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카단이 사는 세계는 격투 기술이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몬스터에게 통하지 않는 격투는 인기가 없었고, 사람과 싸우더라도 무기를 들고 싸울 일이 대부분이었다.
격투기의 필요성이 떨어지며 자연스레 도태되고 말았다.
‘그러니 통할 수밖에.’
카단은 앞서 치러진 생도들의 대련을 보면서 판단했다.
격투기가 발전되지 않은 세계에서 마나와 오러가 제한된 맨손 격투라면 분명 전생의 기술이 통할 거라고.
그리고 그의 생각은 보란 듯이 들어맞았다.
‘녀석이 방심해줘서 공격이 더 깔끔하게 들어갔어.’
전생에 즐겨하던 ‘복싱’의 간단한 변칙 기술은 그대로 라이덴의 턱을 후려쳤다.
끊어치는 공격에 라이덴은 잠시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물론 격투기가 발전되지 않은 세계라고 해서 이곳에 사는 이들이 약하다는 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전투 기술을 배우고 실전 경험이 많은 이들이기에 분명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앞서 치러진 생도들의 대련 역시 몇 번이고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전생의 격투기가 기술적으로 발전되었다면, 이곳은 오로지 본능과 신체 능력만으로 기술을 뛰어넘었다.
바닥에 쓰러진 라이덴 역시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잭 카터가 조심하라고 할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었으며, 아카데미에서 인정받는 강자.
‘여유는 전투 이후에 부리는 거다. 인마.’
카단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라이덴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만약 그가 전투에 집중했다면 분명 이어진 변칙 공격을 피해내거나 막았을 것이다.
쓸데없이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갑작스러운 공격을 대비하지 못했을 뿐.
“이, 이게 무슨?”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덴이 눈을 뜨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잠시 정신만 잃었던 것이었는지,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카단 승.”
그와 동시에 대련을 지켜보던 크리스 교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도 카단이 만들어낸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비겁한 수를….”
라이덴은 이를 악물며 카단을 노려봤지만, 대련 결과에는 승복하는 것 같았다.
상대가 비겁한 수를 쓰던, 방심했던 결과는 자기 잘못이라는 걸 그 역시도 알고 있었다.
라이덴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카단을 바라봤다.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적을 앞에 두고 방심을 하는 건 기본도 안 되어 있다는 거 아닌가?”
카단은 말을 흘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뭐? 이 새끼가!”
카단의 작은 도발에 라이덴은 발끈하며 카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한 걸음밖에 내디뎌지지 않았다.
“라이덴.”
“네, 교관님.”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할 생각이라면 어디 하나 부러질 각오 정도는 하는 게 좋다.”
크리스 교관은 인자하게 라이덴을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 무겁지도 날카롭지도 않은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라이덴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두 사람 모두 수고했다. 라이덴, 너는 의무실에 다녀와. 기절이라는 건 쉽게 지나치는 게 아니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잠깐 정신을 잃었을….”
“다녀와.”
“넵.”
크리스 교관이 매서운 눈으로 말하자, 기세에 짓눌린 라이덴이 힘없이 대답하며 짐을 챙겼다.
그의 옆으로 그를 따라다니는 생도들이 달라붙었고, 크리스는 멀어지는 라이덴을 보며 혀를 찼다.
‘그놈의 자존심은. 쯧.’
라이덴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크리스가 이번엔 고개를 돌려 카단을 바라봤다.
“카단. 대련 한 번 더 할 수 있겠지?”
그저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실력이었는지 다시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카단이 대답하자, 크리스는 고개를 돌려 이미 대련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생도들을 바라봤다.
“허먼.”
잠시 생도들을 둘러보던 크리스가 애써 시선을 피하려는 생도 하나를 지목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대련을 지켜보며 수다를 떨던 3인방 중 하나인 허먼이었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와.”
“왜 저를….”
허먼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옆에 있던 데이비드와 브렌트는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아댔다.
