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지크의 알에서 붉은색의 기운과 더불어 불꽃이 일렁이며 솟아올랐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그 알이 제 본체이고, 그 알이 부화해야 수호룡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요……?」
‘다 생각이 있어.’
유진은 지크의 말을 무시하고 알의 화기(火氣)를 잔뜩 뽑아냈다.
화기는 화룡검으로, 그리고 유진의 손과 팔을 타고 올라가더니 이윽고 그의 단전에 자리 잡은 아톰으로 쭉쭉 뻗어 들어갔다.
그 기운이 얼마나 뜨겁고 매서운지 멀쩡하던 유진의 몸에서 연기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그의 옷을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화룡의 정화를 내 몸에 담아야 해. 그래야 묵광 6성을 깨달을 수 있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앞서 추측한 대로 유진에게는 강렬한 확신이 있었다.
몸이 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본능에 이끌리는 대로 불을 머금으면 될 터였다.
하지만.
우우웅!
아톰은 화기를 머금음에 따라 맹렬히 돌아가다 말고, 갑자기 회전을 멈추더니 기운을 거부했다.
“후우, 후우…… 뭐지?”
유진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옷을 벗어 던지고 화룡의 알을 응시했다.
분명 방금 유진이 굉장히 많은 양의 화기를 빼앗아 왔음에도 화룡의 알의 온도나 열기는 변함이 없었다.
‘지크, 네 알의 열기를 내 몸에 흡수하려고 하는데, 그냥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어려운 건가? 몇천 년을 거치면서 지식을 쌓아 왔으니 이 정도는 알겠지?’
「알긴 아는데…… 제 열기를 보존해주실 의향은 있으신 거죠? 막, 일회용 보온팩처럼 다 쓰고 필요 없어지면 버릴 거 아니죠?」
체첸이 옆에서 한마디 하고 싶어서 부들거리는 게 느껴졌으나 유진은 무시했다.
‘안 버릴 거니까 편하게 말해, 편하게. 아는 거 다 말하면 돼.’
「이런 장면을 두고 친한 형이 삥뜯는 거라고 했던 것 같은…….」
‘체첸.’
유진이 나지막이 체첸을 부르자 화룡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보통, 오러홀이나 써클을 가진 인간이 열기를 흡수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곧바로 열기를 몸에 불어넣어 흡수하는 직접 흡수. 혹은 열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번 거쳐서 받는 통과 흡수가 있습니다. 그 외의 방법은 대체로 오래되거나 위험하여 잘 쓰이지 않죠.」
‘지금 내가 한 게 직접 흡수인 거고.’
「그렇습니다.」
옆에서 유진을 서포트하는 제 역할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던 체첸이 끼어들었다.
-아니면 이것도 있다.
‘뭔데?’
-타고난 속성.
대륙에서는 간혹 속성을 타고나는 몸이 있었다.
이들은 열화지체, 한령지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한 가지 속성에 특화되어 뛰어난 성취를 이루는 대신, 다른 속성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 체첸은 유진이 어떠한 속성에 특화된 대신 화속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아닌가? 하는 말이었다.
물론 유진은 여태까지 마법이나 화룡검 등 아티팩트를 통해 속성과 관련된 기술을 펼쳤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어쨌든 체첸과 지크는 유진이 화기를 흡수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했다.
‘좋아, 둘 다 도움 많이 됐다. 잘했어.’
-흐흐, 역시 너의 서포터로는 이 체첸님만 한 존재가 없…….
「속성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더 자세히 할 수 있죠. 속성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제가 가진 화속성의 경우…….」
-내 자리 넘보지 마라! 이 잡룡 놈아!!
유진이 둘을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기의 흡수는 천천히 알아봐야겠어. 하고 싶다고 한 번에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 * *
흑지의 전사의 요람, 매캐한 연기가 가득한 방 안.
그곳에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는 불칸과 스산한 기운을 흘리는 흑색의 마법사, 흑탑주가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둘의 옆에는 각각 호위병이 서 있다.
“준비는 잘 되고 있소? 제이드 말이야.”
불칸과 흑탑주는 한 가지 모략을 함께 짜고 있었다. 제이드를 북부로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흑탑주가 얇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대 전사의 요람에서 내준 실험체 덕분에 준비야 아주 잘 되어가고 있지요. 시간이 문제일 뿐.”
