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첫 번째는 망명입니다.”
외국으로 도망가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선택지였다.
“원하는 국가, 지역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출신부터 직업까지 위조해드릴 거고요.”
얼마나 많은 돈을 주었기에 이러한 일들이 가능한 것일까? 카단은 헛웃음을 삼키며 계속 말해보라는 듯 손짓했다.
“두 번째는 이곳 리베라 왕국에서 지내는 선택지입니다.”
샬로트 잉그마르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다른 인물이 되어 왕국에서 살아가는 것.
“이 역시 신분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위조해드릴 것입니다.”
잭 카터가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다만, 어느 선택지를 고르시던 귀족의 삶은 포기하셔야 합니다. 작위까지 위조하면 저희도 위험해지니까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불법으로 귀족의 지위를 사게 된다면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커질 테니까.
“작위 같은 건 욕심이 없습니다.”
전생에서도 밑바닥 인생을 살았기에 오히려 귀족의 삶보단 평범하게 사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귀족처럼 살아본 적도 없고.
“두 선택지가 끝입니까?”
“세 번째는 포기입니다.”
“포기?”
“샬로트 님이 주신 의뢰금, 계약금을 모두 돌려받으시고, 이 의뢰를 없던 일로 하는 거죠.”
망명과 위조, 앞으로 미래를 계획하기 위한 금액이라면 분명 상당할 것이다.
‘당장 돈이 필요하진 않아.’
카단은 반지를 슬쩍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샬로트가 물려준 유산은 모두 반지 속에 담겨 있었다.
반지 속에 있는 돈만으로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흠.”
골치가 아팠는지 카단은 바 테이블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
“아직 성년이 아니시라 들었으니, 술은 안 되겠죠?”
달그락.
“이거라도 좀 드시죠. 시간은 많으니까요.”
잭 카터는 테이블 위로 얼음이 담긴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올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카단은 고개만 살짝 끄덕인 뒤 다시 고민을 이어갔다.
‘힘을 키워야 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당장 샬로트의 복수를 계획할 수도 실행할 수도 없었다.
홀로 왕국을 상대하는 일.
감정에 휘말려 섣부른 판단을 했다간 복수하기도 전에 모든 계획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지금 내 수준은 형편없어.’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봤다.
다수의 해골을 일으켜도 부담이 없었고, 샬로트는 이를 ‘재능’이라 표현했다.
사상 최강의 네크로맨서였던 샬로트도 카단이 지닌 네크로맨서의 재능만큼은 인정했었다.
‘다만 배움이 부족하다.’
10년간 그가 이룬 경지는 고작 2성.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샬로트는 기초만을 강요했고, 카단은 그런 아버지를 믿고 따랐다.
‘기초가 중요한 건 알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가 않아.’
해골 외에 다른 언데드를 일으킬 수도 없었고,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마법들도 이론만 알고 있는 상태.
‘이론이라도 배웠으니 다행이지.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샬로트는 이런 날을 예상했던 것일까?
언젠가부터 카단이 혼자서도 성장할 수 있도록 네크로맨서의 이론을 미친 듯이 알려주었다.
‘굳이 망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어차피 신분을 위조한다면 정체를 들킬 일은 없어.’
필요한 건 돈이나 지원군이 아닌 성장할 시간과 강해질 기회.
안전만 확보된다면 리베라 왕국에 남는 것도 가능했다.
‘리베라 왕국에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무언가 질문이 떠올랐는지, 카단이 잭 카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제 정체를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는지 아십니까?”
“샬로트 님께서 말씀하시길, 당신의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은 저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제 정보를 도둑 길드에 넘겼다거나, 타인에게 알려준 적이 있습니까?”
카단이 차가운 눈빛으로 질문하자, 잭 카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길드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당신의 존재를 발설한 적이 없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죠? 아버지와 관련된 정보, 그것도 제 정보라면 값이 꽤 나갈 텐데.”
샬로트에게 자식이 있다는 정보만 팔아도 잭 카터는 부와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카단의 존재를 숨겨준 걸까?
“그야, 샬로트 님과 계약이 되어있으니까요. 저주가 걸린 계약이라서 저도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습니다.”
저주 때문에 카단과 샬로트에 관한 정보를 발설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의심을 지우긴 일렀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비록 샬로트가 소개해준 사람이라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게 좋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건 전생만으로도 충분해.’
최소한의 의심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
“보시다시피.”
잭 카터는 카단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팔목을 들어 보였다.
