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폭 네크로맨서-17화 (17/186)

제17화

벨리드의 말대로 입학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교관 대표와 생도 대표의 선서, 귀빈들의 축사.

그리고.

“당신들의 입학을 허가합니다.”

영웅 아카데미 학장의 입학 허가 선언을 끝으로 입학식은 종료되었다.

이어서 아카데미 정복을 포함한 보급품 지급과 기숙사 배정의 시간이 있었지만, 이 역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입니다. 기숙사로 가셔서 짐도 푸시고 아카데미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세요.”

입학식의 끝을 알린 벨리드 교관이 무대에서 내려와 여유롭게 강당을 빠져나갔다.

“훈련장은 어디에 있지?”

“보급품에 아카데미 지도 있으니까 잘 확인해봐.”

“나는 기숙사부터 가봐야겠다.”

자유시간이 주어진 생도들이 우르르 강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생도가 되었다는 사실에 설렘을 지닌 그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그러나 딱 한 명만큼은 생도가 되었다는 설렘을 마음껏 즐길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두 녀석 모두 합격할 줄 누가 알았어?’

금발의 귀족. 라이덴은 옷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강당을 빠져나가는 생도들 틈에 끼어 자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일단 빠져나가자. 첫날부터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할 순 없어.’

이내 그의 걸음이 강당의 출입문을 넘어서려는 순간.

툭.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떤 놈이!”

라이덴은 반사적으로 어깨에 올려진 손을 뿌리치며 뒤를 돌았다.

“너, 넌?”

동시에 라이덴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도망?”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보였다.

라이덴을 무시한 최초의 평민. 카단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라이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라이덴이 ‘쓰레기’라 칭했던 알비스도 보였다.

“도, 도망은 무슨.”

라이덴은 애써 여유로운 척 웃어 보였다.

“도망쳐도 상관은 없어. 귀족으로서의 자긍심도 없는 녀석이라면 그냥 그런 녀석이구나 생각하고 말면 그만이니까.”

여유롭게 도발.

이 상황을 피해서 욕을 먹을지, 사과하고 명예를 되찾을지에 대한 선택권이 라이덴에게 주어졌다.

‘이 빌어먹을 평민 새끼.’

감히 누구를 도발하냐며 벌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 안에서는 귀족과 평민이 존재하지 않으니, 신분으로 카단을 찍어 누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싸우거나 언성을 높이며 소란을 피울 수도 없었다.

남들의 이목이 쏠렸다가는 지금보다 더한 망신을 당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조용히 끝내자.’

라이덴은 무언가 결심한 듯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봐, 어차피 우리끼리의 일인데,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어때?”

“왜? 남들 앞에서 사과하는 게 부끄러워?”

그러자 카단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봐. 잘못을 인정하고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귀족, 귀족의 긍지 따위는 고블린이나 줘버린 쓰레기 같은 귀족. 어느 쪽이 더 부끄러울까?”

낮은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어진 질문.

라이덴은 그 질문에 얼굴만 붉힐 뿐 어떠한 답도 달 수 없었다.

“선택은 네 몫이야.”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아, 성의도 없이 대충 사과할 생각은 아니지? 리베라 왕국의 귀족이 그렇게 치졸할 리 없지.”

자존심을 구겨버리는 듯한 그의 말투에 라이덴이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이 내기를 아는 사람은 카단과 알비스, 그리고 라이덴 세 사람뿐이었다.

없던 일이라고 생각하며 카단을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내가 저딴 녀석에게 놀아나야 해?’

하지만 카단의 말이 그의 자존심을 미친 듯이 긁어놨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라이덴은 생의 처음으로 평민에게 무시당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 사실이 라이덴의 발을 묶어버렸다.

“이봐.”

두 주먹을 꽉 쥔 채 알비스에게 향한 라이덴이 이를 악물며 입을 열었다.

“네?”

