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윽.”
마나 하트에서부터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순간적인 현기증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됐다.’
그러나 카단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카단의 마나를 머금은 마법진의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고.
화륵!
마법진 한가운데에 푸른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은 점차 크기를 키웠고, 어디선가 불어온 따스한 바람과 함께 불꽃이 사라졌다.
또각.
그리고 그 불꽃이 있던 자리에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넋 놓고 바라볼 법한 외모의 여성.
또각, 또각.
그 여성은 카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당황할 법도 했지만, 카단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다.
“오랜만이야. 카단.”
이내 카단 앞에 도착한 여성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선생님?”
소환진에서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카단의 어린 시절 과외선생이자, 샬로트의 사역마인 뱀파이어 ‘루시아’였다.
루시아는 양팔을 벌려 카단을 꼭 껴안아 주었다.
“벌써 이만큼이나 성장했을 줄이야. 샬로트가 기뻐하겠는데?”
카단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내 루시아가 카단을 품에서 놓아준 뒤 기특하다는 듯 카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그리고 고생했어.”
그녀의 칭찬과 위로가 어쩐지 마음을 쿡쿡 찌르는 느낌. 카단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용케도 이 소환진을 찾았구나.”
루시아는 반갑다는 듯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가리켰다.
이 마법진은 샬로트가 루시아와 계약할 때부터 새겨놨던 마법진이었다.
피의 계약으로 루시아를 불러낼 수 있는 유일한 소환진.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이 마법진을 보며 선생님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 있거든요.”
카단은 피식 웃으며 잠시 어린 시절 샬로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난 네크로맨시 외에는 가르치지 않을 거야. 대신 과외 선생님을 소개해주마.
-과외 선생님 말씀입니까?
-어. 나보다 나이도 많고 못돼먹은 녀석이다. 그래도 글이든 인성적으로든 널 가르치기엔 나보다 그 녀석이 나을 거야.
“샬로트가? 뭐라고 그랬는데?”
회상이 이어지던 중 루시아가 질문을 던져왔고, 카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보다 나을 거라고 그러셨어요.”
“참 나. 칭찬 한 번 해준 적 없더니. 죽어서야 그 칭찬을 듣게 되네.”
루시아가 씁쓸하다는 듯 바닥을 바라보다가 다시 해맑게 웃으며 카단에게 물었다.
“왜 새로 마법진을 그리지 않았어? 샬로트가 뱀파이어 소환하는 마법진은 가르쳐주지 않은 건가?”
네크로맨서 중 뱀파이어를 소환하고 계약할 수 있던 건 샬로트 뿐이었다.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지식을 이어받은 카단만이 뱀파이어와 계약할 수 있는 유일한 네크로맨서였다.
“그런데 왜?”
“피의 계약은 살면서 한 번밖에 할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선생님과 그 계약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카단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말투로 말을 전했다.
“생각해줘서 고맙네. 역시 제자밖에 없다니까?”
“무엇보다 선생님은 강하시잖아요. 아버지가 의지했을 정도로.”
“오랜만에 만났다고 예쁜 말만 해주는 건가? 아니면 혹시 나한테 잘못한 거 있니?”
루시아는 피식 웃으며 카단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뇨. 제가 잘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괜찮겠어? 인간들은 뱀파이어를 마족이라고 생각해. 뱀파이어를 소환하는 모습을 들키면 오해받을 텐데?”
마족을 소환하는 네크로맨서라는 오명을 쓴다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샬로트도 혼자 있을 때만 루시아를 소환하곤 했다.
“당분간은 그 사실을 숨겨야겠죠. 아무래도 지금 선생님의 존재가 알려지면 곧바로 사형당할 테니까요?”
명확히 말하면 뱀파이어는 마족이 아니었다. 인간계와 마계 사이 ‘중간계’라 불리는 곳에 사는 하나의 종족일 뿐.
“그러고 보니 샬로트도 처음 날 소환하고는 마족인 줄 알고 기겁했었는데.”
루시아는 무언가 그리운 듯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내뱉었고, 이내 시선을 돌려 카단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벌써 계약하려고 하는 거야? 이제 막 4성이 된 것 같은데.”
“앞으로 조금은 위험한 곳에 들러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 계획을 좀 수정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린 계약할 수가 없거든.”
“네?”
루시아의 거절에 카단은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리 사이가 선생과 제자 사이인데, 지금 너 선생인 나를 부려 먹겠다는 거야?”
“아, 아뇨.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아카데미에서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카단은 당황한 듯 양손을 빠르게 내저었다.
그런 카단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루시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농담이야. 제자를 위해서라면 힘이든 뭐든 얼마든지 보태주고 싶지.”
“그렇다면 왜 계약을 못 한다는 거죠?”
“하고 싶어도 못 해.”
“네?”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피의 계약은 살면서 한 번밖에 할 수 없다고.”
피의 계약을 살면서 한 번밖에 할 수 없다는 제약은 인간만의 제약이 아니었다.
“샬로트가 죽으며 계약이 끝났지만, 나 역시 또 다른 계약은 할 수 없게 됐거든.”
그 말에 카단은 난감하다는 듯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군요.”
이렇게 된다면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인증된 실력자인 루시아와 계약할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다른 뱀파이어와 계약해야 할 것 같았다.
“대신 내가 다른 뱀파이어를 소개해줄 수도 있는데. 어때?”
이어진 루시아의 제안에 카단이 놀란 눈으로 루시아를 바라봤다.
