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스스스!
시리우스가 오러를 뿜어낸다.
유진이 제 발치에 닿은 시리우스의 오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달라.’
유진보다도 통찰력과 감각이 뛰어난 지크가 있었지만, 굳이 녀석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리우스의 오러는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화아악!
그에 유진도 망설임 없이 오러를 꺼내놓았다.
순식간에 연무장 내부가 두 기사의 황금빛 오러로 잔뜩 물들며, 관중석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오러 방벽을 거칠게 두들겼다.
유진의 오러와 시리우스의 오러가 맞닿으며 진한 떨림이 울린다.
보통은 한 오러가 상대편의 오러를 밀어내면서 기세의 우위가 눈에 바로 보이거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과연! 유진 공자가 꿀릴 게 없다니까! 흐하하! 궁귀, 보이나? 우리 공자가 어느새 펜첼의 정상을 바라보고 있잖나!”
“금검, 자네가 열심히 업어 키운 덕분 아니겠나? 투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왜 그래, 둘이?”
웬일인지 금검이 궁귀와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자 투귀가 미심쩍게 쳐다본다.
이어, 전대 백호 단주와 주작 단주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유진과 시리우스를 응시한다.
“백호의 이빨이 주작의 날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면 얼마나 재밌을까? 그 꺼져가는 눈동자가, 시들어가는 불꽃이…… 클클…….”
주작의 전대 단주, 달탄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카리말스’를 흘겨보았다.
“아직도 혼자 중얼거리는 버릇을 못 고쳤나? 에이, 기분 나빠.”
“자네도 내심 바라고 있지 않나? 자신이 아끼는 것이 무참하게 망가져 버리는 일을 말이야. 그때, 그 표현할 수 없는 희열과 쾌락을, 정녕 바라고 있지 않나?”
“미친 노인네가 무슨 변태 같은 말을 지껄이는 거야! 바뀐 게 하나도 없네?”
“클클클…… 깨달음을 얻기란 쉽지 않긴 하지…….”
“으으, 기분 더러워.”
카리말스가 무언가에 취한 듯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사이, 달탄은 관중석 한편에 있는 릴리안을 보았다.
리처드와 함께 있는 모습.
‘녀석, 그래도 잘 살고 있구나.’
그는 자신이 직접 릴리안에게 단장 자리를 넘겼었다.
그런데 돌연 그녀가 단장직을 내려놓고 펜첼을 떠난다기에 처음에는 배신감을 느꼈으나, 그건 오래전 일이었다.
‘부디, 주작이 승리하여 다시 위명을 되찾았으면 좋겠군. 릴리안, 너의 아들이 일군 결과가 훌륭하면 좋겠어.’
채앵!
유진과 시리우스의 칼날이 맞부딪혔다.
아직까지는 탐색전이었다.
까가가각…….
쿠란의 검과 시리우스의 검이 마찰음을 냈다.
얼굴이 닿을 듯 가까운 위치, 시리우스가 말을 건넸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대답하지 않는다.
유진은 검을 크게 밀어 뒤로 물러난 뒤, 다시 서로에게 쇄도했다.
카앙!
시리우스의 검이 오러를 머금고 허공을 가를 때마다 유진은 제 몸에 오러를 계속해서 둘러야 했다.
그는 묘하게 방어적인 태세였는데, 시리우스의 말대로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시리우스가 마법 스크롤 폭탄 테러를 종용했을까? 정말 제트와 합작한 걸까?’
서열식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교지 곳곳에 퍼져있을 전표 때문에 싸움에 유진은 집중이 되질 않았다.
‘가주가 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시리우스지만, 아무리 그래도 테러로 인해 잿더미만 남은 펜첼을 원할까?’
그렇다면?
‘시리우스 또한 제트에게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
까아앙!
유진은 정신을 딴 데다 빼놓고 싸우는 주제에 시리우스의 공격은 하나도 허용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으실까, 조카님께서.”
그럼에도 시리우스가 히죽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와 싸우는 데 집중하지 않는 것이냐!!’하며 무작정 화를 냈을 터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물론 이마저도 대답하지 않는다.