평민 신분인 알비스는 귀족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툭.

그러자 카단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비스. 이곳엔 신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귀족도 평민도 노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고개를 숙이는 행위도 교칙 위반이다.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알비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시선이 라이덴을 향했다.

“으, 응!”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자, 라이덴이 미간을 좁히며 알비스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지속될 수 없었다.

“음. 사과하는 사람의 눈빛이 아닌 것 같군.”

알비스 옆에 팔짱을 끼고 선 카단이 눈치를 주자, 라이덴은 이를 악물며 시선을 내렸다.

‘이딴 쓰레기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니….’

거만하게 내기를 제안한 과거의 자신이 미워지는 순간.

그러나 후회해도 늦었고, 카단은 라이덴이 사과해야 할 상황을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너, 너를 비하하고 우습게 여긴 것을 사과한다. 미안하다.”

라이덴의 입에서 천천히 그리고 작은 목소리의 사과가 내뱉어졌다.

자존심과 타협하며 어렵게 내뱉어진 말.

이를 악물고 손을 부들거리는 모습이 진정성 있는 사과라기보다는 억지로 내뱉은 것 같았지만.

“아, 아닙니다. 아니, 아니야. 난 괜찮아. 아, 앞으로 그러지 않으면 되니까!”

알비스는 그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아직은 귀족을 상대하는 것이 어려워 보였지만, 알비스도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신분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것 같았다.

“사과하니까 좋네.”

카단은 더 짓궂게 라이덴을 몰아갈까도 싶었지만, 당사자인 알비스가 그 사과를 받아줬으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라이덴은 말없이 카단을 노려볼 뿐이었다.

‘기껏해야 2성~3성 네크로맨서다. 기회만 온다면 언제든 짓밟을 수 있어.’

카단은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얼핏 예상했지만, 굳이 표정으로 무언가를 드러내지 않았다.

‘대련하는 날을 기대. 아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라이덴은 눈으로 카단을 욕하듯 노려보더니, 이내 빠르게 몸을 돌려 강당을 빠져나갔다.

“정말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어쨌든 고마워요. 카단 씨.”

“아닙니다. 그나저나 오랜만입니다.”

“네! 잘 지내셨어요? 갑자기 사과받으라고 하셔서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네요.”

알비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고, 카단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고 보니 칼리아 씨가 안 보이는군요.”

“칼리아 씨는 숙소에 먼저 가보겠다고 하셨어요!”

“그럼 저희도 우선 짐부터 풀러 갈까요?”

“네!”

알비스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천천히 강당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카단은 앞서 걷고 있는 라이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벌써 적이 하나 생긴 건가?’

조용히 아카데미 생활을 하고 싶었기에, 입학식 첫날부터 적대하는 사람이 생긴 건 좋지 않은 시작이었다.

물론 이 선택의 후회는 없었다.

‘잘못했으면 사과해야지. 정신머리 있는 깡패 새끼들도 사과하는 법은 아는데.’

팀을 제안한 알비스를 대놓고 무시하고 깔본 라이덴을 그냥 지나치는 선택을 했다면 그때는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뭐, 대충 무시하고 살면 되지.’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1학년 생도들이 연병장에 모여있었다.

전날과 다르게 생도들은 사복이 아닌 아카데미 훈련복을 입고 있었다.

“반갑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난 콜린퍼스 기사단 출신 교관인 크리스라고 한다. 앞으로 너희들을 총괄 관리하게 되었다. 불만이 있다면 찾아와라.”

유명한 기사단의 이름이 나오자 생도들이 놀란 눈으로 크리스 교관을 바라봤다.

‘콜린퍼스 기사단이면 왕국 5대 기사단 중 하나잖아?’

‘영웅 아카데미의 교관도 보통 사람들은 아니구나.’

‘다른 교관님들도 다 대단하시겠지?’