***
오전 수업이 끝난 후 크리스 교관은 홀로 연병장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식사하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크리스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아이작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네크로맨서 심화 수업 담당 교수인 아이작이었다.
크리스는 예를 차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고개를 숙였다.
“점심시간인데 왜 아직 여기에 계십니까?”
아이작은 자상하게 웃으며 다가와 벤치에 앉았고, 크리스도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카단 때문입니까?”
아이작의 말에 크리스가 놀란 눈을 뜨며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의무실에서 라이덴이라는 생도를 봤습니다. 카단에게 졌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교수님이 왜 의무실에?”
“의무실에서 빌릴 물건이 있어서 잠시 들렸었죠.”
카단의 승리 소식에 아이작은 크리스 교관을 찾아온 것이었다.
“아마 마나와 오러, 무기를 제한한 맨손 대련이었겠죠?”
“네. 정확하십니다. 그리고 카단은 보란 듯이 근접 전투 수업에서 1, 2위를 다투는 라이덴을 한 방에 쓰러트렸죠.”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던 크리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아이작에게 물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아무리 오러와 마나를 쓰지 않는 대련이었지만, 네크로맨서는 근접 전투에 취약하잖습니까?”
분명 근접 전투 클래스 생도들에게 유리한 대련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네크로맨서가 승리를 쟁취할 수 있던 걸까?
“뭐, 저도 그 녀석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가 없어서.”
혹시나 카단을 일대일로 가르치는 아이작이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이작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군요. 제가 알기론 그저 상인의 아들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크리스 교관님. 그저 카단에게 운이 좋았던 게 아닙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따른 생도와 대련을 붙여봤습니다. 보란 듯이 이겨대더군요.”
카단은 손쉽게 허먼을 쓰러트렸다.
“그 모습이 마치 몇 번이고 맨손으로 싸워본 베테랑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카단이 그 정도였습니까?”
“네. 솔직한 심정으로는 네크로맨서를 시키기보다 기사를 추천하고 싶었습니다.”
크리스의 입에서 자연스레 아쉬움이 튀어나왔다.
“그 정도 신체 능력과 운동 신경을 지녔으면 기사가 되어도 대성할 녀석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카단이 보여준 모습은 네크로맨서보다 기사에 가까웠다.
“크리스 교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심이 되는군요.”
“예? 그게 무슨?”
“카단 녀석은 네크로맨서 주제에 근접 전투에도 재능이 있다는 뜻 아닙니까?”
아무래도 아이작 교수는 카단을 놓아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네크로맨서로서 특출난 재능을 가진 아이입니다. 호신술이라면 모를까, 기사가 되려고는 하지 않을 테죠.”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크리스 교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워서 해본 말입니다. 신경 쓰실 일 만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수님.”
“기대되는군요. 카단 그 녀석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얼마나 성장할지.”
“네. 왕국의 미래가 참 밝은 것 같습니다.”
크리스 교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아이작 교수님. 식사하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말을 많이 했더니 배가 고프군요.”
“네. 좋습니다.”
그 말에 아이작도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런데 크리스 교관님.”
막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아이작 교수가 크리스를 불렀다.
앞서 걸어가려던 크리스는 걸음을 멈추곤 몸을 돌려 아이작을 바라봤다.
“예. 교수님.”
“만약 대련 중 카단이 기절한다면 대련 상대와 떨어트려 놓으세요.”
“혹시 길버트 님께서 예의주시하라고 했던 그 능력 때문입니까?”
교관, 교수들의 회의 시간에 마법 심화 수업 교수와 아이작 교수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크리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네. 기밀 사항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교관님께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아이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늦은 밤, 카단은 여느 때처럼 홀로 실내 훈련장을 지키고 있었다.
‘곧 4성이 되겠군.’
훈련장 가운데 서 있던 카단이 천천히 눈을 감고 마나 하트를 확인해보았다.
심장 주근에서부터 느껴지는 강인한 기운. 구체 모양의 마나 하트가 마치 지구가 자전하듯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역시 4성까지는 순조롭다.’
