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생도들의 안내를 받아 합격자 대기실로 들어가자 꽤 많은 수험생이 보였다.
어림잡아 스무 명 정도.
‘시험도 거의 막바지겠군.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야?’
20명 정도의 합격자가 나올 때까지 기절해 있었다니.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 카단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려보니 팀 동료였던 알비스가 카단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역시 합격하셨군요.”
“네! 카단 씨가 안 계셔서 놀랐는데, 생도분들이 카단 씨가 기절하셔서 의무실에 가셨다고 알려주셨어요.”
카단은 살짝 미소를 지어주며 손을 내밀었고, 알비스는 해맑게 웃으며 그 손을 붙잡았다.
“그런데 칼리아 씨는?”
팀 동료였던 칼리아가 보이지 않자,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설마 칼리아는 탈락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려는 찰나.
“저쪽 구석에서 주무시고 계세요.”
알비스가 대기실 구석에 있는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그곳엔 붉은 머리칼을 말꼬리처럼 묶은 여성이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다들 지쳐 보이네.’
칼리아 뿐이 아니었다.
합격자 대기실에 있는 수험생 대다수가 지친 얼굴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시험을 준비하며 쌓였던 피로들이 긴장이 풀리며 한꺼번에 몰려온 모양이다.
“알비스 씨는 안 피곤하십니까?”
“저는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어요. 잠깐 깼는데 카단 씨가 보이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인지 알비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그나저나 카단 씨 시험은 어땠어요? 기절했다는 소릴 듣고 정말 놀랐는데.”
“뭐, 까다로웠죠. 상성이 좋지 않은 상대와 대련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카단은 짧게 시험장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베틀 메이지요? 아, 하긴 네크로맨서의 약점은 근접 전투니까….”
“알비스 씨는 어땠습니까?”
“저는 같은 마법사를 상대로 대련해야 했어요. 정말 끔찍했습니다.”
마법사의 약점 역시 근접 전투가 아니었나?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의무실에서 합격 소식을 알려주던 베틀 메이지가 떠올랐다.
‘아, 베틀 메이지가 의무실에 있어서 다른 대련 상대를 내보냈나 보군.’
카단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질 알비스의 말을 기다렸다.
“여러 속성의 마법을 자유롭게 다루시던 분이었는데, 역시 세상에 강자는 많습니다.”
알비스도 불리한 상황에서 대련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 시련을 극복하고 가디언에게 어떤 가능성을 보여줬기에 그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겠지.
“고생 많으셨네요.”
“저보다 카단 씨가 더 고생하셨던 거 같은데요?”
“뭐, 모두 비슷하겠죠. 그나저나 칼리아 씨는 어떤 시험을 봤는지 아십니까?”
다른 사람의 시험 내용도 궁금했다. 과연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여줬기에 가디언에게 인정받은 것일까?
“칼리아 씨는 오시자마자 주무셔서 길게 대화를 하진 못했어요.”
알비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고, 카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 여자도 합격했네.’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 알비스의 뒤편으로 푸른 머리칼의 여성이 보였다.
그녀 역시 피곤함을 이기지 못했는지, 의자에 앉아 잠이 들었다.
‘귀족은 잠깐 잘 때도 저렇게 자야 하는 건가?’
반듯하게 앉은 채 눈만 감고 있는 게 잠든 모습이라니.
‘좋든 싫든 많이 부딪치겠네.’
카단은 피식 웃으며 합격자들을 살펴봤다.
‘그 녀석은 안 보이는군.’
카단에게 팀원을 제안했던 금발의 남성. ‘라이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시험을 보지 않았거나, 이미 탈락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을 흘렸다.
“카단도 좀 쉬셔야 하지 않아요? 크게 다친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기절했었잖아요?”
알비스가 빈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걸음을 옮겼고, 카단은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
철컥!
대기실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금발의 남성이 대기실 안으로 유유자적하게 걸어왔다.
‘저 녀석도 합격인가?’
카단은 무뚝뚝한 얼굴로 라이덴을 바라봤다.
아직 카단과 알비스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찢어져 있었다.
합격의 기쁨은 이해하나, 히쭉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았다.
라이덴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고, 특유의 거만한 눈빛으로 합격자들을 한 명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 어?”
라이덴은 카단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카단은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웃음을 흘렸다.
히쭉거리던 라이덴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그의 얼굴엔 합격의 기쁨이 아닌 절망과 분노가 자리 잡게 되었다.
***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32명의 합격자가 대기실에 들어서게 되었다.
모든 합격자가 모이자 벨리드 교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그녀는 합격자들에게 축하와 함께 안내 사항을 전달했다.
요약하자면 입학식과 아카데미의 규칙, 그리고 기숙사 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모든 내용이 담긴 입학 안내서가 따로 있었기에 벨리드 교관에게 집중하는 합격자는 몇 없었다.
“합격자 여러분들은 이제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입니다. 그러니 아카데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입학식 전까지 사고 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벨리드 교관은 합격자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오셔서 합격 통지서와 입학 안내서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교관이 나가자, 곧바로 생도들이 합격자들의 퇴장을 도왔다.
그렇게 영웅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이 종료되었다.
“카단 씨, 칼리아 씨. 모두 어느 쪽으로 가세요? 저는 ‘렐페이라’로 가는데!”
아카데미를 빠져나오는 순간, 알비스가 카단과 칼리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북쪽.”
