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아카데미 정문 앞.
“한순간도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카단.”
“네.”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은 금기다.”
크리스 교관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짐가방을 맨 카단을 향해 무언가 말을 전하고 있었다.
“입학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임무를 받아 들뜨긴 하겠지만, 자만하지 마라. 영웅은 자만할 때 무너진다.”
아무래도 첫 임무를 받고 외부로 나가는 카단이 걱정되었는지, 크리스 교관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카단은 고분고분하게 그의 말에 대답했다.
새끼의 첫 비행을 바라보는 어미 새의 심정은 아닐 것이다.
‘언제 사고 칠지 모르는 짐승을 풀어놓는 심정과 비슷하겠지.’
혈기 왕성한 나이의 힘을 지닌 자를 아무런 통제 없이 내보내는 건 아무래도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 명예보다 중요한 건 목숨이다. 명예와 목숨을 뒤바꾸지 말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넌 아직 영웅이 아니다. 이것 또한 명심하도록.”
몇 번의 경고와 주의를 듣고 나서야 카단은 크리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출발하도록. 무슨 일이 있으면 즉각 마법사 길드를 통해 연락하고.”
“네.”
“그리고.”
경고와 주의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크리스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벌써 30분 넘게 이러고 있던 것 같은데.’
귀가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카단은 감정을 숨긴 채 크리스를 바라봤다.
“생도끼리 사이좋게 지내도록.”
“예?”
“서로 자극을 줄 수 있는 라이벌이 있다는 건 좋은 것이지만, 영웅이 되기로 한 자들끼리 다퉈서 좋을 건 없지.”
아마도 조금 전 식당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녀석이 이상한 말을 하는 바람에….’
-저 녀석은 내가 먼저야.
카단에게 시비를 걸던 라이덴에게 내뱉은 블랑쉬의 말.
덕분에 카단은 잠깐이지만 귀찮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블랑쉬랑 무슨 일 있어?
-너 무슨 잘못을 한 건데?
-혹시 둘이 무슨 사이야?
이상한 억측과 예상들이 난무했고, 일일이 그들의 질문에 답해줄 필요는 없었기에 카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만 남긴 채 식당을 빠져나왔다.
아마도 크리스가 식당에서의 일을 알게 되었는지, 조심스레 카단에게 말을 건넨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좋다. 더 늦기 전에 출발하도록.”
크리스가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자, 카단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아카데미를 벗어나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잭 카터가 운영하는 주점. ‘고양이들의 저녁’이었다.
냐앙.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자 주점 안에 있던 고양이들이 카단에게 다가와 몸을 비벼댔고.
“이렇게 일찍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잭 카터도 내심 반가운 표정으로 카단을 반겨주었다.
“우선 오렌지 주스 한잔하시겠습니까? 전보다 더 맛있어졌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바 테이블 위에는 오렌지 주스가 담긴 유리컵이 올려졌고, 카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생각나더라고요.”
고작 2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니 괜히 반가움이 들었다.
‘믿음이 가는 사람이라 그런가? 조금은 편하군.’
잭 카터는 샬로트와 했던 계약 덕분에 카단을 배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카단은 자신이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잭 카터에게만 ‘신뢰’를 느끼고 있었다.
“중급 던전을 공략하라는 임무를 받으셨다고요?”
“네. 내일 아침 출발하려고 하는데, 마차를 좀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
카단은 품 안에서 두 장의 양피지를 꺼내 바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흠. ‘재빠른 사냥꾼들의 비밀기지’라면 버려진 왕국 군의 기지를 서식지 삼아 사는 놀들이 있는 곳이군요.”
괜히 정보 상인이 아니었다.
잭 카터는 던전의 이름만 보고도 곧바로 던전의 정보를 술술 내뱉었다.
“놀들은 무리 지어 생활하는 특성이 있기에 꽤 까다로운 몬스터로 분류되고 있죠.”
“그런가요?”
“하나씩 사냥하면 어려운 난이도는 아닌데, 꽤 영리한 녀석들이라 단체로 덤벼들기 때문에 사냥하기 힘든 편입니다.”
