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이미 배니커와 제이드의 전투로 벌어지는 후폭풍 덕분에 로스를 필두로 가디언은 다른 곳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오러 방벽을 곳곳에 둘러놓고 있었다.
하나, 가디언들은 그 와중에 고통에 찬 침음을 삼켜야 했다.
콰앙! 콰아앙!
배니커와 제이드가 맞부딪히며 일어나는 기운의 파장 때문에 가디언 일원들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것이었다.
배니커의 진 월광계가 제이드의 크라우드식 이도류에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감에 따라, 땅이 또다시 패이고 갈라진 균열이 더욱 벌어졌다.
제이드가 진 월광계에 검격을 쏘아낼 때마다, 배니커의 뒤쪽을 둘러싸고 있던 에이츠 산맥에도 충격이 가해졌다.
결국.
쿠르르르릉!
산맥이 크게 흔들리더니 바위가 굴러떨어지고 나무들이 죄다 썰려 나가며 커다란 지진이 일었다.
그 덕분에 에이츠 영지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도 흔들리다가 아래로 꺼지고 무너졌다.
어쩌면 이대로 대륙이 땅으로 주저앉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의 거대한 떨림이었다.
물론 싸움의 양상은 제이드가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모습이었으나.
유진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한 치도 눈을 뗄 수 없다. 유진은 오러까지 눈에 집중하여 제이드를 지켜보았다.
얼마나 시각에 신경을 몰두했는지 유진의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섰다.
제이드가 펼치는 크라우드식 이도류는 그야말로 효율의 극치였다.
‘크라우드식 이도류를 저렇게 펼쳐낼 수도 있구나!’
제이드가 펼치는 수법들은 유진에게 끝없는 영감을 주었다.
배니커가 회심의 공격으로 진 월광계를 꺼냈으나.
제이드는 미동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동안 많이 컸군.”
이도류의 필살기는 꺼낼 필요도 없이, 제이드는 잠깐의 움직임만으로 진 월광계를 완전히 파훼했다.
꽈아앙!
심연이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폭발하고, 거친 폭풍이 휘몰아치며 주위에 있던 모든 파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마, 말도 안 되는……!”
배니커는 진 월광계가 이토록 쉽사리 막힌 것에 크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생명력을 깎아가며 펼친 비기였기 때문일까, 배니커는 울컥 피를 토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제이드가 무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다인가? 전쟁까지 일으키고자 하기에 얼마나 자신감이 있나, 했더니.”
“닥쳐라! 운이 좋았을 뿐이다! 감히 브리튼 연합국에서 이런 행패를……!”
“깨달음이 한참 부족한데, 희한하군. 뭔가 다른 힘에 기대어 그나마 9성에 오르긴 한 것 같은데.”
“로스 레한드로! 네놈은 뭘 하는 게야! 대장전에 무단으로 끼어든 자를 보고만 있을 요량인 게냐?!”
결국 전력의 차이를 절감한 배니커가 로스에게 도움 아닌 도움을 청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제이드가 유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잘 보아라. 이것이 네가 가야 할 길이고, 넘어서야 하는 벽이다.
제이드가 왼손에 오러 소드를 해체하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진검도 허리춤에 걸더니 등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스릉!
펜첼의 가주만이 다룬다는 검, ‘창천(蒼天)’을 꺼냈다.
북부의 냉기를 가져다 박은 듯 차가운 기운을 뿜는 푸른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대기 중에 흐트러져 있던 모든 오러들이 제이드를 중심으로 하여 죄다 모여들고 있었다.
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불현듯 예측했다.
‘설마?’
휘유우웅!
모래 먼지가 소용돌이를 타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강대한 기운이 땅거죽을 타고 퍼져나가며 보는 이들의 무릎을 휘청이게 했다.
마치 태풍이 휘몰아치는 듯했지만, 정작 그 중심에 있는 제이드는 평온해 보였다.
검의 정점에 있는 자만이 다룰 수 있는 기술.
‘심검(心劍)’이 펼쳐지고 있었다.
배니커는 바닥에 주저앉아 제이드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질겁한 표정이었다.
위험을 직감한 배니커가 사력을 다해 오러를 끌어모아 제 몸을 보호했다.
