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다들 발전했군.’
크리스 교관은 연병장을 달리는 1학년 생도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체력이 부족해 픽픽 쓰러지던 인원이 대다수였지만, 지금은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훈련을 버텨내고 있었다.
‘저 녀석도 멀쩡해졌고.’
생도들을 바라보던 크리스의 시선이 가장 뒤에서 달리고 있는 블랑쉬에게 향했다.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그녀는 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아랫입술까지 깨문 모습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카단에게 패배하여 자존심을 구겼던 블랑쉬는 대련 다음 날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부상을 회복하기 위함이라지만, 수업에 불참할 정도로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귀족도 아닌 평민에게 패배했으니 자존심이 바닥을 쳤을 텐데.’
어쩌면 아카데미를 그만둘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휴일이 끝나고 그녀는 다시 수업에 참여했다.
전보다 표정이 더 차가워진 것 같았지만, 눈빛만큼은 뜨거웠다. 아니, 매섭다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려나.
‘다 저 녀석 덕분인가?’
크리스의 시선이 이번엔 카단을 향했다.
카단은 여느 때처럼 남들보다 더 여유로운 표정으로 연병장을 달리고 있었다.
근접 전투 클래스 수업을 받는 생도들보다도 앞서서 달리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기특한 녀석.’
크리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달리는 카단을 바라보며 잠시 전날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았던 크리스는 순찰 겸 산책이라 생각하며 아카데미 곳곳을 거닐었다.
‘걷기 좋은 밤이군.’
휴일이어서 그런지 늦은 시간까지 훈련하는 생도는 보이지 않았다.
“음? 아직 불이 켜진 곳이 있었군.”
한참을 걷던 크리스의 걸음이 멈춰진 곳은 1학년 전용 실내 훈련장 앞이었다.
‘카단이려나?’
매일 늦은 시간까지 훈련장에 남아있던 생도는 대부분 카단이었다.
무슨 훈련을 그렇게 하는지, 가장 먼저 훈련장에 들어가 가장 늦게 나오다니.
‘저 녀석은 참 꾸준하군.’
꾸준함을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괜히 무리하며 몸을 혹사하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휴식도 훈련이거늘.’
작게나마 조언이라도 해주려는 마음에 크리스가 훈련장의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때.
‘음?’
훈련장 안에서 누군가가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정하지 마. 패배 한 번 했다고 네까짓 놈한테 동정 당할 몸이 아니다.”
부상이라며 수업에 불참했던 블랑쉬의 목소리가 들렸고.
“동정? 패배가 부끄러워서 수업에 불참하는 귀족 영애분의 모습을 안쓰러워하긴 했지.”
이어진 목소리는 카단이었다.
“이런 개자식이!”
블랑쉬의 언성이 높아지자, 크리스는 여차하면 나서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문고리를 붙잡았다.
“고작 대련에서 패배했다고 방안에 쭈그려져 있을 거라면 차라리 그만두는 게 어때? 귀족 자긍심이 바닥을 쳤을 텐데.”
“방해하지 말고 꺼져. 죽여버리기 전에.”
“대련이라면 언제든지 받아주지. 그러니 네가 아카데미에 왜 입학했는지를 잊지 말길.”
다행히 크리스의 걱정과 다르게 대화는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저벅, 저벅.
문 너머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고, 크리스는 아차 하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오지랖이 넓은 녀석일 줄은 몰랐는데.’
회상을 끝낸 크리스가 피식 웃으며 카단을 바라봤다.
대련 상대가 수업에 불참한 것이 신경 쓰였는지, 직접 나서서 동기부여를 시켜주다니.
‘거친 방법이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 고집불통 귀족 영애에게는 딱 어울리는 방식이지.’
블랑쉬에게 어떤 의지가 생겨났고, 그 원인은 카단이었다.
‘눈빛 매서운 거 봐라.’
블랑쉬는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카단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달리기를 이어갔다.
꼭 당장이라도 달려가 뒤통수를 한 대 후릴 것만 같은 표정.
‘체력이든 대련이든 절대 안 져. 패배는 한 번이면 족해.’
숨이 차기 시작한 건 오래전이었고, 이제는 간신히 헛구역질을 참고 있는 상황.
그러나 블랑쉬의 발은 계속해서 땅을 박차고 있었다.
언제나 한계를 느끼면 푹 주저앉아 고고한 척하던 블랑쉬가 망가지는 것을 고사하며 달리기를 이어갈 줄이야.