샬로트 밑에서 10년간 쌓아온 기초와 지식 덕분에 4성까지 도달하기까지 어려움은 없었다.
심지어 보스 놀을 죽이고 영혼의 결정을 흡수하며 생각보다 빠르게 4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운이 따라줘서 다행이다. 이대로면 아카데미 휴식기 전에는 4성이 될 수 있겠군.’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평소처럼 꾸준히 단련하다 보면 무리 없이 4성이 될 테니.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아직 체력은 충분했지만, 컨디션 관리를 위해서라도 너무 늦게까지 훈련하는 건 좋지 않았다.
카단은 빠르게 짐을 챙긴 뒤 실내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불이 켜진 훈련장은 없었다.
‘하긴 늦게까지 훈련하기엔 일정이 빡빡하긴 해.’
늦은 시간까지 훈련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도들이 게으르거나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은 하루도 견디지 못할 고된 일정을 아카데미 생도들은 매일 겪고 있었다.
하루라도 제대로 쉬어주지 않으면 다음 날 차질이 있었기에 생도들은 무리하기보단 다음 날 수업을 위해 꾸준히 컨디션 관리를 해주었다.
교관, 교수들은 오히려 카단이 이상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고된 일정을 소화해놓고 늦은 시간까지 훈련하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카단은 익숙해진 복도를 걸어 훈련장 건물을 빠져나왔고, 곧바로 기숙사 건물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휙! 휙휙!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깔끔하게 들려왔고, 듣는 것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이 시간까지 훈련하는 생도가 또 있던 건가?’
카단은 작은 호기심을 느끼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옮겨지던 걸음이 멈춰진 곳은 다름 아닌 연병장이었다.
휙! 휙!
어두운 연병장 한가운데, 누군가가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누구지?’
달빛에 반사된 창날이 반짝이는 모습은 꽤 아름다웠다.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창술은 멀리서 보는 카단이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깔끔하게 휘둘러지는 창술은 넋을 놓게 했다.
카단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연병장 구석에 서서 창을 휘두르는 사람을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바라봤을까?
슥.
연병장 가운데서 창술을 펼치던 사람이 몸을 바로 세우더니, 카단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그제야 카단이 정신을 차렸다.
‘이래선 남의 훈련을 훔쳐본 꼴인데.’
창술을 펼치던 사람은 대뜸 카단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고, 카단 역시 기분이 나빴을 상대에게 사과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내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되었다.
창을 들고 다가온 자는 멀끔한 외모와 근육질 가득한 남성. 아카데미 훈련복을 입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생도였다.
역시 개인 훈련을 몰래 지켜본 것이 기분이 나빴던 것일까? 차가운 눈빛이 카단을 향했다.
“죄송합니다.”
어떤 변명이 필요할까?
상대방이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를 먼저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며 카단이 고개 숙여 사과를 전했다.
“뭐, 괜찮아. 몰래 훈련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나저나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생각보다 긍정적인 목소리에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상대를 바라봤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선배님. 전 1학년 카단이라고 합니다.”
모르는 얼굴이면 선배겠지.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뭘 그렇게 깍듯하게 인사를 해? 그만 고개 들어.”
다시 고개를 들자, 상대는 처음과 다르게 경계심을 지우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네가 그 1학년에서 가장 유명한 녀석이었구나? 소문은 많이 들었어. 반갑다.”
“소문이라면?”
“더글라스 가문의 마법사와 대련에서 이겼고, 오늘 맨손 전투에서 왕국의 검이라는 몽브레이 가문의 막내아들을 이겼다며?”
블랑쉬와 했던 대련은 소문이 날 만한 시간이 있었지만, 오늘 있었던 일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아카데미가 생각보다 소문이 빨리 돌아. 사람 수도 적고 선배들이 후배들한테 관심이 좀 많거든.”
“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만나서 영광이다. 난 2학년 마티아스라고 해.”
마티아스라 소개한 남성은 카단에게 악수를 청했고, 카단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마티아스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