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그때.
까아앙!
발란트의 옆에서 고군분투하던 주작 단원 하나가 청룡 기수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냈다.
“정신 차려, 발란트!”
발란트가 이를 악물었다.
유진의 바람대로 주작은 꽤나 고전하고 있었다.
“저 종소리는 도대체 뭐야? 주작이 정신을 못 차리는데?”
“아으으! 머리 아파!”
귀령종은 관중의 귀에도 닿아 두통을 유발하고 있었다.
주작의 붉은 빛과 청룡의 푸른 빛이 뒤섞이면서 보기에 화려한 장경이 펼쳐졌다.
청룡의 아가리가 주작의 날개를 물어뜯으려 하면, 주작은 잽싸게 날개를 거두고 청룡의 옆구리를 노렸다.
이는 차라리 예술작품의 단편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찬란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청룡귀령종의 파훼법이 발란트에게 있다는 것부터 승부는 기울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뭐지?! 이 자식들, 눈빛이 전혀 죽지를 않아!’
‘밀리는 것 같지만 진형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잖아?’
‘뮬 단장님께서 분명 이 종이 주작을 완전히 무너뜨릴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뭐라도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청룡 단원들이 당황할 만도 한 게, 유진은 주작 단원들과 연결해 놓은 소통 체계를 이용하여 주작 단원들의 움직임을 일일이 통제했다.
왼쪽 진형이 무너질 것 같으면 왼쪽에 신경을 써서 청룡을 밀어냈고, 오른쪽이 허물어지면 오른쪽을 보강했다.
주작도 주작의 검진이 있었으니, 청룡검진의 귀령종이 통하지 않자 주작 검진이 힘의 우위를 점한 것이다.
청룡 단원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차.
“이제 내 차례인가……!”
절치부심한 발란트가 주작 단원들 사이에서 치고 나오며 파이어 뱃을 펼쳤다.
촤아악!
검을 가로로 크게 휘두름과 동시에 붉은 화염이 공중에 흐드러졌다.
그 화염의 모양은 작은 박쥐 수천 마리가 공중에 날아오르는 모양새였다.
연무장이 순식간에 후덥지근해지며 청룡 단원들을 뒤로 물렸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화염 박쥐들이 연무장을 메우자마자 박쥐들이 초고주파를 생성해냈다.
그에 따라 그나마 남아 있던 청룡귀령종의 효과가 완전히 상쇄되었고, 심지어는 청룡 단원들의 귀에 아찔한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크으윽!”
발란트의 상징검술이 귀령종의 효과를 완벽히 상쇄한 것이다.
이후부터는 일방적인 양상으로 흘러갔다.
오로지 뮬의 말만 믿고 검진을 펼쳤던 청룡은 그 검진이 파훼되니 속수무책으로 주작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주작 검진을 이렇게 사용하니 어떻게 해서든 상대는 무너지는구나!’
‘이제 감각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겠어.’
유진이 뜻한 대로, 주작은 청룡을 상대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결국.
털썩!
마지막으로 남았던 청룡 단원이 바닥에 주저앉고, 모든 싸움은 끝났다.
* * *
“발란트의 상징검술로 이걸 받아칠 생각을 할 줄이야. 언제나 내게 가르침을 주는구나.”
“운이 좋았죠.”
뮬이 유진과 인사를 나눴다.
비록 이번 승부는 주작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뮬은 결과를 승복함과 동시에 유진에게 존경을 표할 줄 알았다.
짝짝짝짝!
전대 단주들과 더불어 에막스, 관객들 모두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허어! 진짜 명승부 아니었나?”
“그러게 말이야. 내 지금까지 본 서열식 중에 가장 재밌었네.”
새로운 청룡검진의 등장과 주작 기사단의 구심점으로 확실히 자리 잡은 유진.
모두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회자될 서열식이었다.
달탄과 베르세이도 유진의 앞으로 다가와 한 마디를 건넸다.
“멋진 결투였네, 유진. 자네 덕분에 이 친구랑 한 내기에서 내가 이겼어. 크하하!”
“끄응…… 뭐, 뮬도 인정한 마당에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건 없겠군.”
“자네도 성격 많이 죽었구만? 전 같았으면 떼를 써서 무승부라도 만들었을 텐데 말이야.”
