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이 라이덴 님께서 친히 제안하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옷차림과 자세. 거만한 말투와 표정만 보더라도 그가 귀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뻔뻔한 제안도 오랜만이네.’
깡패로 살았던 전생에서나 받았던 무례한 제안을 이곳에서 받아볼 줄이야.
“내 밑으로 들어와. 2차 시험쯤은 간단하게 통과할 테니.”
제안도 제의도 아니었다.
“차기 가디언이 되실 이 몸과 함께한다는 것 역시 영광의 순간으로 여기도록.”
거만한 명령조의 말투.
어떤 확신이 있기에 이토록 거만하고 뻔뻔할 수 있을까?
금발의 남성. 라이덴도 1차 합격자인 만큼 자만심을 지닐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일 것이다.
다만.
‘이런 녀석이랑 어울리는 건 정신 건강에 해롭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거칠고 거만한 성격. 남을 깔보고 당연하다는 듯 하대하는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카단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지.”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제대로 들었을걸? 다른 사람을 알아보도록 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거절. 카단의 단호한 태도에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주제를 모르는 놈이군.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은데….”
“관심 없어.”
카단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잘라내자, 라이덴은 미간을 좁히며 매섭게 눈을 떴다.
“뭐?”
“누군지 알았어도 거절했을 거다. 아무튼 수고해라.”
카단은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린 뒤 걸음을 옮겼다.
팀원을 동료가 아닌 부하로 여길 사람. 귀족의 지위와 대우를 포기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과 시험을 본다면 다른 건 몰라도 정신적인 고통이 수반될 것이다.
“저 빌어먹을 평민 놈이….”
뒤에서 라이덴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다행히 따라오거나 붙잡지는 않았다.
덕분에 카단은 편안하게 강당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잠시 후.
‘이러다 탈락하는 거 아냐?’
카단은 여전히 혼자였다.
금발의 남성. ‘라이덴’이후로는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카단이 먼저 팀을 제안하더라도 받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처음엔 받아줄 것처럼 반겨주더니, 이름을 알고 나니 죄다 도망치듯 거절하네.’
카단은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시험도 못 보고 탈락하면 민망한데. 잭 카터 씨에게도 할 말이 없겠네.’
수험생들은 부족한 인원을 채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세 명이 모여 팀을 이룬 자들도 몇몇 보였다.
자칫 이러다가 두 명의 탈락자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카단의 등을 떠밀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렇게 카단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저, 저기!”
누군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작은 키의 귀엽게 생긴 남성.
그 남성은 카단과 눈을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 전 알비스라고 합니다. 혹시 성함이 카단 맞습니까?”
“네.”
알비스는 카단의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아! 혹시 아직 팀을 못 구하셨다면 저랑 같은 팀 하시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안할 거라면 눈부터 마주치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카단은 알비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그게! 죄, 죄송합니다! 제가 낯을 많이 가려서….”
표정이나 자세, 말투만 보아도 그가 소심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죄송할 것까지야.”
소심한 성격이 걸림돌이 될 수는 있겠지만, 거만한 귀족의 남성과 팀을 이루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쓰는 타입은 아닌 것 같고.’
카단은 슬쩍 알비스를 훑어봤다.
왜소하다 할 수 있는 덩치와 작은 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한 손.
확실히 무기를 다루는 사람 같지도 않았고 근접 전투에 특화된 사람 같지도 않았다.
‘1차 합격자라면 기본 이상의 실력자들일 테니, 중요한 건 성격이다.’
이내 시선을 거둔 카단은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수험생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다녔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미 팀을 완성한 사람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
‘당장 이것저것 따질 처지도 아니긴 하고.’
더 늦었다간 정말 시험도 못 치르고 탈락할 수도 있었다.
귀족 남성 같은 성격만 아니라면 누구와 팀을 이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카단은 다시 알베스를 바라봤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안은 받아들이죠. 전 카단이라고 합니다.”
툭.
막 알비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누군가가 다가와 카단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야.”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카단이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어깨 위로 올려진 손을 밀어냈다.
뒤를 돌아보니 팀을 제안했던. 아니, 부하가 되라고 명령했던 라이덴이 서 있었다.
“이 라이덴 님의 제안을 무시하더니, 결국 고른 게 이런 비리비리한 쓰레기인가?”
라이덴이 깔보는 듯한 시선으로 알비스를 훑었고, 알비스는 민망한 듯 몸을 움츠렸다.
“자살하는 법이 다양하다지만, 이건 심하잖아?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할 생각이야?”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라이덴이 한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슥.
그곳엔 라이덴의 팀원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딱 한 자리 남았다. 순순히 내 밑으로 들어와.”
아직 팀을 구하지 못한 카단에게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비록 날 무시했지만, 주제도 모르는 불쌍한 평민이니, 너그러이 용서해주지.”
“거절하지.”
그러나 이번에도 카단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자존심이 상한 라이덴의 미간이 좁혀졌다.
“고작 시체나 부리는 천한 놈 주제에 허세도 부릴 줄 아는군.”
“천한 놈이라면서 왜 집착하는지 모르겠군.”
물러서지 않고 받아치는 모습에 라이덴은 헛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네크로맨서라지만, 귀족 앞에서 뭐 이렇게 당당해? 재수 없는 놈.’
라이덴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단을 훑어봤고, 이내 체념한 듯 몸을 돌렸다.
“뭐 쓰레기들끼리 잘해보라고.”
비아냥거림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잠깐.”
카간이 그를 불러 세웠다.
“왜? 아쉬워?”
라이덴은 이미 마차는 떠났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과하고 가라.”
그러나 이어진 카단의 말에 라이덴의 미소는 순식간에 지워지고 말았다.
“허? 뭐라고?”