주변에 있던 생도둘은 모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쯧. 괜한 오지랖이었다.’
카단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적이 될 자의 힘만 키워준 꼴이군.’
카단이 목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차기 가디언으로 지목받는 블랑쉬는 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신경 쓸 걸 줄인 것만으로도 이득이지. 꽤 도움이 되기도 했고.’
어차피 돌이킬 수 없었다.
후회해봤자 얻는 건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밖에 없으니.
선택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
‘내가 더 강해지면 그만이야.’
카단은 애써 블랑쉬의 시선을 외면한 채 달리기를 이어갔다.
잠시 후.
체력 훈련이 끝나고, 카단을 포함한 생도들이 연병장에 모여 앉아 있었다.
“공지할 게 있으니 집중.”
그리고 그들 앞으로 크리스 교관이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왔다.
“이번 달부터는 체력 훈련과 더불어 전투 훈련을 병행할 것이다.”
그 말에 생도들은 눈을 끔뻑이며 크리스를 바라봤고,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며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교관님! 혹시 대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직 1학년들의 공식적인 대련 일정은 잡히지 않았다.
생도들은 대련을 통해 자신들의 실력을 발휘하고 싶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물론 수업 과정에 대련도 포함되어 있다. 맨손 전투부터 무기술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교, 교관님! 저는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도 맨손 전투나, 무기술을 배우는 겁니까?”
이번엔 카단의 첫 친구인 알비스가 조심스레 손을 들며 질문을 던졌다.
“생도는 마나가 부족한 상태에서 홀로 전장에 남아있다면 그대로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아, 아닙니다!”
크리스 교관은 매서운 눈으로 알비스를 쏘아보며 말했고, 그의 기세에 짓눌린 알비스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래. 맨손 전투와 무기술은 생존에 필수적인 훈련이다.”
“알겠습니다!”
“다들, 특정인에게 유리한 수업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점수를 매기기 위한 수업이 아닌 너희들의 생존을 위한 수업이니.”
이어진 크리스 교관의 질문에 생도들 모두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배우기 싫어도 배워야 한다.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을 무시한다면 아카데미에 다닐 이유가 없을 테니.
“오늘부터 무기고를 개방할 테니, 한 달 안에 훈련이 필요한 무기를 골라올 수 있도록.”
“네!”
“참고로 근접 전투 관련 클래스는 원거리 무기를, 원거리 전투 관련 클래스는 근접 무기를 선택하도록.”
이어진 말에 생도들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불만을 표하는 생도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
점심시간 이후 카단은 네크로맨서 심화 수업을 듣기 위해 여느 때처럼 강의실을 찾았다.
당연하게도 강의실에는 카단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적막함이 익숙하다는 듯 카단은 자연스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아이작 교수를 기다렸다.
‘무기술이라. 내게 필요했던 수업이다.’
기다리는 동안 잠시, 크리스 교관의 수업에 관해 생각했다.
무기술과 더불어 전투 훈련의 일정이 잡힌 것은 네크로맨서로서 근접 전투라는 약점을 보완할 좋은 기회.
‘무기는 특별히 고민할 필요는 없겠어. 손에 익은 게 제일이지.’
이미 쓰고자 하는 무기까지 정했는지, 카단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철컥.
생각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카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작을 반길 준비를 했다.
‘음? 저 사람은?’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이작 교수가 아니었다.
“오랜만이네요?”
익숙한 목소리와 외모.
“벨리드 교관님?”
카단은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네. 반가워요.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안녕하십니까.”
카단은 곧바로 그녀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벨리드는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천천히 교단을 향해 걸었다.
“아이작 교수님이 급히 출장을 가시는 바람에 오늘은 제가 이 시간을 책임지게 됐어요.”
“아, 그렇습니까?”
“불편하면 자습할래요?”
벨리드 교관이 싱긋 웃으며 묻자, 카단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교관님께 배운다면 저야 영광이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사람에게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나쁠 게 뭐 있겠는가?
“대답도 예쁘게 하시네.”
카단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벨리드 교관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소개를 다시 하죠. 저는 3학년. 그러니까 졸업반의 마법 전투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교관 벨리드입니다.”
“1학년 생도 카단입니다.”
시험 감독과 수험생에서 이제는 교관과 생도로 만나게 되어서일까?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카단 궁금하지 않아요?”
