쏟아졌다.
배니커의 일격을 버텨낸 것이다.
“어엇……?”
“버, 버텨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아힌 가문의 기사들이 놀란 탄성을 흘렸다.
이는 배니커도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패배를 직감하고 욕지거리를 내뱉던 와중, 배니커는 찰나의 기운을 감지해냈다.
‘뭐지? 놈에게서 나와 같은 분노의 기운이……? 설마?’
아직 확실치는 않았지만, 배니커는 유진의 어린 시절 소문이 떠올랐다.
-동부 로베르 가문의 유진이라는 아이는 스승이 보여주는 기술을 눈앞에서 곧장 따라 한다더군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기술인지는 상관이 없답니다.
유진이 명성은 워낙 자자했기에 배니커의 귀에도 들어왔던 내용이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남의 기술이나 기운을 복사해내는 재주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배니커는 덜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나의 분노의 기운도 복사한 건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아직 의심 수준이었지만, 배니커는 혹시 모를 위험을 없애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유진을 죽여야 했다.
그러려면 ‘명분’이라는 게 필요하다.
“저 자식, 문신화를 사용했다! 용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느냐!”
배니커는 유진이 사용한 문신화라는 기술을 명분으로 들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방어 수단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일격을 막아내기만 하면 되오. 문제는 없소이다.”
“아니! 저 문신화가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어찌 아느냐! 소지한 아티팩트 외에 다른 아티팩트를 사용했을 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
“쿠란의 검과 화룡검 이외에는 어떠한 아티팩트도 소지하지 않았소. 그건 이 몸이 확인한 바요.”
배니커는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결과를 부정했다.
“말도 안 된다! 저놈은 뭔가 편법을 쓴 거야! 내, 나의 아들에게도 아마 비슷한 수법을 썼겠지!”
배니커는 분명 방금까지 이성적이었으나, 분노의 권능을 사용한 탓인지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분노가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이것도 막아보아라! 감히, 감히 내 앞에서 개수작을 부려!”
치이잉!
배니커가 오러 블레이드를 구현해내어 유진에게 와락 쏘아냈다.
오로지 유진의 목숨을 노린 일격이었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