호언장담이었으나, 불칸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혹여나 말하는데, ‘그자’는 우리도 겨우겨우 잡아들였으니 조심하시오. 만약 세뇌가 풀리기라도 하면 내가 직접 나서도 어려울 터이니.”
“이미 정신이 오염되어 반절은 시체입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래, 확실하게 하라고. 두 번 일하지 않게.”
묘하게 반존대를 섞으며 명령조로 말하는 불칸의 말투에 흑탑주가 입꼬리를 기묘하게 말아 올렸다.
“분명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것을 얻기로 약속했는데…… 왠지 모르게 우리는 평등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하.”
“그게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이냐고요?”
까드드득!
흑탑주가 갑자기 왼손을 들어 올리자.
“끄허어어어업!”
그의 옆에서 호위를 맡던 상급 마법사가 피를 왈칵 토하며 제 가슴을 부여잡더니,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흑탑주의 왼손에는…….
상급 마법사의 펄떡거리는 심장이 올려져 있었다.
흑탑주는 그 심장을 게걸스럽게 뜯어먹기 시작했다.
보란 듯이.
“……지금 뭐 하는 거요, 흑탑주?”
불칸이 인상을 조금 구기며 파이프를 잠시 내려놓았다. 그조차도 이런 광경에는 익숙지 않은 듯, 경계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보여드리는 거지요?”
“……뭘 말이오.”
“흑탑주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흑탑주는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며 나머지 심장을 다 씹어먹고는, 입안에 남은 심장 조각 하나마저 꿀꺽 삼켰다.
“저의 호위병이 죽었네요?”
“그래…… 도대체 뭘 보여주려는 건지 모르겠-”
흑탑주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크허어어업!”
심장이 뜯겨 나가 왼쪽 가슴이 텅 비어버린 상급 마법사가 거짓말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러더니 심장이 다시 스멀스멀 생겨났다.
“……!”
불칸도, 그의 옆에 있던 전사도 그 광경을 생생히 목격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왼손은 죽음, 오른손은 삶.”
흑탑주의 의지에 따라 ‘그자’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말이었다.
불칸도 감당하기 어려운 ‘그자’의 생살여탈권이 흑탑주에 있다는 의미였으니, 그가 가진 힘의 수준이 단적으로 엿보였다.
흑탑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혹여나 말하는데, ‘그자’는 제가 잘 관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란 말을 하고 싶었네요?”
불칸이 도끼와 같은 묵직함을 지녔다면, 흑탑주는 칼로 만들어진 실처럼 오싹함을 풍기는 자였다.
불칸마저도 잠시 긴장케 하는 존재가 흑탑주였다.
“흐, 성질은 여전하시군, 흑탑주.”
“저처럼 온화한 사람 또 없는데요? 어디, 어디 있나? 으응? 내 눈엔 안 보이네요!”
“사과하겠소. 내가 잠시 무례했네.”
흑탑주는 그제야 ‘진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전사의 요람은 상황이 어떻지요?”
불칸이 아직 가시지 않은 긴장감을 애써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교지에 숨어든 세작들이 수백 명을 넘어섰고, 흑탑에서 제공한 스크롤도 모두 가지고 들어간 상태요. 신호만 주면 교지의 절반은 날아가 버릴 거고.”
“저는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불칸을 믿으니까요?”
“그래…… 믿어도 좋소.”
묘하게 거슬리는 말투를 무시한 불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앞에서 가족들이 폭탄이 된다니. 흑탑주는 언제나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많다니까.”
“효효효효!”
흑탑주는 정말 즐거울 때만 내는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직접 그 광경을 모두 내 눈에 담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아쉬운지 아시나요?”
* * *
다음 날.
유진이 화룡알에 담긴 화기에 대한 연구를 한창 하던 중,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단장님의 주작 검술을 알고 싶습니다……!”
엘도라의 목소리였다.
유진의 바로 옆방이 릴리안의 방이었으니, 엘도라가 부르는 단장님은 바로 릴리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진이 히죽 웃었다.
‘잠깐 동기들한테 신경을 못 썼는데, 알아서 잘 크고 있네.’
