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아카데미 입학 전, 고양이들의 저녁.
“1학년 주요 인물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요.”
잭 카터는 카단에게 영웅 아카데미의 주요 인물들을 정리해 카단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린 사람들 외에도 모두 극한의 경쟁률을 뚫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실력자들입니다.”
“명심할게요. 고마워요.”
꽤 세세한 정보에 카단은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입학시험 이후 정보에 중요성을 깨달은 카단은 이번엔 잭 카터의 정보를 흘려듣지 않았다.
한 명, 한 명 기억하기 위해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자, 이번엔 2학년입니다.”
이제 끝났다 싶었을 때, 잭 카터가 바 테이블 아래서 양피지 뭉치를 꺼냈다.
“또 있습니까?”
“3학년은 만날 일이 적겠지만, 2학년은 적어도 2년은 마주치잖아요? 그래서 준비해봤죠.”
카단은 질린다는 듯 혀를 차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많이 준비해주셨네요.”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최선을 다해야죠.”
카단이 감사를 전하자, 잭 카터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신입생 중 주요 인물들의 정보를 드린 이유는 무조건 충돌하게 될 것 같아 조심하라고 드린 겁니다.”
같은 학년이기에 충돌할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잭 카터가 말하는 충돌은 간단한 대련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2학년 주요 인물들의 정보를 드리는 건 무조건 충돌을 피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위험한 사람들입니까?”
“카단 님의 실력이 어느 정도고, 얼마나 빨리 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이기기 힘들어요.”
이번만큼은 잭 카터도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이 담긴 말이 아닌 경고하듯 내뱉어진 진중한 말에 카단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학년은 근접 전투 계열의 생도들이 역대급으로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락, 사락.
잭 카터는 바 테이블 아래서 꺼낸 양피지 뭉치를 하나하나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2학년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아무래도.”
툭.
이내 무언가를 찾아낸 잭 카터가 양피지 뭉치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더니 바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이 사람입니다.”
“마티…아스?”
“네. 마티아스. 2학년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졌습니다. 평민 출신이며 알려진 바로는 용병왕의 제자라고 하더군요.”
카단은 놀란 눈으로 양피지에 적힌 ‘마티아스’의 정보를 확인해보았다.
“창술사이며, 17살의 나이에 5성의 경지에 올랐다?”
“네. 역대급 재능이라고 하죠.”
17살 나이에 5성의 경지에 오른 건 틀림없는 재능의 영역.
일반적인 사람들은 17살에 2성에 도달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영웅 아카데미 1학년 생도들의 평균은 3성이었다.
“아마 지금쯤 6성을 바라보고 있겠죠.”
아무리 최고의 재능을 지닌 자들이 모이는 영웅 아카데미라지만, 벌써 6성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니.
“괴물은 따로 있었군요.”
“네. 그러니 마티아스와 마주치더라도 절대 갈등을 만들지 마시고 최대한 충돌을 피하세요.”
잭 카터가 다시 경고하듯 말을 이어갔다.
“이미 가디언들이 직접 차기 가디언으로 지정해둔 사람입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마티아스가 다음 세대 가디언 중 한 자리를 차지하겠죠.”
***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 마티아스라는 거지?’
카단은 창을 들고 앞에 서 있는 마티아스를 보며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용병왕의 제자이며 2학년 최강자라고 하기에 강렬한 인상의 남자를 떠올렸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마티아스는 우락부락하지도 않았으며 사나운 인상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남성미가 강한 잘생긴 외모의 청년이었다.
“저야말로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카단은 마티아스가 내민 손을 붙잡았고, 마티아스는 기분 좋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영광은 무슨. 아무튼 반갑다. 2학년 사이에서 거론되는 가장 유명한 신입생을 이렇게 만나네?”
카단은 이미 2학년 사이에서도 꽤 유명해진 모양이었다.
‘블랑쉬를 이긴 여파가 생각보다 크군.’
아마 2학년 대부분이 카단이 블랑쉬를 이기며 관심을 두기 시작했을 것이다.
“더글라스 가문의 영애를 이겼다고 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오늘 소문을 듣고는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
“저를 말씀입니까?”
2학년 최강자가 왜 만나보고 싶었다고 하는 것일까?
“라이덴이라는 후배는 2학년 검사들이 경계하고 있던 녀석이거든. 입학 전부터 재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그런데 그런 라이덴을 한 방에 기절시켰으니, 카단에 대한 관심이 오를 수밖에.
“늦긴 했는데, 잠깐 시간 있어? 대화 좀 하고 싶은데.”
마티아스가 연병장 구석에 마련된 벤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있습니다.”
잠깐 대화할 시간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카단의 대답 이후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았고, 마티아스는 침묵을 참지 못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려나?”
“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하겠습니다.”
카단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마티아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는 체력 수업에서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다던데, 왜 그렇게 몸을 단련하는 거야?”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어릴 때부터 생존을 위해 체력을 기르고 몸을 단련했다. 그 마음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 부닥친다면 적어도 도망갈 힘이라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티아스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크로맨서가 생존을 위해서 몸을 단련한다고? 아니, 왜? 근접 전투를 할 것도 아니고.”