“무슨 헛소리를 자꾸!”
유진이 피식 웃으며 달탄과 베르세이에게 악수를 건넸다.
“공정한 심판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또 뵈었으면 합니다.”
“암, 그래야지. 베르세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줬는데, 또 만나야지.”
“하여간……!”
그때, 에막스가 백호와 현무의 결과를 공지했다.
“백호가 3대0으로 승리하였으며, 현무 기사단은 3, 4위전을 치를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자동으로 4위에 서게 되었다.”
그 말에 뮬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클라크가 승부를 해보지도 않고 물러났다고? 아니, 얼마나 부상이 심하기에……?”
그러나 유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우스와의 대결을 위해 준비할 게 많겠어.’
유진의 예상대로라면, 시리우스는 분명 흑지에 있으면서 뭔가 비밀스러운 술수를 하나 준비해왔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무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란 불가능했으니까.
‘흑룡의 피는 아닌 것 같아. 그랬다면 시리우스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을 테니까.’
그러니.
‘흑지와의 접점이 뭐가 있었는지 알아봐야 해. 분명 전사의 요람과의 밀담이 있었을 거다.’
주작과 백호의 대결은 12월의 마지막 날 펼쳐질 것이다.
* * *
펜첼에 위치한 펍.
평소에는 조용하기로 유명한 펜첼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서열식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청룡과 주작 간의 서열식은 모두에게 인상 깊게 남은 모양이었다.
“감스탄 경의 구염참은, 후우! 지금 생각해도 어마어마했어.”
“유클레이 기사님이 그 정도로 고전했으니 말 다 했지. 나는 주작이 이길 걸 알고 있었다고! 하하!”
“유진 공자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걸?”
유클레이와 감스탄의 대결.
“4대4 대전에서는 난 솔직히 청룡이 이길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약점을 발견해서 노릴 줄 알았겠나?”
“내 말이 그 말이야. 두 곳 모두 신입을 4인전으로 보낼 생각을 하다니, 뮬 단장님이나 유진 공자나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한가 봐.”
라울러를 비롯한 4인의 결투.
그때 칵테일을 만들고 있던 주인장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대미는 단체전이었지. 유진 기사께서 승부를 더 재밌게 만들어 주셨어.”
“맞아, 맞아. 주작이랑, 청룡이랑, 아주 그냥 뒤섞이고 물어뜯는 게……! 크으!”
“어릴 때부터 검룡이 남다른 건 알았지만, 서열식에서도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하는 걸 보고 완전히 반했다니까.”
주작의 위세가 떨어지며 자연스레 감스탄은 물론 유진에 대한 평가도 떨어져 있었는데, 이번 서열식으로 그러한 소문은 완전히 종식된 셈이었다.
“그런데, 현무는 괜찮다고 하던가? 서열식에서 부상이 너무 커서 지금 기사단 활동이 멈춘 상태라고 하던데.”
“클라크 경도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셨다고 하더군. 어휴, 백호가 제대로 벼르고 있었나 봐.”
“같은 펜첼끼리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여론은 백호에 대한 좋지 못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백호가 원래 흉폭한 걸로 소문이 나 있긴 했지만, 이번 일은 정말 너무한 것 같아.”
“듣기로는 시리우스 경이 클라크 경을 아주 죽여버리려고 했다던데.”
“흑지에서 못된 버릇을 배워온 건가…… 큼…….”
“쉿! 입조심 하게.”
펜첼의 시종들과 호위기사들이 눈치를 보며 백호 기사단의 뒷담화를 잇던 와중이었다.
쾅!
펍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백호 단원들과 더불어 앳된 얼굴의 청년 하나가 거만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방금까지 백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시종들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백호 단원들을 이미 밖에서 걸어들어오며 뒷담화를 모두 들은 상태였다.
“여기 맥주로 전부 줘.”
펍의 주인장이 굳은 얼굴로 술을 내오는 사이, 백호 단원들은 저들끼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제트, 더 먹고 싶은 거 없나? 시리우스 경께서 원하는 만큼 실컷 마시다 와도 된다고 하셨다만.”
그러자 제트가 피식 웃으며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남의 뒷담화나 하고 다니는 버러지들이나 잡아먹고 싶습니다만.”