들어보니 어제는 저들끼리 아침 일찍부터 조깅했다고 하던데, 지금은 릴리안에게 찾아가 배움까지 구하고 있었으니 뿌듯할 수밖에.
‘어머니의 주작검술, 음, 확실히 엘도라한테 유용하긴 하겠네.’
오러를 가지게 되면 사실상 전투력에 있어서 성별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
근력과 같은 신체 능력의 차이가 오러로 인해 완전히 보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 구조상 어떠한 검술이나 기술은, 남자가 익힐 때와 여자가 익힐 때 효율의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여자의 몸은 적당한 열기를 머금을 때 건강하고, 반대로 남자의 몸은 냉기를 지닐 때 효율이 좋으니까.’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통찰은 잘 들어맞았다.
그리고 주작 검술 중 ‘홍익(紅翼)’과 같은 기술은 특히 여자에게 조금 더 알맞은 검술이라 볼 수 있었다.
비록 약간의 효율 차이겠지만, 엘도라는 그 조금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릴리안을 찾았을 터.
‘그 간극이 결국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거다. 잘하고 있어, 엘도라.’
엘도라의 말에 릴리안은 당황스러운 듯 되물었다.
“으응? 엘도라, 여긴 어쩐 일로.”
“릴리안 단장님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주작검술을? 하지만 이미 수준급이던데? 서열식에서도 부족한 면은 별로 안 보였어.”
“아닙니다. 제가 스스로 느끼는바…… 홍익이라면…….”
사실, 릴리안 또한 자신이 주작검술을 익히며 만들어낸 고유한 기술들이 후대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주작검술의 비기인 삼염참은 체격이 타고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발동할 때마다 큰 부담을 주기에 릴리안이 따로 만든 기술이 존재했다.
그것이 바로 홍익이었다.
이 기술은 삼염참의 폭발하는 성질을 내부에서 발현시켜 오러를 더 빠르고 파괴적으로 만든다.
그러면서도 위험도는 낮았기에 어찌 보면 사기적인 기술이 아닌가, 싶지만.
“홍익은 배우기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서열식도 앞두고 있는데, 무리하면 안 되지 않을까?”
“그렇기에 더 홍익을 배워야 해요……!”
홍익이라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간단했다.
기술을 펼치며 시전자의 몸에서 붉은 오러가 연기처럼 나오는데, 그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면 이 연기가 마치 날개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릴리안의 말대로 무수한 훈련을 통하여 세밀한 오러 조절이 필요했다. 고난도란 말이었다.
-홍익이라, 유진, 너는 이미 신체의 그릇이 다르니 홍익이 필요 없겠지만, 엘도라는 조금 다르겠군.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체첸의 말대로 유진은 이미 타고난 신체이기에 필요하지 않은 기술이지만 엘도라에게는 매우 유용할 터였다.
릴리안이 예전 시리우스를 한 번에 제압했던 것도 홍익을 익힐 정도로 신체가 단련되었기에 가능한 바였다.
물론 단점이 있다면, 효력이 매우 강한 만큼 체력과 오러의 소모가 매우 크기에 쉽게 지칠 수 있었다.
단기전에서만큼은 시리우스도, 클라크도 릴리안을 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홍익, 저도 들어봤습니다. 특히 마지막 오의인 ‘주작의 숨’이 가장 특별한 기술로 알고 있어요.」
‘맞아. 어머니의 필살기라고 볼 수 있지.’
주작의 숨은 다수를 상대로 펼치기 좋은 범위 공격 기술이었다.
“꼭, 배우고 싶습니다, 릴리안 단장님.”
“일단 난 지금 단장이 아니고, 하아, 이게…… 맞는 건지.”
엘도라의 흔들림 없는 눈을 보면서 릴리안은 문득 옛적의 자신을 떠올렸다.
‘펜첼에 있으면서 모질게 무시당한 적도 있었고, 시리우스와 클라크 오빠보다 실력이 낮았던 적도 있었지.’
하지만.
‘배우고, 익히고,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단장을 맡아 주작을 맨 위로 올려놓을 수 있었어…….’
“좋아.”
“저, 정말이요?”
“그 대신 하나만 묻자. 넌 이 기술을 익혀서 뭘 할 거니?”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