‘애초에 흑지가 시리우스와 무슨 계약을 했든 온전하게 계약이 이루어진다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흑지는 누구보다 의심이 많으니까.’
하여 제2, 제3의 음모를 준비했을 거고…….
‘그게 폭탄 테러야.’
시리우스의 짙은 오러가 담긴 검이 유진의 머리통을 쪼개려 달려들었다.
유진은 번쩍 정신을 차리며 검을 위로 올려쳤다.
쿵!
“……!”
굉장히 놀랐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손이 얼얼할 만큼 강력한 공격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잡생각 정도는 하면서 상대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는데, 시리우스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쿠구구구……!
곧이어 시리우스의 주위로 연무장의 바닥이 산산이 깨어진다. 그의 입꼬리가 크게 말려 올라갔다.
“우리 조카께서도 당황이란 걸 할 줄 아는 모양이었구나.”
“의외네요. 순 병신으로 봤는데.”
“전투 와중에 상대를 무시하는 습관은 여전하구나. 과연 그게 네 그 고운 모가지를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다 끝났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시죠.”
“뭐가 거의 다 끝났다는 거냐?”
“잡생각이요.”
유진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시리우스는 폭탄 테러를 이끌지 않았다. 설령 놈이 테러 사실을 알게 되면, 오히려 테러를 막으면서 가문의 영웅 행세를 할 거야.’
길었던 잡념과 걱정을 떨쳐낸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건 오로지 시리우스를 전투 불능의 상태로 제압하는 것뿐이다.
명경지수의 마음이 유진의 머릿속을 고요히 잠재운다.
폭탄 테러에 대한 근심도, 귓가를 두들기던 관중들의 소리도 순식간에 멀어진다.
팟…….
연무장 안이 하얗게 물들어 보였다.
유진의 눈에는 오로지 시리우스만 남았다.
유진의 초점이 시리우스의 안면 위로 맺히자, 그가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검을 집어던지고 못 보던 검을 뽑았다.
캉, 까강.
“이제 좀 제대로 싸울 마음이 생겼나?”
그가 꺼낸 검의 이름은, 귀흑아(鬼黑牙).
유진은 그것을 알아보았다.
귀흑아는 바로 흑지에서만 나온다는 흑호의 어금니를 갈아 만든 검.
백호 기사단의 단장치고 백호가 아닌 흑호를 재료로 한 무기를 쓰다니, 맥락이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물론 유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완전히 흑지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볼 수 있겠지. 흑호의 기운은 백호의 정반대인데, 그 힘을 받아들였다는 거니까.’
귀흑아의 손잡이는 흑색이지만, 이빨을 갈아 만든 검인 만큼 검신은 흑색 아닌 백의 색을 띠었다.
여기서 유진은 한 가지를 더 추측했다.
‘어쩌면 귀흑아에 백호의 기운을 섞어서 더 강력한 힘을 얻으려는 걸 수도 있겠어.’
더 강력한 힘이라면?
시리우스가 그 답을 보여주었다.
그의 검신을 따라 흑색의 기운과 백색의 기운이 줄기를 뻗으며 휘감기기 시작했다.
정말 흑호의 기운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유진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시리우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그런데.
스스스……!
시리우스가 서 있던 곳에 잔상이 수십 개 맺히더니, 어느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보는 게냐? 난 여기에 있는데.”
뒤쪽이었다.
유진은 소름이 쫘아악 돋는 걸 무시하며 재빨리 몸을 굴렀다. 반격하는 것보다 피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하나.
착지한 그곳에도 시리우스가 있었다.
“이 정도면 네가 즐거울 만할까?”
불쾌한 저음의 음성이 유진의 귓가를 자꾸 따라온다.
그러면서 공격은 또 하지 않는다.
농락이었다.
유진이 얼굴을 크게 찌푸리며 허공에서 떠다니는 시리우스의 잔상을 응시했다.
‘이 정도 수준은 8성에서 나올 수가 없다. 적어도 9성, 아니면 10성의 언저리다. 내 기감에 아예 걸리지 않는 수준이라면 이 싸움은 애초에 질 싸움이야.’