놀은 중하급 몬스터로 분류되지만, 지능이 있고 무리 지어 생활하기에 그들의 서식지는 늘 ‘중급’의 위험도로 측정된다.
“그런데 놀은 그다지 돈이 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업적만을 위해 놀들을 사냥하는 용병들은 없죠.”
보수도 적고 사냥은 어렵다.
그렇기에 놀들의 서식지나 놀들이 출몰하는 던전은 오랜 시간 방치된다고 한다.
“대신 놀들의 서식지는 용병들이나 병사들의 실전 훈련용 사냥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순간 카단은 무언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교수님이 이곳에 다녀오라고 하셨던 거군.’
아이작 교수가 굳이 입학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은 카단을 던전에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실전 경험.
네크로맨서는 일대일 전투보다는 많은 수를 상대로 싸울 때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아카데미 내에서 펼쳐지는 대련보다는 많은 수의 적과 싸워보는 경험을 쌓는 것이 더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병사들이 훈련용으로 공략한다는 곳이라면 괜찮은 연습 장소가 되겠어.’
만약 단순한 토벌 임무였다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주진 않았을 것이다.
“뭐, 카단 님이라면 2, 3일 안에 공략을 끝내고 나오실 수 있겠네요.”
잭 카터의 말대로 카단이라면 중급 던전이라도 빠르게 공략을 끝내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네크로맨서는 무리 지어 생활하는 놀들을 상대로 ‘수’적으로는 밀리지 않을 테니.
“물론 중급 던전이니만큼 긴장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공략에 필요한 물품들은 챙기셨습니까?”
“아뇨. 아카데미에서 곧바로 이곳으로 와서 따로 준비할 시간은 없었네요. 내일 일어나서 해야죠.”
당장 주점을 나간다고 하더라도 저녁 늦은 시각이었기에 따로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내일 마차를 구하면서 대충 공략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놓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주시진 않아도 되는데?”
“편하게 생각하세요. 계약의 일부일 뿐이니.”
어차피 잭 카터의 돈이 아닌, 샬로트에게 받은 돈이었으니, 부담가질 것은 없다.
잭 카터는 그렇게 말하며 특유의 눈웃음을 지었다.
“네. 뭐,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카단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여관도 금방 알아볼 테니, 여기서 잠시 쉬고 계시겠습니까?”
“네. 그러죠.”
***
[경고. 이곳은 ‘재빠른 사냥꾼들의 비밀기지’입니다.]
경고문이 적힌 표지판 앞.
“나리. 도착했습니다.”
마차를 세운 마부가 창문 틈새를 통해 카단에게 말을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카단은 품에서 은화 세 개를 꺼내 마차 안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나, 나리! 너무 많이 주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미 돈은 받았습니다!”
창문 틈새로 돈을 확인한 마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철컥.
카단은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마차에서 내리더니 경고문이 적힌 표지판을 향해 걸어갔다.
‘정말 다른 용병들이 보이지 않는군.’
잭 카터의 말대로 놀들이 서식하는 던전은 인기가 없었다.
다른 던전 같았으면, 입구 앞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술을 마시고 있는 용병들이 한가득이었을 텐데.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네.’
또한 정찰하는 병사도, 출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도 보이지 않았다.
달랑 경고문 적힌 표지판 하나가 전부라니.
‘종일 가만히 앉아만 있었더니, 근육이 뭉치는 기분이야.’
카단은 던전 안으로 향하며 천천히 몸을 풀어댔다.
“흠. 고약한데?”
커다란 동굴 입구로 들어서자 지린내가 진동했다.
시체를 다루는 네크로맨서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약한 냄새.
‘이런 곳에서 5일을 더 있어야 하는 건가?’
괜히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카단은 미간에 힘을 주며 다시 걸음을 이어가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두컴컴한 동굴을 지나자 지하 세계를 떠올릴 법한 장소가 나타났다.
‘정말 동굴 안에 기지를 세워두다니.’
과거 왕국 군이 전쟁하며 만들어 두었던 비밀기지.
