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실린, 슬릭, 젤칸, 스피어, 그리고 아힌.
명문육가의 회의는 본래 일 년에 한 번 연초에 열리지만, 이번에 배니커와 제이드의 충돌로 인해 급하게 생겼다.
실린 가문은 에드뮬의 고모인 율리아 실린.
슬릭 가문은 현 가주이자 루한의 아버지인 굴탄 슬릭.
젤칸 가문은 발타르의 아버지이자 소가주인 록타르.
스피어 가문은 현 가주이자 레나 스피어의 아버지인 창왕.
아힌 가문은 1년간 근신에 들었다던 라트비가 얼굴을 비추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라트비를 보자 아힌 가문의 속사정이 엿보이는 듯했다.
‘가주가 폐인이 되고 하나 있는 후계자인 에솔도 믿음직하지 못하니…….’
다들 집무실에 모여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사이, 창왕은 집무실이 아닌 어느 동굴 안에서 어슴푸레한 불빛을 받고 있었다.
‘창왕 저 양반은 또 어디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인가 보네.’
‘저 혼자 자유로운 영혼이야 아주.’
창왕의 격식을 차리지 않음에 몇은 불편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한 시선도 잠시.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공통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트비가 가장 먼저 이번 사건에 대한 건으로 제이드에게 항의할 거라고 말이다.
배니커는 그냥 조금 다친 것도 아닌 손과 발이 잘려 현재 위중한 상태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은 빗겨나갔다.
“펜첼 가문은 도대체 뭐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군요.”
율리아는 초신성의 파티에서 유진에게 악수를 받으라 요구했던 것처럼, 대뜸 공격적인 어투로 말을 꺼냈다.
“……!”
“……!”
모두가 제이드에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던 상황에서 율리아가 화두를 떼었다.
“듣기로 아힌에서 전쟁을 선포했고, 그 명분은 정당해 보였습니다. 가주가 될 에솔 아힌에게 그렇게 과한 손속을 했으니까요.”
제이드는 어디 한번 계속해 보라는 듯 율리아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율리아는 그런 제이드의 반응에 약간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한데 그도 모자라 대장전에 그렇게 막무가내로 끼어들어 남의 가문 가주를 그 꼴로 만들다니, 이제 아주 막 나가자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율리아는 다른 가문들의 동의를 구하듯 가주들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았다.
타 가문의 가주들이 각기 다른 표정을 한 채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차였다.
“흠, 상황을 듣기로는 먼저 잘못을 저지른 가문은 펜첼이 아니라 아힌가였던 것 같던데, 자세한 내막을 모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젤칸 가문의 록타르가 두꺼운 팔을 엮어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즉시 반박했다.
“자세한 내막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펜첼의 대응은 너무 지나쳤…….”
하나, 슬릭 가문의 가주도 펜첼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미 아힌 가문의 비리와 관련해서 브리튼 연합국의 가디언과 공조하여 속속들이 밝히고 있다고 보고받았소.”
굴탄 슬릭은 루한과 빼다 박은 그 곧은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에솔 아힌의 성추행으로 시작하여 아힌 가문의 태신석 독점을 위한 비리들이 차근차근 밝혀지고 있소. 비리의 경중에 따라 손속의 정도도 결정되어야 하는 게 정의롭지 않겠소이까?”
“아니, 손과 발을 잘라버리는 게 정의로운 처사입니까?!”
율리아가 분을 못 참고 꽥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분위기는 애초부터 펜첼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구려. 이번 사건은 아힌과 펜첼의 충돌인데, 실린 쪽이 그렇게 화를 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소?”
“그, 그건……!”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율리아 경, 조금 진정하시지요.”
슬릭과 젤칸이 율리아를 만류했으나, 율리아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명문육가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잘잘못을 가리고 명예를 지켜야 합니다!”
“진정하세요, 율리아 경.”
“그게 오늘처럼 낯짝 맞대고 떠들어대는 이유고요! 그런데 어찌 된 게 입장을 아예 정해놓고 오다니, 이게 무슨 경우죠?”
“낯짝이고, 떠들어댄다니…… 단어 선택을 조심하시오.”
굴탄 슬릭은 경박한 율리아의 표현에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놈의 정의로운 소리 좀 그만……!”
그때, 제이드가 나지막이 목소리를 냈다.
“다행인 일 아니오?”
“……뭐요?”
율리아가 인상을 험상궂게 찌푸렸으나, 제이드의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도 평온했다.
“배니커를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인 일 아니냔 말이오.”
그 발언에 율리아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라트비를 보았다.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라니! 그게 같은 명문육가끼리 할 소리예요?!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라트비! 당신 가문 이야기잖아요!”
라트비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율리아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맞습니다. 다행이죠.”