아무래도 왕국 최고의 재능과 잠재력을 지닌 생도들을 가르치려면 교관 역시 손꼽히는 능력자여야 할 것이다.

‘저 사람은 몇 성의 기사일까?’

카단도 크리스의 강함이 궁금하긴 했다.

입학 전 잭 카터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영웅 아카데미의 교관들은 평균적으로 7성 이상.

‘졸업생 중 최고 높은 성취를 한 사람도 7성이라고 했지?’

이제 막 3성을 달성한 카단에게 있어서 7성이란 경지는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다면 7성에 만족할 수는 없다.’

다들 크리스를 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이어서 몇 가지 공지를 하지.”

크리스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오전에는 너희가 지닌 능력이나 특기와는 상관없이 단체 수업을 받게 될 것이다.”

“네!”

“이후 오후에는 심화 수업이 진행된다. 너희가 지닌 능력과 특기에 따라 분류하여 따로 수업받게 된다.”

“알겠습니다!”

딱딱한 말투로 전하는 설명에 생도들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 공지는 여기까지. 이어서 수업을 시작하겠다.”

드디어 아카데미의 첫 수업.

생도들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첫날이니만큼 너희들의 수준을 파악할 것이다. 우선 체력부터 시험해봐야겠군.”

척.

크리스 교관이 손가락을 들어 연병장 끝을 가리켰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뛰어라.”

그 말에 생도들은 놀란 눈으로 크리스 교관을 바라봤다.

첫 수업부터 다짜고짜 달리기라니.

“왜? 첫날부터 대단한 걸 배운다고 생각했었나?”

생도들의 생각을 읽었는지 크리스 교관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와 비교하기 위한 테스트가 아니다. 너희들 개인의 체력을 시험하는 거니 부담 없이 임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뛰어라.”

크리스가 팔짱을 끼며 생도들을 바라봤고, 그와 동시에 생도들이 땅을 박차고 연병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뜀박질하던 생도들이 연병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역시 마법을 전공한 녀석들이 먼저 쓰러지는군.’

당연한 결과였다.

마법사는 다른 직업에 비해 체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 더는 못 뛰겠어!”

“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크리스는 쓰러지는 생도들의 얼굴만 봐도 그들의 이름과 능력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활을 쏘는 녀석이 체력이 저 모양이라니. 쯧.

입학식 전부터 1학년 생도들의 얼굴부터 능력까지 모든 내용을 숙지하고 정보를 파악해두었다.

‘그래도 이번 기수는 마법사들의 체력이 준수한 편인가? 꽤 오래 버텼네.’

크리스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생도들을 살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크리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연병장을 달리고 있는 생도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역시 근접전을 주로 하는 녀석들이 체력이 좋네. 다들 여유로워 보여.’

순간 크리스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뭐야? 저 녀석은 왜 아직도 뛰고 있어?’

크리스의 눈에 들어온 생도는 다름 아닌 카단이었다.

‘카단? 저놈은 네크로맨서잖아? 분명 그렇게 알고 있는데?’

크리스는 카단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학년 생도 중 유일한 네크로맨서이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네크로맨서인 그가 여전히 연병장을 달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주 멀쩡한 상태로.

놀라고 있는 건 크리스뿐이 아니었다.

‘저 빌어먹을 평민 새끼. 정체가 뭐야? 왜 나보다 더 오래 뛰는 건데?’

금발의 귀족 라이덴은 이를 악문 채 카단을 바라봤고.

‘와, 카단은 체력도 좋구나?’

‘네크로맨서라면서 체력이 나보다 좋다니….’

시험을 치르며 친해진 알비스와 칼리아도 놀란 눈으로 카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

생도 중 가장 먼저 쓰러져 체력 회복하고 있던 푸른 머리칼의 여성도 매서운 눈으로 카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작 카단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연병장을 달리고 있었다.

‘쯧. 주목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시야에 쓰러진 생도들이 보이자, 카단은 난감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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