‘저건 잉그마르 가문의….’
그의 팔목에는 잉그마르 가문을 대표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용맹한 늑대의 문양.
“이렇게 잉그마르 가문의 낙인이 찍혀있죠?”
샬로트가 죽었지만, 그 낙인은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늑대 문양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은 분명 샬로트의 것이었다.
“그 계약이 자제분께 양도된다고 들었습니다. 즉, 저는 평생 당신을 배신할 수 없다는 거죠.”
잭 카터가 쓴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런데도 카단은 쉽게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그 순간.
슉!
테이블 바 건너편에 있던 잭 카터가 어디선가 단검을 뽑아 카단을 향해 휘둘렀다.
‘미친?’
정신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간발의 차이로 단검을 피해 냈고.
우웅.
눈앞을 지나가는 단검을 보며 카단은 재빨리 마나를 활성화해 전투를 준비했다.
“자, 보시죠.”
잭 카터는 공격을 이어가는 게 아닌, 단검을 내려놓고 낙인이 새겨진 손목을 보여주었다.
‘피?’
팔목에 새겨진 잉그마르의 문양에서부터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움켜쥐기라도 한 듯 손목이 조금씩 비틀리기까지 했다.
“갑작스레 죄송합니다. 이렇게 보여드리는 게 확실할 테니까요.”
이제 안심하시겠습니까? 고통 속에 인상을 찌푸린 잭 카터가 말했다.
저주. 확실한 네크로맨서의 저주였다.
“또한, 제 선택으로 인하여 당신이 목숨이 위험해진다면 이렇게 저주가 발동됩니다. 행동은 물론 말 역시.”
눈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미간이 좁혀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이제 이 저주 좀 멈춰주시겠습니까? 이게 꽤 아파서.”
계약을 어겨 생겨난 저주는 오로지 상대방의 허락이 있어야만 멈춰질 수 있었다.
물론, 카단은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참, 나이 먹고 이러려니 부끄럽네.”
잭 카터는 카단을 향해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
그러자 카단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이내 잭 카터의 손목에 생겨났던 손자국이 사라지며 흐르던 피 역시 멈춰졌다.
“아, 이제 살 것 같네요.”
통증이 사라지자, 잭 카터가 다시 눈웃음 지으며 자신의 팔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이 저주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유효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전 죽을 때까지 당신을 위협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카단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아버지께 뭘 받으셨기에 그런 저주까지 걸리면서까지 의뢰를 받아주신 겁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봐서일까? 카단은 몸을 추스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시 찾아온 침묵.
카단은 슬쩍 잭 카터를 바라본 뒤, 다시 고민을 이어갔다.
‘외국까지 갈 필요는 없다.’
왕국의 수호자인 ‘가디언’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나 다름없는 목표.
타국에서 조용히 힘을 키워오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망명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강해지기만 해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과연 가디언을 상대하려면 어느 정도 강해져야 할 것이고, 그들을 따로 만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순간, 카단의 머릿속으로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카단. 당분간 혼자 훈련해야겠구나.
-아버지. 또 전쟁터에 가십니까?
-영웅 아카데미에서 특강을 부탁하더구나. 뭐, 일주일이면 된다니 빨리 다녀오마.
카단의 양아버지 샬로트는 왕국의 가디언으로서 전쟁이나 몬스터 토벌 외에도 하는 일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인재 육성.
영웅 아카데미는 마족을 막아 낼 새로운 영웅을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7인의 영웅, 가디언들이 직접 관리하는 곳이자, 왕국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아카데미.
네크로맨서라는 직업 덕분에 샬로트는 가끔 특강만을 나가곤 했었다.
‘때론 가디언이 직접 가르치기도 한다던데….’
무언가 떠올랐는지, 카단이 다시 고개를 들어 잭 카터에게 물었다.
“혹시 영웅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을까요?”
“네? 영웅 아카데미 말씀입니까? 차기 가디언을 육성한다는 그곳이요?”
“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했는지, 잭 카터가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음, 가능은 합니다. 노예만 아니라면 누구든 입학 신청은 할 수 있으니까요. 마침 신청 기간이기도 합니다.”
카단의 눈치를 보던 잭 카터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샬로트 님의 자제분이시니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지니셨겠지만, 영웅 아카데미는 만만하게 볼 곳이 아닙니다.”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지닌 이들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
국왕조차 원하는 이를 마음대로 입학시킬 수 없는 곳이 영웅 아카데미였다.