처음 느껴보는 답답함이었다.
유진은 시리우스와 재회했을 때부터 놈이 눈에 띄게 여유로워졌다는 건 알아챘지만, 이 정도였다니?
내 기감의 수준이 부족한 건가?
유진이 감각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시리우스의 위치를 가늠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하! 마치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 같구나! 귀여워!”
시리우스는 여전히 유진의 망막에 수십 개의 잔상만을 남기고 실체는 드러내지 않았다.
이쯤 되니 답답함을 넘어서서 두려움이 일었다.
‘분명 연무장 안에 있는데,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아. 도대체……!’
이때, 유진은 불에 덴 듯 직감했다.
‘그런데…… 왜 공격하지 않지?’
쉽게 말해 시리우스는 주둥이만 나불대고 있었다.
단순히 스산한 음성을 흘린 것만으로도 유진의 정신은 어지러워졌고, 명경지수의 마음을 잃었다.
모든 싸움이 그렇듯, 냉정과 이성을 잃으면 지게 되어있다. 더군다나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머금으면 그 싸움에서 승산은 더더욱 없다.
어쩌면.
‘시리우스는 이 점을 노린 게 아닐까?’
그렇다면 시리우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유진이 문득 중앙 연무장 천장에 달려 환하게 빛나고 있는 수십 개의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하얀색의 빛.
백호의 아우라가 연상된다.
‘빛이 있다면, 어둠이 있다.’
그 법칙처럼 백호와 흑호는 정반대의 상성을 가졌고, 시리우스는 흑호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잠깐, 시리우스가 흑호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그 말은, 시리우스는 어둠이자…….
‘그림자.’
유진의 시선이 제 발아래를 향했다.
수십 개의 전등이 있는 만큼, 유진의 발치에서부터 흩어진 수십 개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사이에 좀 재밌어졌군, 이 양반.’
촤아악!
시리우스가 그림자 속에 숨어있다는 것을 눈치챈 유진이 제 머리 위를 향해 화룡검을 내질렀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염이 전등과 유진 사이를 한가득 메꾸며, 선명하게 고정되어 있던 유진의 그림자들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아니나 다를까.
그와 동시에 시리우스가 유진의 앞에 나타났다.
시리우스의 작전이 파훼된 것이었다.
“……하하, 역시, 기대 이상이군.”
말은 사뭇 여유롭게 했지만, 이는 블러핑이었다.
「저 양반, 표정이 굳었습니다. 생각보다 계약자님이 당황하지 않아서 외려 저놈이 당황한 것 같아요!」
이는 물론 유진도 눈치챈 바였다.
“재밌었습니다. 솔직히 좀 놀랄뻔했어요.”
여기서 유진은 한 단계를 더 생각했다.
귀흑아를 착용한 효과는 회귀자인 유진조차도 자세히 알지 못했으나.
방금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귀흑아는 기척을 감추는 데에 특화되어 있으며, 그림자를 가지고 장난도 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한데, 시리우스가 과연 단순히 유진의 평정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귀흑아의 능력을 노출한 것일까?
“이제 재밌는 시간은 끝났으니, 내게 성의를 보여다오.”
시리우스가 귀흑아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내 몸속에 쓸데없는 걸 넣어 놨으면서, 뻔뻔하네요. 가만 보면 연기가 느셨어? 아주.”
‘체첸.’
-어디 보자…….
어느샌가 유진의 지시를 받은 체첸이 그의 단전에 파고들어 검은 덩어리 하나를 앞니 두 개로 물고 질질 끌어냈다.
-이 저주는 오랜만에 접해보는군. 감히 체첸님 앞에서 이따위 하찮은 수작을 부리다니.
시리우스가 유진의 그림자 속에 녹아든 사이 그의 몸에 오러 봉인 저주를 집어넣은 것이었다.
뇸뇸뇸!
체첸은 그 저주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어버렸다.
물론, 체첸은 시리우스의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가 보기엔 유진이 스스로 저주를 빼내 없애버린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시리우스의 표정에 오랜만에 균열이 일었다.
재능 독식자의 회귀는 특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