방금까지 백호 기사단을 흉보던 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펜첼의 시종이고, 호위기사라지만, 같은 가문의 일원을 버러지라고 표현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백호 단원들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이미 뭐 펜첼인이 다 됐구만. 전장에서부터 알아봤어. 성질머리도 더럽고, 하는 짓은 난폭하고 말이야.”
누가 듣기엔 한 방 먹이는 표현이었으나, 제트는 맘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성격 좀 죽일까요? 아니면 저 버러지들 손발이나 썰어버릴까요?”
이쯤 되자 백호 단원들도 마냥 웃지는 못했다.
“일단 자중해.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흑지가 아니니까.”
하지만 모두가 이 난폭한 표현을 마냥 듣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보시오. 듣자 듣자 하니 너무한 것 같군.”
평소 펜첼의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하는 기사 하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긴 펜첼이고, 당신들도 펜첼인 아니오? 버러지라고 하는 건 참아도, 손발을 썰어버리겠단 건 엄연한 협박 아니오?”
그는 현무 단원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서, 현무 단원들이 얼마나 심한 부상을 입고 목숨이 위태로운지 보고 들은 바가 있었기에 이러한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문지기 정도 되는 자가 백호에게 찍소리도 못하는 게 맞았으나, 현재는 유진이 속한 주작 기사단의 입지가 고공행진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유진이라는 인물이 펜첼의 중심에 서고 있으니, 이제 더 이상 백호가 두렵지 않은 분위기였다.
“현무 쪽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백호 단원 하나가 혀를 쯧 차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나약한 자는 죽고, 강한 자는 살아남는 게 펜첼이자 강자존 아닌가? 언제부터 서열식이 정에 의지해서 힘을 조절해야 하는 우스운 자리가 되었지?”
따져 묻던 기사는 지지 않았다.
“정에 의지해서 힘을 조절하라는 게 아니잖소! 주작과 청룡의 대전을 못 본 모양인데, 자신들의 역량을 충분히 펼치고도 서로 큰 부상은 없었고, 승부도 갈렸소.”
“우리는 백호다. 기사단마다 신념이 있고 전투 방식이 있는 법이야. 죽고 싶지 않으면 참견하지 말고 문이나 지켜, 이 새끼야.”
“이 새끼? 하하…… 검룡이 봤다면 당신 백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텐데, 운이 좋구려.”
검룡, 유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제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너, 이름이 뭐지?”
“델쿠크요. 이름은 왜 묻습니까? 처음 보는 백호 기사께서는 이름이 제트 되십니까?”
문지기를 맡던 기사가 화를 가라앉히며 제트에게 물었으나, 제트는 제 할 말만 이어갔다.
“교지를 지키겠다고 흑지에서 몇 달이 넘게 그 고생을 했는데, 대접이 너무 푸대접 아닌가? 이것 참…….”
“옳은 말은 옳은 때에 해야 하는 법이라 배웠소.”
“어디에서 그런 걸 배웠지?”
“펜첼에서 배웠소이다.”
“음, 펜첼. 그래, 펜첼…….”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제트의 표정이 돌연 확 가라앉았다.
“펜첼의 1위 기사단인 백호를 그렇게까지 미워하는 걸 보니, 펜첼인이 아닌 것 같은데?”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담겨있지 않아, 사람이라기보다는 기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무, 무슨. 펜첼에서 근무한 세월이 십여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십여 년간 그 자리에서 문이나 지키는 개 꼴을 하고 있는 이유가 있군.”
“뭣?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
그 찰나, 제트가 손을 한 번 털자 빛줄기 하나가 스치더니, 문지기의 오른쪽 귀가 잘려나갔다.
스걱!
“아아악!”
문지기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하나, 제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히히 웃더니,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문지기의 귀를 주워들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아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어 제트가 잘린 문지기의 귀를 들어 입을 가까이 대더니, 작은 목소리로 들릴락 말락 속삭였다.
-문지기면, 문이나 지켜,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히히히!
기괴하게 웃던 제트가 이번에는 그 귀를 입속에 넣고 으적으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강자존이라는 펜첼에서 문지기 따위가 그렇게 대들면 쓰나. 문제 될 건 없겠지? 델쿠크?”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