“차라리 마탑에 들어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영웅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영웅이 되시고 싶으신 거라면 제가 다른 방법을….”
“입학 서류를 넣어주실 수 있다는 거죠?”
잭 카터가 설득하려 했지만, 카단은 그의 말을 잘라내며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자 잭 카터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네. 서류를 넣는 건 가능합니다만, 이후에는 혼자 힘으로 해내셔야 합니다.”
카단은 걱정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걸로 할게요.”
“네? 뭘요?”
“제 미래를 선택하라면서요?”
“아카데미는 보기에 없었는데?”
잭 카터가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확고하네. 아주 확고해.’
카단의 눈빛을 본 잭 카터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뭐, 좋습니다. 리베라 왕국에 남아 아카데미에 다니시겠다는 거죠?”
“네.”
“우선 새로운 신분을 만들 때까지 시간이 걸리니 며칠 뒤에 다시 찾아오세요.”
잭 카터는 체념한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끝냈다.
“그럼 다음에 오겠습니다.”
“혹시 성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카단이 주점을 빠져나가려 하자, 잭 카터가 그를 붙잡으며 물었다.
“물론, 신분을 위조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이름을 그대로 쓰실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것도 아니니.”
“카단. 카단으로 하겠습니다.”
카단은 그렇게 주점을 빠져나갔고, 잭 카터는 그가 빠져나간 문을 바라봤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네. 막무가내인 게 아주 똑같아.”
***
며칠 후. 카단이 다시 주점 ‘고양이들의 저녁’을 찾았다.
“새로운 신분증입니다.”
잭 카터가 바 테이블 위로 양피지 한 장을 올렸다.
“출신 지역은 테누스. 평범한 상인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가족은 5년 전 외국으로 상행을 나갔다 모두 죽었다. 라고 설정해놨습니다.”
카단은 잭 카터의 설명을 들으며 신분증을 펼쳐보았다.
“신분을 위조하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습니까?”
“작위를 건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왕국에 신분 없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새로 등록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죠.”
“그렇군요.”
“카단 님도 신분 등록이 되어있지 않으실 텐데?”
샬로트는 카단을 양자로 받아들였음에도 그의 신분을 등록하지도, 족보에도 올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 상황까지 생각하고 계셨던 걸까?’
덕분에 지금까지 정체가 알려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카단 님 같은 경우는 신분을 만드는 게 더 쉬웠죠. 지워야 할 정보들이 없었으니까요.”
잭 카터는 뿌듯하다는 듯 어깨를 쫙 펴며 말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카단은 양피지를 다시 정리한 뒤, 안 주머니로 집어넣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입학 서류까지 신청된 건가요?”
“네. 신분 등록 후 곧바로 서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능하시겠습니까?”
“네. 안되면 어쩔 수 없죠. 미래 계획이야 새로 설계하면 그만이잖아요.”
“그 계획 저랑 하시면 추가 금액이 발생하실 수도 있는데?”
잭 카터의 말에 카단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로 그 많은 의뢰금을 다 쓰진 않으셨을 텐데?”
“그, 그건 그렇죠?”
잭 카터는 자신이 말린다는 생각에 전보다 강하게 눈웃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흠! 좋습니다. 그럼 입학시험을 준비하실 생각인가요?”
“네. 그런데 입학시험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카단의 질문에 잭 카터는 헛웃음을 삼켰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작정 입학 신청한 거였어? 아무리 막무가내라지만….’
잭 카터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질문에 답했다.
“1차 시험은 간단합니다. 재능과 실력. 그리고 잠재력을 보여줘야 하는 시험이죠.”
“어떤 식으로요?”
“시험장 안에서 지닌 능력을 보여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검술이면 검술, 마법이면 마법. 뭐, 필요하면 대련자를 요구해도 좋고요.”
카단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잭 카터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가려 했다.
“그리고 2차 시험은….”
“우선 1차부터 합격해야겠네요.”
2차 시험에 관한 정보는 합격한 후에 듣겠다는 듯 카단이 웃으며 말을 잘라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잭 카터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차 시험 장소는 수도인가요?”
“아뇨. 각 도시에서 1차 시험을 치를 수 있습니다. 합격자들만 수도로 넘어가고요.”
“그렇군요.”
카단은 잠깐 무언가 생각하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어디 가십니까?”
“시체 구하러요.”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갔고, 홀로 남게 된 잭 카터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휴.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