“……응?”
“저는 제이드 펜첼 경이 적절한 때에 멈춰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무슨……!”
율리아가 당장이라도 화면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떴으나, 정작 라트비는 차분한 태도를 고수했다.
“저희 아힌 가문의 가주인 배니커 아힌 경의 대리자로서, 아힌의 모든 잘못과 과오는 모두 책임질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추가로.”
라트비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힌은 근 1년간 모든 대외활동을 중단하고 속죄하겠습니다.”
제이드는 라트비의 결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다른 가문의 이들도 아힌 가문이 이렇게 제 잘못을 깔끔히 인정할 줄 몰랐었다는 눈치였다.
하나 단 한 사람, 율리아만이 못마땅하단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는 이 기회에 펜첼의 위상을 떨어뜨리려 했는데, 정작 아힌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로 나오니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었다.
율리아는 조용히 제이드와 라트비를 번갈아 보았다.
‘이미 예상했다는 눈치를 보니 애초에 둘이 연락을 나눴군.’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확실했다.
율리아가 이를 깨물며 다른 가주들의 얼굴을 살폈다.
원래 펜첼 가문에 호의적이었던 젤칸 가문이나 중립적인 태도의 슬릭 가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스피어 가문의 가주, 창왕은 이러든 저러든 상관없어 보이는 표정.
‘병신같은 것들, 펜첼이 여기서 더 강해지면 대륙을 떡 주무르듯 할 게 뻔한데, 그걸 옹호하고 있다니.’
율리아는 지금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수결을 유도하기는커녕 펜첼에 대항하려는 가문이 실린 이외에 한 곳도 없었으니, 생각을 잘해야 했다.
그러던 차.
“율리아 실린, 펜첼에 억울한 게 많은가 보오.”
제이드가 율리아를 직시했다.
분명 영상장치를 통해 오러를 전달할 수는 없지만, 율리아는 제이드의 얼굴을 보고는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었다.
“아힌 가문은 잘못을 했기에 그만큼 대가를 치렀을 뿐이오.”
“하, 하지만……!”
“아니면.”
제이드가 말을 할수록 율리아는 다른 가주들을 쳐다보며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기 바빴다.
“실린 가문도 잘못이 있는 건가?”
제이드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안색이 하얘진 율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율리아 실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언 한번 하지. 날뛸 때는 상대를 봐가며 날뛰도록.”
급격히 싸늘해진 분위기에 율리아는 침음성도 흘리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 와중, 싸늘해진 회의장을 분위기를 전환이라도 하려 했는지 가만히 있던 창왕이 입을 열었다.
“크흠, 제이드 경, 검룡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듣기로는 꽤 많이 다쳤다고.”
“금세 회복했소.”
“음, 과연…… 흑지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던 기술도 썼다고 하던데, 그게 뭔지 궁금하더군요.”
제이드는 회의 내내 진중한 표정이다가, 유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한결 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유진의 특성이기에 말할 수는 없소. 다만.”
뒤이어진 말에 율리아를 포함한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도 가지지 못한 가능성을 유진이 지니고 있다는 건 확실하지.”
“으음!”
제 자식을 자랑할 때 자연스레 나오는 그 흐뭇한 표정이 제이드의 안면에 스쳐 갔다.
제각기 다른 생각을 했지만, 그들이 놀란 포인트는 모두 똑같았다.
‘루한에게 듣기로도 범상치 않다고 했지.’
‘그 무뚝뚝한 북벽이 미소를 지을 정도로 재능이 넘친다는 건가?’
제이드가 유진에 대한 애정이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어떻게 했길래 그런 게 가능한 거지? 검룡이 더 강해지면…… 곤란해질 게 분명한데!’
‘흑지의 기술이라, 그 기술은 창에도 접목시킬 수 있는 걸까? 너무 궁금하군.’
율리아와 창왕은 제이드의 미소보다도 유진이 부렸다던 그 기운에 관심이 큰 모양이었다.
하나, 제이드는 이내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명문육가의 회의는 참석하기 어렵소.”
최근 북부의 마수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에 제이드가 직접 나설 예정이었다.
여기서, 머리 회전이 빠른 가주들은 제이드가 의도한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검룡을 높여 말한 이유가 있었군.’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울 것이나, 그렇다고 펜첼이 빈집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한 거야.’
그저 제 손주를 자랑하는 데에 그치지 않은 것이다.
제이드는 이를 끝으로 화면에서 퇴장했고, 나머지 가문들이 이야기를 나눴다.
“허, 제이드 경은 어찌 된 게 늘 얼굴이 한결같단 말이지. 무뚝뚝하고, 근엄하니.”
“어쨌든, 제이드 경 말고 다음 회의 때 참석 어려운 곳 있소이까?”