9성급의 기사가 두른 방벽은 웬만한 공격에는 흠집도 가지 않을 터였으나, 이어진 장면에 모두가 입을 떡 벌려야만 했다.
제이드가 한 걸음 내디디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이것이 첫 번째 죗값이고.”
제이드의 흑검은 분명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걱!
배니커의 왼쪽 손목이 잘리며 허공에 핏물이 튀었다.
“……으아아아악!”
배니커가 뒤늦게 제 손목이 날아간 걸 알아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마음속으로 움직인 검이 현실에도 나타나는 기술, 심검의 효과였다.
제이드는 배니커가 경고한 점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째 말을 이었다.
“이것은 두 번째 죗값이며.”
“자, 잠깐! 잠깐!”
배니커가 기겁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섰으나, 제이드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스걱!
배니커의 오른쪽 손목도 날아갔다.
“크아아아악! 내 손! 내소오온!”
그가 고통에 찬 괴성을 질러대는 소리가 전장에 가득 퍼져나간다. 바람 소리와 한 사내의 비명만이 메워진 전장의 광경은 다소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드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것은 세 번째 죗값이다.”
스걱, 서걱!
배니커의 양 발목이 썰려 나갔다.
“끄아아아악!”
배니커는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고, 손도, 발도 없는 몸이 되어 모랫바닥에서 몸부림쳤다.
제이드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배니커를 내려다보았다.
유진이 그 광경을 보며 히죽 웃었다.
‘맞아. 펜첼은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야. 다만, 아힌처럼 욕심 많은 자들이 꼭 한 번씩 펜첼을 건드리다가 된통 당할 뿐이었지.’
다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저 정도로 심하게 손속을 한다면 정말로 아힌 쪽에서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 결과적으로 에이츠에게도 위기가 올 수도 있을 텐데.’
그에 대한 걱정은 곧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냥, 네놈이 맘에 들지 않아서다.”
제이드가 이번에는 창천을 허공에 휘둘렀다.
다른 이들이 보면 저게 뭐 하는 건가? 싶을 수 있었다.
괴성을 고래고래 질러대던 배니커는 기절한 듯 그대로 엎어졌다.
-뭐지? 죽은 건가? 아니, 가주님은 허공에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체첸이 의문을 표하는 사이.
유진은 배니커의 분노의 권능이라는 능력을 가져왔기에 알 수 있었다.
‘배니커에게 있던 분노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제이드가 배니커의 영혼을 베면서 분노를 없앴어.’
심검은 사람, 물건 따위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혹은 그 무언가를 베는 것이었다.
만약 제이드가 손을 더 과감하게 썼다면 배니커는 그 자리에서 아예 죽었을 것이다.
초점 없는 눈을 한 채 허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고 있는 배니커를 뒤로하고, 제이드가 아힌의 군대에게 들으란 듯 말했다.
“아힌, 똑똑히 들어라.”
그 목소리는 분명 맑은 호수보다도 고요했고, 주말 아침보다도 평온했으나.
이상하게도 수만에 이르는 아힌의 기사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공포스럽고 거대한 존재로 다가왔다.
“전쟁을 일으키려거든, 마음대로 해라. 펜첼이든, 북부든, 서부의 죄 없는 지역이든, 마음대로 쏘다녀라.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 끝은 죽음밖에 없다는 걸 명심해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힌의 군대는 어떠한 비명도, 겁에 질린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소리 없이 달려 도망갔다.
전장에는 그들이 미처 들고 가지 못한 병장기와 더불어, 아직까지 울려 퍼지고 있는 제이드의 진한 음성만이 잔류했다.
* * *
로스 레한드로는 이 대장전의 승리자는 유진인 것을 직접 공표했으며, 걷지도 기지도 못하게 된 배니커는 가디언의 병사 몇에 의해 서부로 옮겨졌다.
그러니 이번 대장전으로 인해 아힌 가문의 명예가 실추된 것은 보나 마나 뻔했다.
로스가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유진에게 말했다.
“아힌 가문에서는 대장전의 규칙을 어긴 데에 대한 배상을 치를 것이오. 내가 장담하겠소.”