칼리아가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하자, 알비스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다. 도시 케이시에서 지내신다고 하셨죠?”
알비스의 물음에 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단 씨는요?”
기대가 가득 담긴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카단은 피식하고 웃으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네? 어딜 말씀하시는 거죠? 땅속은 아닐 테고….”
“전 여기서 지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단은 딱히 머물 곳이 없었다.
샬로트 잉그마르가 죽는 동시에 집을 잃었고, 도시 텔루아에서는 여관에서 잠을 청했었다.
‘잭 카터 씨가 수도로 옮긴다고 했으니, 굳이 텔루아로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
잠이야 여관에서 해결하면 될 테니 큰 문제는 없었다.
“다들 방향이 다르네요. 방향이 같으면 마차라도 같이 탈까 했는데.”
알비스는 아쉽다는 듯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헤어질까요? 저는 곧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거든요.”
그의 말에 카단과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3달 뒤에 만나요!”
알비스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고.
“그래.”
칼리아는 이번에도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단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더니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두 분 다 합격 축하드려요.”
세 사람은 3달 뒤에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우선 도둑 길드로 가봐야 하나?’
혼자가 된 카단은 길 한가운데 멈춰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도에 도착해 곧바로 시험을 보러 왔기에 지리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대로는 종일 도둑 길드를 찾아 떠돌다가 아무 여관이나 들어가 잠을 청할 판이었다.
냐앙-
카단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오더니 카단의 다리에 머리를 비벼댔다.
어딘가 익숙한 상황에 카단은 멍하니 자신의 다리에 머리를 비벼대는 고양이를 바라봤다.
‘어디서 많이 본 고양이인데?’
잠깐 기억을 떠올리던 카단은 무언가 알았다는 듯 느낌표를 그리며 다시 고양이를 바라봤다.
“잭 카터 씨의 고양이?”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열심히 얼굴을 비벼대던 고양이가 고개를 들곤 카단을 바라봤다.
냐앙.
고양이는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카단을 잠깐 바라보더니,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단은 아무런 의심 없이 고양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름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허름한 곳을 좋아하는 건가?’
아무런 글자 없이 고양이 문양만이 새겨진 간판.
분명 잭 카터가 운영하는 주점의 간판이었다.
이번에도 구석진 골목. 허름한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카단은 피식 웃음을 흘렸고, 천천히 주점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고양이가 안으로 유유자적하게 들어갔고, 고양이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곳엔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고양이들의 저녁입니…. 아? 카단 님이시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 테이블 안쪽에서 열심히 유리잔을 닦고 있던 작은 눈이 인상 깊은 남성 ‘잭 카터’가 방긋 웃으며 카단을 반겨 주었다.
“여긴 언제 오신 겁니까? 그리고 이 주점은 또 언제 구하신 거고….”
분명 도시 텔루아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지점 변경 신청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더니.
“돈과 정보만 있다면 어려울 건 없죠. 제가 이렇게 보여도 엄연한 지점장입니다.”
아무래도 카단이 천천히 수도로 오는 사이에 잭 카터가 먼저 수도에 도착한 모양이다.
“여러모로 놀랍네요.”
“그런가요?”
잭 카터는 피식 하고 웃으며 오렌지 주스를 따라 카단에게 건넸다.
“늦게 오신 걸 보면 역시….”
“네. 합격했습니다.”
카단은 기다렸다는 듯 푼 안에서 돌돌 말린 두 장의 양피지를 꺼내 잭 카터에게 건넸다.
“영웅 아카데미의 합격 통지서와 입학 안내서군요. 이걸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될 줄이야.”
잭 카터는 마치 대단한 유물이라도 본 듯, 작은 눈에 힘을 쥔 채 합격 통지서를 살폈다.
“역시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이군요. 카단 님은.”
“뭐, 운이 좋았습니다.”
실제로 교관의 시험은 운이 좋게 합격할 수 있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괜히 그분의 핏줄이 아니군요. 오랫동안 준비한 사람들을 제치고 곧바로 합격해내실 줄이야.”
잭 카터는 시험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한 카단은 곧바로 그에게 입학시험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6성 베틀 메이지와 대련을 하셨다고요?”
“뭐, 이겨야 하는 대련은 아니었어요. 이기고 싶긴 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고요.”
카단이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오렌지 주스를 천천히 들이켰다.
“내용만 들어봐도 꽤 힘들었을 것 같네요. 그런 시험들을 당당하게 통과해서 결국 합격 통지서를 받아온 카단 님도 대단하고요.”
잭 카터는 카단의 마음의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합격하실 것을 대비해 근처 고급 여관을 잡아뒀습니다. 혹시 마음에 드시지 않으면 다른 여관을 알아보죠.”
카단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오렌지 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입학식 전까지는 어떻게 지내실 생각입니까? 따로 생각해 놓은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시죠.”
잭 카터의 질문에 카단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수련을 좀 할 생각입니다. 입학 전까지는 3성의 경지까지는 노려봐야 할 것 같아요.”
“3, 3성이요? 3달 안에?”
한 단계 더 성취를 올린다는 것이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3달 안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겠다니. 잭 카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불가능한 것도 아니죠.”
어차피 기초야 10년간 쌓아왔다. 지식도 충분하니 적어도 4성까지는 순조롭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데 이 근처에 던전이 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