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아카데미 휴일이 되자마자 카단은 잭 카터가 운영하는 고양이들의 저녁을 찾았다.
“또 무슨 일입니까?”
“반가우면서 괜히 그러시기는.”
“제가 언제 반갑다고 했습니까? 휴일마다 찾아오시기에 아카데미 생활을 제대로 하고 계신 건지 걱정된 것뿐입니다.”
잭 카터는 여느 때처럼 카단을 반기며 그가 앉은 테이블 위로 오렌지 주스를 올려놨다.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저택에 좀 가볼 생각입니다.”
“샬로트 님의 저택이요? 거긴 갑자기 왜 간다고 하십니까?”
“필요한 게 있거든요.”
“아니, 필요한 게 있으면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웬만한 건 다 구해다 드릴 수 있는데?”
정보를 파는 도둑 길드의 지점장. 잭 카터는 못 구하는 것 말고는 다 구해줄 수 있었다.
“구할 수 없으실걸요?”
“지금 그 주변은 전부 출입 금지구역입니다. 경비병까지 배치되어 밤새 그곳을 정찰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원래 샬로트의 저택은 환영 마법으로 인하여 숨겨져 있었다.
저택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놀랍게도 잭 카터도 그중 하나였다.
“예전엔 샬로트 님의 허락이 있어야 출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환영 마법도 풀렸어요.”
그러나 샬로트의 죽음 이후로 환영 마법이 풀렸고, 샬로트의 저택은 이제 누구든 볼 수 있는 저택이 되고 말았다.
“시기도 좋지 않은데, 괜히 그곳에 갔다가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잭 카터의 조치로 인하여 카단은 평민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든 정체는 탄로 날 수 있는 법.
“흠. 불가능합니까?”
카단이 조심스레 묻자, 잭 카터는 곤란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이내 내린 결론은 불가능.
경비병들이 보초를 서고 정찰병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곳.
몇 번을 생각해도 카단의 신변이 위험할 것 같았다.
“나중엔 가능하단 뜻이죠? 급할 건 없습니다. 아카데미 휴식기가 시작되면 찾아갈 생각입니다.”
이어진 카단의 말에 잭 카터는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저택 조사가 이번 달 안에 끝난다고 했으니, 병력은 꽤 빠지긴 할 겁니다. 그래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병력이 모두 철수하는 것도 아니었다. 경비병이 남아 밤새 그곳을 지킬 것이 뻔했다.
죽은 뒤에도 그가 살았던 저택을 감시해야 할 정도로 샬로트는 왕국에게 위협적인 존재라는 건가?
카단은 씁쓸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이 많이 철수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군요.”
“경비병들이 모든 출입구를 지키고 있을 텐데요?”
“숨겨진 통로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비밀 통로가 하나 있거든요.”
“정말 가셔야겠습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다만, 아버지의 저택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게 문제죠.”
순간 잭 카터는 얼굴에 물음표를 그리며 카단을 바라봤다.
황당하고 당황스럽다는 표정. 카단은 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태어나고 쭉 저택 안에서만 지냈거든요. 가끔 밖으로 나갈 때도 아버지랑 같이 다녀서….”
가끔 외출하는 것도 대부분 텔레포트 마법으로 이동했기에 저택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 그렇군요.”
잭 카터는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휴식기가 되고 이곳에 찾아오면 잭 카터 씨가 저택까지 안내해주실 수 있을까요?”
“대체 그곳에 뭐가 있기에 그러십니까?”
“4성이 되었을 때 필요한 게 그곳에 있습니다.”
***
한 달 후.
“허먼, 승.”
수다쟁이 삼총사 중 하나인 허먼이 기쁘다는 듯 들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카단이 주저앉아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뭐야? 카단 저 자식 맨손 대련은 그렇게 잘하더니, 무기술 대련은 영 꽝이네?”
“기대했던 것 이하인데? 역시 이게 네크로맨서의 한계인가?”
“네크로맨서가 평생 무기를 다뤘던 사람을 이기기엔 힘들지.”
카단의 패배에 생도들은 술렁거렸다.
이번 패배가 첫 패배가 아니다.
보름 전 시작된 무기술 대련.
마나와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무기술만으로 맞붙는 대련에서 카단은 계속해서 패배를 맛봐야 했다.
생도들이 떠들어대는 말처럼 네크로맨서가 평생 검을 다룬 사람을 단순한 무기술만으로 이기는 힘들었다.
패배가 당연하기도 한 것이었지만, 늘 1등의 자리에 있던 카단이었기에 생도들은 카단을 향해 부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저 자식 저럴 줄 알았어.”
부정적인 발언의 중심엔 라이덴이 있었다.
라이덴은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과 함께 늘 패배한 카단을 헐뜯었다.
“의기양양하더니 꼴 좋네.”
“네크로맨서면 얌전히 언데드나 만지작거릴 것이지. 어디서 무기를 들고 설쳐?”
유치한 발언들이 오갔고, 그 목소리가 전혀 작지 않았기에 카단에게도 들려왔다.
‘역시 어렵네.’
부정적인 발언들이 들려왔지만, 카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몸을 일으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카, 카단. 괜찮아?”
“다친 곳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비스와 칼리아는 그런 카단이 걱정되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카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저, 저 녀석들이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 마!”
“무시해라.”
패배하며 다친 것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발언들에 상처를 입었을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어차피 목숨을 잃지 않고 패배하는 건 아카데미에서만 가능한 일이야.”
그러나 카단은 패배에도 패배 후 들려오는 목소리들에도 전혀 타격을 입지 않고 있었다.