그 사이, 로렐리아와 라울러는 영지전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생각에 환호성을 지르더니 언제부턴가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바로 유진의 옆에 서 있는 제이드 때문이었다.
딸꾹! 딸꾹!
아마도 제이드가 보인 전투가 너무도 인상 깊었기 때문이 아닐까.
제이드는 그런 둘에게 긴장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두드리고는 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몸은 괜찮느냐?”
“예, 뭐…… 좀, 아프네요.”
바로 방금까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다 나온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그에 제이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더니 감스탄에게 말했다.
“먼저 갈 테니 유진과 라울러와 함께 천천히 오게.”
“알겠습니다, 가주님.”
제이드가 문을 열고 나섰고, 그 뒷모습을 모두가 멍하니 쳐다보았다.
“가주님은…… 딸꾹! 역시 가주님이구나…….”
라울러가 중얼거리는 말에 유진도 피식 웃었다.
‘아힌이 전쟁을 또 일으키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럴 일은 절대 없겠어.’
아힌의 기사들이 제이드가 전장에서 내뱉은 마지막 말을 듣고 짓던 그 공포감을 떠올려 보면 이는 어려운 추측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힌의 영주이자 가주인 배니커가 영혼을 잃어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이 된 이상, 그렇게 커다란 일을 벌일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크하하! 역시 펜첼은 일 하나는 확실하게 처리한다니까! 어떻게, 자랑스럽지 않느냐? 나는 가주님의 전투를 한 번만 본 게 아니라 놀랍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후훗!
‘그래, 부럽다, 부러워.’
* * *
폭풍처럼 지나간 하루.
브리튼 연합국의 거인이라는 아힌을 상대로 승리했으니, 에이츠의 입장에서는 더 거칠 것이 없었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정리가 되고 대장전에서 승리를 거둔 유진을 위한 축제가 벌어졌다.
에이츠의 영지 한가운데에는 한껏 신경을 쓴 조명과 더불어 조악한 테이블과 그 위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음식들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영지민들은 하나같이 환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로렐리아가 있었다.
“이번 승리의 덕택은 모두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모두가 아직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는 당연히도 알고 있었다.
“유진 경을 위하여!”
“유진 경을 위하여!”
“위하여-!”
우레와 같은 함성이 새카만 어둠을 환히 비추는 듯했다.
로렐리아는 바로 옆에서 머쓱한 표정으로 물잔을 들고 있는 유진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유진 경.”
“예. 로렐리아 경.”
“지겨우실 법도 하지만, 감사합니다. 투자해주신 데에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둘을 보고 있던 영지민들이 서로 꺅꺅거리며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왠지 모르게 영주님께서 눈빛이 묘한 것 같지 않나?”
“못 본 척해! 못 본 척! 요즘은 연상이 대세라고 하니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
“크흠! 암! 그렇지. 잘 되길 축복을 빌자고.”
“그래. 사실 검룡님이 힘써주신 이유가 로렐리아 영주님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니까.”
“정말 커다란 사랑이구만……!”
몇 시간 동안 축제 자리에 껴있던 감스탄과 라울러, 아일러도 유진과 로렐리아를 보고 있었다.
라울러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로렐리아가 자리를 뜨자 유진에게 다가갔다.
“유진.”
“고맙다는 말은 그만해도 돼.”
“아니, 고맙긴 한데, 진짜 고맙긴 한데…… 그건 안 된다.”
“……뭐가?”
“내가 너를 못 믿거나, 좋은 사람이 아니라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진짜 절대로 아닌데, 그것만큼은 안 돼. 미안하다. 이건 내가 결사반대야.”
“뭘 말하는 거야 도대체.”
“우리 누나는 안 된다고!”
“뭔, 헛소리를…….”
"나도 알아. 우리 누나, 예쁘지! 똑똑하지! 생활력도 좋고! 그래도 넘보는 건 안 돼!"
“아오, 뭐라는 거야 자꾸.”
"……뭐, 그래도 너라면 우리 누나의 짝으로 괜찮을……? 아악! 아냐! 그래도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유진은 라울러의 입을 틀어막으려는데, 어느새 아일러가 다가와 유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였잖아요.”
“……뭐? 넌 또 무슨.”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