이제는 폐허가 되었다지만, 동굴 속에 지어진 건물들을 보고 있으니, 고대 문명을 발견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컹! 커헝!
잠깐 사색에 잠기려 했으나, 멀지 않은 곳에서 개 짖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네 발을 이용해 빠르게 달려오는 거대한 덩치의 짐승이 보였다.
‘기괴하군.’
하이에나의 머리를 달고 있으면서 인간처럼 갑옷을 입고 있었다.
참으로 현실감 없는 모습.
‘오랜만이군.’
그러나 카단은 그런 놀들의 기괴한 생김새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9살 무렵 다양한 생물의 사체를 해부하고 뼈를 조립했었고, 놀의 사체 또한 해부해본 경험이 있었다.
커헝!
어느덧 카단의 앞까지 도달한 놀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 발로 달리더니 이번엔 두 발로 땅을 지탱한 채 사람처럼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기괴하게만 느껴졌다.
“다시 봐도 기분 나쁘게 생겼어.”
크릉!
놀들은 손인지 말인지 모를 것으로 허리에 찬 무기를 꺼내더니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대충 40마리 정도이려나?’
게다가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용병들이 기피하는 이유를 할 것 같군.’
시작부터 마흔 마리의 놀과 전투를 치러야 한다니.
스륵.
그러나 카단은 이 많은 수의 놀이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반지가 끼워진 손을 앞으로 뻗었다.
크르르릉!
카단이 움직이자, 수십 마리의 놀들이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컹! 커헝! 컹!
그러면서도 달려드는 녀석은 없었다.
서로 눈치를 보듯 양옆을 쳐다보더니, 이내 카단을 향해 짖어대기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카단을 포위한 채 어슬렁거리던 놀들은 우위를 선점했음에도 먼저 달려들지를 않았다.
그때.
슈우우우욱!
무언가 빠르게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고, 카단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툭!
‘화살?’
카단이 서 있던 자리에는 땅에 박힌 화살 하나가 보였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니, 폐허가 된 건물 위에서 석궁을 든 놀 한 마리가 보였다.
놀은 카단을 맞추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듯 자기 이마를 툭 하고 때리고 있었다.
‘참 나. 지능이 있다더니, 이런 식으로 방심도 시킬 줄 알아?’
그 모습을 본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커헝! 컹!
다시 앞쪽을 바라보니, 겁에 질린 듯 짖어대기만 하던 놀들이 이번엔 석궁을 든 놀을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조롱이 느껴지는 비웃음.
겁에 질려 눈치를 보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적을 앞에 두고 한눈을 파는 놀들의 모습에서는 여유까지도 느껴졌다.
‘나를 적이 아니라 사냥감으로 여기고 있는 건가?’
인간만큼은 아니더라도 지능을 지닌 몬스터.
컹! 커헝!
놀들은 전과 다르게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들고 있는 도끼나 검 따위를 허공에 휘휘 돌려가며 조롱하는 듯한 행동까지 섞어가며.
‘도발까지? 가지가지 하는군.’
동물의 얼굴로 거만함이 느껴지는 표정을 짓는 것도 참 신기하기만 했다.
카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쪽수로 밀어붙이는 건 나도 자신 있는데.”
수십 마리의 놀에게 포위당했음에도 카단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즐겁다는 듯 그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죽음을 기억하라.”
주문을 외우는 순간, 반지에서부터 흰 가루들이 빠르게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그락!
카단의 주변으로 20마리의 해골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철컥!
방패를 든 해골 병사들이 가장 앞쪽에 서 있었고, 창을 든 해골 병사들이 그 뒤로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검을 든 해골 병사들은 자연스레 빈 곳을 채웠고, 활을 든 해골 병사들은 카단의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커헝?
갑자기 적이 늘어나자 놀들은 당황한 모습으로 해골 병사들을 바라봤다.
달그락, 달그락!
20마리의 해골 병사가 풍기는 불길한 기운 덕분인지 이번엔 놀들이 진짜로 겁을 먹었다.
카단은 그런 놀들을 바라보며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