“이기기 위해선 지는 경험 역시 필요해. 지는 건 아무렇지 않아. 뒤에서 들려오는 말들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자신을 걱정해주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듯 손을 내저었고, 그 모습에 알비스는 감동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칼리아는 입을 꾹 다문 채 카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계속해서 패배하고 있다지만, 생도 중 가장 발전 속도가 빨라. 시간이 더 지나면 패배할 일도 줄어들겠지.’
그러면서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단검이지?’
단검은 무기 중 길이가 가장 짧은 무기였다. 창을 든 상대는 물론 검을 든 상대에게도 불리한 무기.
“카단. 무기를 바꿀 생각은?”
칼리아가 고민 끝에 질문을 던졌다.
“없어. 단검이 편해. 여러모로.”
단검이 가장 손에 익었다. 굳이 다른 무기술을 익힐 시간도 부족했고.
“무기 길이 차이 때문에 앞으로도 이기긴 힘들 텐데?”
“뭐, 단검이 익숙하고 편해.”
“선택은 본인의 몫이니.”
앞으로도 단검을 사용할 것이라면 전투 경험이라도 늘리고, 누군가에게 조언받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음, 내가 좀 도와줄까?”
칼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너 요즘 알비스의 무기술 훈련도 도와주고 있잖아?”
“한 명 더 도와준다고 문제가 될 건 없어.”
“생각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있어서 괜찮아.”
그러나 카단은 정중하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무려 차기 가디언이자 2학년 최강자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으니, 굳이 칼리아의 도움까지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가?”
“가끔 조언은 부탁해도 될까? 문제점이라든지,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든지.”
“어렵지 않다.”
그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는지 칼리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야, 네크로맨서.”
비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그곳엔 금발의 귀족 ‘라이덴’이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카단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깨를 쫙 펴고 턱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처음 만났을 때처럼 거만함이 되살아난 듯했다.
“계속 지기만 해서 어쩌냐?”
카단의 앞에 멈춰선 라이덴이 비웃음 섞인 말투로 시비를 걸어왔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무기 들고나서는 점점 추락하네? 어렵게 쌓았던 명성일 텐데.”
라이덴의 조롱에 이어 그를 뒤따랐던 생도들이 키득키득 웃어댔다.
명백한 도발이었지만, 카단은 웃음 하나 지어주지 않고 그를 무시했다.
“이제 입도 굳어버린 거야? 큰일이네. 그 거만한 모습 다시 보고 싶었는데.”
“시비 걸지 말고 꺼져.”
계속되는 도발에 옆에 있던 칼리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어휴. 무서워라. 여자 뒤에 숨어있는 꼴이라니. 나라면 쪽팔려서 뒤졌다.”
“네크로맨서잖아. 뒤에 있는 게 익숙한가 봐?”
“하긴. 언데드보다는 여자 뒤에 있는 게 더 안전하겠지.”
도를 넘는 말에 칼리아가 살기짙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라이덴을 포함한 그의 무리가 움찔하며 살짝 뒤로 몸을 뺐다.
“내버려 둬.”
카단은 칼리아 앞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을 깎아내려야 사는 놈들은 어차피 자멸하게 돼 있어. 굳이 상대해봤자 시간 낭비야.”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
대놓고 무시하는 말투에 라이덴은 헛웃음을 지으며 미간을 좁혔다.
‘이 새끼. 평민 주제에 뭐가 이렇게 잘났어?’
아무리 영웅 아카데미에 입학했다지만,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귀족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걸까?
라이덴은 평생 받아본 적 없는 무시에 조금씩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곧 상반기 평가 시험이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애써 침착한 척 미소를 지은 라이덴이 말을 이었다.
“대련 평가 때 나에게 지목권이 생기면 무조건 널 지목할 거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널 지목하길 기도해.”
“기도?”
“뭐, 아니면 너에게 지목권이 생기길 기도해. 그럼 날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
무기술 대련이 시작되고 카단은 라이덴에게 세 번 패배했다.
그 세 번의 승리가 움츠러들었던 라이덴의 어깨를 펴게 해주었고, 자존감을 되찾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린 것.
카단은 잠시 라이덴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해야겠다.”
그러자 알비스와 칼리아가 놀란 눈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라이덴의 도발을 늘 무시해왔던 카단이 이렇게 수긍하다니.
‘카단도 라이덴이 무서운 건가….’
알비스는 그런 카단을 보며 괜히 자신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하긴. 라이덴은 몽브레이 가문이니 아무리 카단이라도 대련에선 이기긴 힘들겠지.’
상반기 평가 대련은 마나와 오러가 제한되지 않은 대련.
‘소문을 듣자 하니 라이덴은 오러 사용도 꽤 잘한다고 하던데.’
라이덴은 그동안 참아왔던 분을 폭발시키며 카단을 몰아붙일 것만 같았다.
칼리아 역시 카단의 승리를 그리지 않았다.
‘라이덴. 재수 없긴 하지만 실력만큼은 인정해. 나도 승리를 장담할 순 없을 정도니.’
알비스와 칼리아가 보기에 카단 역시 패배를 직감하고 라이덴의 제안에 수긍하는 것 같았다.
‘뭐야?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 드디어 주제를 파악한 건가?’
라이덴 역시 조금 당황했다.
그동안 그의 태도를 봐서는 이렇게 쉽게 수긍하진 않아야 했다. 이미 무시했을 때 무슨 말을 할지 준비까지 해온 상황.
그때, 카단이 지루하단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쉽게 이기는 건 재미없어서 다른 사람 지목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