“어떤 게 말씀이십니까?”
“왜 저는 마법사인데 교관인지.”
사실 카단은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았기에 궁금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교관과 교수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교관이든, 교수든 그들이 자신을 소개한 대로 불러주었을 뿐, 명확한 차이점은 모르고 있었다.
“솔직해서 좋네요.”
벨리드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해서 교관은 실기 쪽에 가깝고 교수는 이론 쪽에 가까워요.”
교관은 실전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자이며, 교수는 무언가를 깊이 있게 가르치는 자.
“마법을 예를 들어보자면 교수는 마법사로서의 성장하는 법을 가르치고, 저는 마법사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치죠.”
“이해됐습니다.”
“아쉽게도 네크로맨서 수업엔 교관님이 따로 없어요. 아마 아이작 교수님이 실전도 함께 가르치고 계시죠?”
그녀의 말대로 네크로맨서인 교관을 만나본 적은 없었다.
전투, 실전 모두 아이작 교수에게 배우고 있었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딱히 불만도 없었고.
“원래는 마법 전투와 관련된 내용으로 수업하려고 했는데, 위에서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 같아 오늘은 상담하는 식으로 진행해볼까 하는데. 괜찮죠?”
어떤 수업이든 상관없었다.
대화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쌓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좋은 일 아닌가?
“네. 좋습니다.”
“아, 그 전에 당신한테 줄 게 있는데.”
수업을 시작하려던 찰나, 벨리드 교관이 무언가 떠오른 듯 눈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저한테 무엇을?”
“당신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제가 줄 게 있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요?”
“아….”
그 말에 입학시험 당시 벨리드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카단 수험생?
-네?
-몬스터 서식지에 두고 가신 게 있던데, 합격하시면 그때 돌려드리도록 하죠.
“네. 기억납니다.”
카단의 대답에 벨리드는 피식 웃으며 아공간을 열었다.
휙-
그녀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하얀 물체가 아공간에서부터 빠져나와 강의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달그락!
“해골을 숲속에 몰래 소환하셨더라고요?”
그녀가 바닥에 내려놓은 건 해골 병사의 뼈였다.
“네. 맞습니다.”
카단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사람들 몰래 해골을 소환했었다.
당시 주변에 있던 생도들은 물론 옆에 있던 팀원들도 카단이 해골을 소환한 걸 눈치채지 못했었다.
‘교관의 눈은 속이지 못했군.’
그러나 교관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
모든 교관이 눈치챈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벨리드 교관만큼은 해골이 소환된 걸 알고 있었다.
‘굳이 챙겨서 나에게 돌려준 이유가 뭘까?’
솔직히 굳이 돌려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형편없는 해골이었다.
던전에서 얻은 이름 모를 이의 뼈로 만든 해골 병사.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병력 중 하나였다. 분명 벨리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혹시 시험장에서 해골을 소환한 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카단이 생각하기엔 해골을 소환한 게 딱히 문제가 되진 않았다.
‘부정행위는 아닐 텐데.’
시험이 시작하는 동시에 해골을 소환했으니 정당성에서도 어긋나지 않았다.
“네크로맨서가 해골을 소환한 게 문제가 될 게 있나요?”
“그렇다면 이걸 저에게 돌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굳이 이렇게 돌려줄 필요가 없을 텐데.”
해골 병사 하나를 몬스터 서식지에 풀어 놓는다고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돌아다니는 몬스터에게 맞아 해골 병사는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원래는 당신이랑 대화할 기회를 얻을 생각이었어요. 뭐, 아이작 교수님의 부탁 덕분에 다른 방식으로 기회가 생겼지만.”
“네?”
“돌려줄 게 있다고 했으니, 입학하자마자 찾아올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찾으러 오더라고요?”
벨리드는 카단이 시험에서 합격할 걸 예상하며 그에게 돌려줄 게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카단은 벨리드가 한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 입학한 후, 한 달이 넘도록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제가 직접 찾아오는 방법도 있지만, 뭔가 멋없잖아요?”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대화할 기회를 만들려고 한 것일까?
카단이 의아함을 지닌 표정으로 벨리드를 바라보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카단에게 다가왔다.
“돌려 말하는 것보다 바로 본론을 꺼내는 것도 제 스타일이긴 해요.”
벨리드가 카단의 앞에 멈춰서더니,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의뢰하고 싶은 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