“필요하다면 해야겠죠.”
“그래서 체술도 배운 거야? 아니, 체술은 또 언제 배웠대?”
체술은 아마 격투기를 말하는 거겠지.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생존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배웠습니다.”
전생에서 배웠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야만 했다.
“전투는 언데드들로 하잖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적들이 접근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가까워지면 마법으로 거리를 벌릴 수도 있고.”
“부하들보다 약한 대장이 어디 있습니까?”
“어?”
“대장이라면 선두에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네크로맨서라도 말이죠.”
한 집단을 이끈다면, 그 집단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전생에 생겼던 가치관이 이어졌다. 비록 그가 이끄는 집단이 조직 폭력배가 아닌 언데드 군단이었지만, 그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지켜지기 전에 자신을 지킬 힘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네크로맨서로서의 능력만 키우는 것으로 끝내선 안 됐다.
왕국 최강자들을 홀로 상대해야 했기에 다양한 준비를 해야 했다.
카단이 말을 끝내는 순간, 마티아스가 눈빛을 반짝거리며 카단을 바라봤다.
“너 멋진 생각을 하네?”
“네?”
“내가 네크로맨서를 만난 적이 없어서 네크로맨서들은 죄다 음침하고 비겁하지 않을까 생각했었거든.”
아무래도 네크로맨서의 전투는 언데드 군단이 주력이니, 전선에서 창을 휘두르는 마티아스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완전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마티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카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크로맨서가 이렇게 멋진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카단은 헛기침을 하며 괜히 어두컴컴한 하늘을 바라봤다.
‘그래도 잭 카터 씨가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겠네.’
긍정적으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마티아스와 갈등이나 충돌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카단. 내가 널 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좀 도와줘도 될까?”
“도움이요? 어떤 걸 말씀입니까?”
창술사가 네크로맨서를 도울 일이 뭐가 있을까?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마티아스를 바라봤다.
“어린 시절부터 체술을 배웠다지만 창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서?”
“네. 그렇긴 한데.”
“그럼 다양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이잖아?”
창술은 물론이고 다른 무기들의 기술 또한 겪어본 적이 없다.
몬스터와 전투를 제외한다면 제대로 된 전투 경험이라고 해봤자 배틀 메이지와 마법사, 그리고 맨손 대련뿐이었다.
“혹시….”
“매일은 힘들어도 가끔 이렇게 만나서 대련 상대가 되어줄게.”
뜬금없는 제안에 카단이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대련 상대요?”
“응. 생존하기 위해 중요한 건 단련도 있지만, 경험이 제일이거든. 창 말고도 다른 무기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으니까,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까지 절 도와주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하보다 약할 순 없다는 그 말이 인상 깊었거든. 지켜지기 전에 스스로 지킬 힘을 기르고 싶다는 말도 인상 깊었고.”
아무래도 카단의 마음가짐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았다.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 어떤 대가도 없이 대련을 도와준다니. 그것도 2학년 최강의 실력자가.
그의 말대로 마티아스와의 대련은 카단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티아스는 가디언들이 지목한 ‘차기 가디언’.
언젠가 적이 될 것이 확실시되어있는 그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제가 선배님의 훈련에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아냐. 매번 혼자 밤늦게까지 연습하다 보니 심심하기도 했어. 시간이 남아서 하는 말이니 부담은 갖지 마.”
마티아스는 확고해 보였다.
‘그래. 언젠가 적이 된다면 미리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복수를 결심한 이상 물불 가리지 않기로 했었다. 적이 될 자에게 은혜를 입는 것도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여야지.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티아스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도움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나도 일정이 있어서 자주는 무리겠지만, 열심히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카단은 그를 향해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고, 마티아스는 피식 웃으며 카단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혹시 다룰 수 있는 무기는 있어? 아무래도 무기를 든 적과 만날 일이 많을 테니 맨손 전투는 무리인데.”
“전문적으로 배운 건 아니지만 단검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단검? 잠깐만 기다려봐.”
마티아스는 그렇게 말하며 연병장 구석에 놓인 짐가방을 향해 달려갔다.
이내 다시 카단 앞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날이 서 있지 않은 뭉툭한 단검이 들려있었다.
“혹시 몰라서 대련용 무기 몇 개 챙기고 다녔는데, 단검도 있었네.”
“설마 지금 바로 시작하자는 건가요?”
“응. 궁금하기도 하거든. 네크로맨서가 휘두르는 단검이라니.”
순수하게 반짝이는 그 눈빛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두려움이 느껴졌다.
‘순수함에서 나오는 광기라.’
카단은 헛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마티아스에게서 단검을 건네받았다.
“바로 해볼까? 당연한 말이지만, 오러는 사용하지 않을 거야. 이런 기회 쉽게 오는 거 아니다? 알지? 최선을 다해 덤벼.”
해맑게 웃는 마티아스의 모습은 어쩐지 섬뜩했고, 그 웃음을 보며 카단은 생각했다.
‘역시 개인 훈련하는 모습을 훔쳐봐서 화난 게 아닐까?’
이건 대련을 빙자한 폭력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