“난 괜찮으니, 이 사람에게는 사과해.”
카단은 손을 들어 옆에 있는 알비스를 가리켰다.
“사과? 내가 무슨 사과를 하라는 거지?”
“그것도 모른다면 그건 너의 지능 문제겠지. 아니면 교육 문제인가?”
“하? 너 미쳤냐?”
이어진 카단의 대답에 라이덴이 화가 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카단에게 다가왔다.
툭.
라이덴은 손가락을 들어 카단의 이마를 콕콕 눌러대며 말을 이었다.
“주제를 알아야지? 네가 아무리 기어올라봤자 평민 출신의 천한 네크로맨서일 뿐이야.”
평민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라이덴은 마치 카단을 가르치듯, 그리고 경고하듯 말을 이어갔다.
“다행인 줄 알아라. 여기가 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귀족을 모욕한 죄로 넌 처형당했을 테니.”
귀족의 권위를 내세워 압박하려 했지만, 카단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모습이 불쾌했는지 라이덴은 다시 한번 카단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려 했다.
툭-
그러나 이번엔 카단이 그의 손가락을 쳐냈다.
“다행인 줄 알아. 여기가 아카데미가 아니었으면 넌 내 기분을 상하게 한 죄로 해골이 되어있을 테니.”
카단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은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지만, 앞에 서 있던 라이덴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카단이 위협을 하거나 협박을 한 게 아니었다. 분명 가볍고 여유롭게 내뱉어진 말이었다.
이내 라이덴이 뒷걸음질을 치더니, 애써 웃으며 카단에게 말했다.
“만약에라도 너희 둘 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면 그때 저 쓰레기에게 사과하도록 하지.”
지금 당장은 사과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라이덴은 애써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건을 걸겠다는 건가?”
“천한 녀석들에게 해주는 귀족의 배려랄까?”
끝까지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라이덴의 태도에 카단은 피식하고 비웃었다.
“그 말 지키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정말 귀족이라면.”
카단은 마치 격려라도 하듯 라이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몸을 돌렸다.
“저 새끼가 감히….”
귀족의 몸에 서슴없이 손을 대다니. 라이덴은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당황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넌 무조건 합격해야 할 거야. 떨어지면 그때부터 네 앞에 지옥이 펼쳐질 거거든.”
라이덴은 카단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휙휙.
카단은 더 할 말이 없으니 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누가 귀족이고 누가 평민이야?’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알비스는 헛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마치 귀족과 평민이 뒤바뀐 것만 같았다.
***
“왜 그러셨어요? 사과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된 거 아닙니까?”
고작 사과받겠다고 귀족과 다툴 줄이야. 알비스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우린 오늘 처음 만났잖아요? 그런데 왜 저 때문에 그렇게까지….”
“팀이지 않습니까?”
“네?”
“팀원이 모욕당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게 팀입니까?”
급조된 팀이다. 게다가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해체될 팀.
그런 팀의 팀원을 위해 평민이 귀족에게 대항한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이었다.
‘그렇게 단순한 이유였어?’
고작 팀원이기에 한 행동이라고 대답할 줄은 몰랐다.
아카데미에 합격한다면 모를까, 만약에라도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카단은 라이덴이라는 귀족에게 평생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귀족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카단은 인간적인 대우도 못 받으며 평생 고통 속에서 살 것이다.
“잘못했으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죠. 그걸 못하는 놈이 이상한 겁니다.”
더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카단은 자신이 한 행동들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행동을 했다는 듯 평온한 모습,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가, 감사합니다.”
알비스는 자신을 위해 귀족과 싸워준 카단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당하고만 살지 마세요. 평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쓰레기 취급당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카단은 무덤덤하게 말을 전했고, 그 말은 왠지 모르게 알비스의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
귀족들이 평민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왔고, 크게 불만을 품은 적도 없다.
그저 보복이 두려워 그들의 말에 수긍하며 당장 위기를 모면하는 것만 집중했었다.
그게 평민들이고, 그게 당연한 거였으니까.
‘이 사람 평민 맞아?’
그러나 카단은 보통의 평민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하긴 이 사람도 평범한 삶을 살진 않았겠지.’
네크로맨서. 남들과 어울리기보다 홀로 살아가는 존재들.
어쩌면 카단도 ‘계급’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온 것이 아닐까?
알비스는 조금은 카단을 이해한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카데미만 졸업하면 그 어느 귀족도 저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겠죠.”
“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그런 대우까지 받습니까?”
평민이 귀족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권리를 얻게 될 줄이야.
“네. 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명성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카단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길 졸업하면 신분으로 귀찮게 굴 사람들은 없다 이거군.’
평민들에겐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겠지만, 카단은 신분 따위의 욕심은 없었다.
그저 귀찮음이 덜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합격한 뒤에 해야 할 생각들인데, 너무 앞서 생각했네.’
휙휙.
카단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잡다한 생각을 털어냈고, 이내 알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은 팀원도 마저 구하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여유 부리다간 시험 보기도 전에 탈락할 것 같은데.”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가리켰다.
팀을 구하는 것도 슬슬 끝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정말 서두르지 않으면 2명의 탈락자 자리는 카단과 알비스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네? 아! 경황이 없어서 제가 말씀을 못 드렸었네요?”
알비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카단 씨에게 제안하기 전에 이미 팀원 한 명을 구해뒀거든요!”
카단은 놀란 눈으로 알비스를 바라봤다.
‘의외로 발 빠른 사람이네?’
알비스가 다가왔을 때부터 혼자였기에 카단은 그가 당연히 아직 팀을 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었다.
“자, 다른 팀원분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 그쪽으로 가시죠!”
알비스는 카단이 놀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지 해맑게 웃으며 카단을 어디론가 안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