실린 가문만 소외된 채 화기애애한 대화를 하자 율리아는 차가운 얼굴로 내뱉고는 화면을 종료해버렸다.
“다음에 뵙죠.”
뚝-
남은 네 가문의 가주들은 실린 가문의 분위기를 알고 있기에 그저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 * *
회의가 끝나고 제이드와 라트비가 따로 연락을 나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조치를 빠르게 해 줘서 고맙소.”
라트비는 자조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이 아힌을 바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저도 고맙습니다.”
“무얼 말이오?”
“배니커 가주님께서 달라지셨습니다.”
라트비는 설명을 이었다.
“제이드 경의 심검을 겪은 이후, 배니커 가주님의 불같은 성질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제야 정말로 가주의 위치에 있는 인물 같아요.”
그 이유는 제이드가 알고 있었다. 심검으로 분노의 권능을 베어 없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심검은 물리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상대의 내면에 있는 응어리나 원한 혹은 기운까지도 벨 수 있는 기술이었다.
“아직은 혼란스러워하지만 예전에 보이던 폭급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행이군.”
“한데…… 걱정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 당시, 검룡께서 배니커 가주님의 그 분노를 똑같이 사용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만약 검룡께서도 같은 기운을 사용한다면, 나중에 배니커 가주님과 똑같은 광증을 겪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주어 고맙소. 그 점은 시간을 두고 지켜보겠소.”
“예, 부디 괜찮으면 좋겠군요.”
이를 끝으로 연락은 마쳐졌다.
‘라트비의 말대로 그 점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유진이 그 능력을 직접 보여야 하는데.’
제이드는 유진의 전투를 조금 더 관찰하고픈 생각이 들던 차, 예전에 유진이 꺼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가주님과 함께 임무에 나서고 싶다고 한 말이었다.
‘약속도 지킬 겸, 마수 토벌에 유진을 데려가야겠군.’
* * *
명문육가의 회의가 마쳐진 사이, 유진은 남관에 도착했다.
남관에는 유진의 동기들을 포함한 주작 기사단의 훈련으로 인해 피어오른 열기가 가득했다.
“크아악!”
“이이익!”
깡! 까앙!
모두 감스탄이 특별하게 개조한 검인 천근검(千斤劍)을 힘겹게 들고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천근검이란 부피 대비 무게가 매우 크기에 무기의 용도보다는 수련의 용도로 주로 쓰이는 일종의 수련 용품이었다.
거기다가 그라시안의 모래시계도 작동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제 체중에 2배도 더 되는 무게를 버텨내며 훈련 중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천근검을 들고 대련한다는 건 훈련자들에게 아예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감스탄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척 봐도 근력이나 체력이 눈에 띄게 늘었네. 열의가 대단해.’
유진은 그들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던 차였다.
“어? 유진?”
“유진? 유진 로베르!”
유진이 선배 주작 단원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선배들은 게거품을 물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 너 어디서 이런 걸 얻어와서 우리가…… 이, 이 개고생을 하게 만들어!!”
“이 지옥에 우리를 던져놓고 혼자 휴가를 가? 아니, 라울러, 그 자식은 어디 있어!! 이 자식들을 아오오!”
그들은 유진을 저주하고 있었다.
“음…… 이게 아닌데.”
유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저 구레나룻만 긁적였다.
“네가 이 빌어먹을 모래시계 개조했다면서?!”
“이, 개자식!”
물론 그들은 정말로 유진을 혐오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만큼 훈련이 힘들고 고됐다는 걸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감스탄이 입을 열자 남관 내부가 조용해졌다.
“유진은 다 너희들을 생각해서 밤까지 새워가며 이걸 개조했다고 알고 있다. 너무 그러지 말거라.”
“으으으! 죽음처럼 편안하게 재웠어야 했는데!”
“어허, 1시간 더 훈련할까?”
“…….”
감스탄이 유진에게 다가갔다.
“내가 너를 좀 팔았다.”
“예? 무슨.”
“저 녀석들을 제대로 훈련시키려면 동기부여를 해야 했다. 그래서 네 성장세를 예로 들어서 비교를 계속해댔더니 죽어라 훈련을 하지 뭐냐? 하하하!”
유진이 짧은 사이에 크게 강해진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한 선배들은 유진에게 뒤처진 것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감스탄의 판단은 현명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일주일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다.
물론 감스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진도 온 기념으로, 1시간 더 추가로 훈련한다!”
“예……? 무슨 기념이요? 유진이 온 거랑 훈련 연장이랑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유진이 자기 따라잡으려면 한참 더 해야 한다고 그러는데?”
감스탄이 말에 선배 기사들이 절규했다.
“저 자식을 그냥 확……! 으아아아아아!”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