“새로 마법진을 그려서 아무런 정보도 없는 뱀파이어를 소환하고 계약하는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방법일 텐데?”
그녀의 말대로였다.
새로운 마법진에서 소환된 뱀파이어가 루시아만큼 강한 뱀파이어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될 것이다.
어떤 뱀파이어가 소환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그녀의 말대로 소개를 받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피의 계약은 단 한 번뿐.
그 한 번의 기회를 날려먹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루시아가 소개해주는 뱀파이어라면 신뢰해도 되겠지.
“물론.”
루시아는 흔쾌히 승낙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아무것도 없는 빈 바닥을 발견하곤 휙휙 손가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부터 뿜어진 핏빛 기운이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
루시아 발 아래 그려진 마법진과 비슷하게 생긴 마법진이었다.
분명 피의 계약을 위한 뱀파이어 소환 마법진이겠지.
“다 됐다.”
마법진을 완성한 루시아가 다시 카단에게 다가와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이만 가볼게. 식사 잘 챙겨 먹고. 아프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저 마법진으로 다시 뱀파이어를 불러내도록 해. 만나서 반가웠다. 제자야.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마워.”
루시아는 카단을 놓아주며 손을 흔들었고.
“저 역시 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힘을 기른다면 그때 중간계에 놀러 와.”
“인간이 중간계에 갈 수도 있는 겁니까?”
“그럼 나는 여기에 어떻게 왔을까?”
루시아는 피식하고 웃으며 답했고, 카단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 저기 선생님.”
“왜?”
“제게 소개해주신다는 뱀파이어가 어떤 뱀파이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래도 소개받고 소환하는 건데 어느 정도 정보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자 루시아가 좋은 질문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리지만, 능력도 있고 재능도 뛰어나. 로드 님께서 눈여겨보실 정도랄까?”
루시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범상치 않은 뱀파이어일 것이다.
루시아와 계약할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든든한 아군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카단. 난 널 언제나 응원해. 그러니 멍청하게 살지 마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루시아는 요염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카단은 그녀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전했다.
“그럼 잘 부탁할게.”
“네? 뭐를?”
이내 질문을 이어가려 했지만, 루시아가 사라진 뒤였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다.’
카단은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내 고개를 돌려 루시아가 만들어준 마법진을 바라봤다.
‘마나를 꽤 소모하긴 했는데, 한 번 더 못할 정도는 아니다.’
저택 안에 오래 있는 것도 불안하기도 했다.
언제 왕국에서 조사단을 꾸려 보낼지 모르는 상황이니 빠르게 볼일을 끝내고 저택을 빠져나가야 했다.
숨겨진 창고라 들킬 확률은 낮았지만, 조심하는 게 좋다는 건 바뀌지 않은 사실.
스릉.
카단은 다시 손가락에서 피를 뽑았고 새로운 마법진 위로 피를 떨어트렸다.
이어서 마법진에 마나를 주입하자, 전처럼 마법진 한가운데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륵!
크기를 키우던 불꽃이 이내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불꽃이 머물렀던 곳에는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응? 소녀?’
루시아와 비슷한 오렌지빛이 도는 붉은 머리칼, 어쩐지 냉혹하게 느껴지는 붉은 눈동자. 꽤 새침할 것 같이 생긴 귀여운 외모의 소녀가 카단을 바라봤다.
“안녕.”
어린 소녀. 아니, 뱀파이어가 먼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어? 그, 그래. 안녕.”
카단은 얼떨결에 손을 들며 살짝 흔들었다.
‘어리다고 하시긴 했지만,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지.’
왠지 난감한 상황. 둘 사이에는 굉장히 어색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전생에도 아이랑은 인연이 없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조폭 생활할 때도 어린아이를 상대할 일은 없었다.
‘왜 이렇게 어린 뱀파이어를 소개해준 거지?’
카단이 알기로 루시아는 굉장히 이성적인 뱀파이어였다.
아무 생각, 계획 없이 행동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계획대로 철저하게 이끌어갔던 뱀파이어.
그런 그녀의 추천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난 루나 카시미르야.”
“난 카단 잉그마르… 뭐? 카시미르?”
카시미르는 루시아의 성이었다. 그녀와 성이 같다는 건.
“응. 언니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언니 제자였다고?”
“어, 언니라고?”
“응. 루시아 카시미르. 우리 언니야.”
순간 카단이 눈도 끔뻑이지 못하고 멈춰버리고 말았다.
‘서, 선생님의 동생이었어?’
설마 가족을 소개해줄 줄이야.
“계약 안 할 거야? 마법진이 있다고 해도 여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는데.”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마법진으로 계약되지 않은 뱀파이어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생님의 동생이라면 그 강함도 닮았겠지. 그리고 선생님이 인정할 정도라면….’
이내 결심한 카단이 미소를 그리며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해야지. 계약.”
슥!
카단은 허리춤에 있던 단검으로 손바닥을 그어 피를 냈고, 붉은색의 피는 뚝뚝 마법진 위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루나라고 소개한 뱀파이어 역시 자신의 피를 마법진 위로 떨어트렸다.
우웅!
그러자 다시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피로 맺어진 영원한 계약. 나 루나 카시미르. 내 앞에 인간과 성스러운 피의 계약을 맺으려 한다.”
마법진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루나는 익숙하게 주문을 끝내자, 마법진에서부터 뿜어지던 빛이 카단과 루나에게 천천히 스며들었다.
“된 건가?”
카단은 빛이 스며든 심장 쪽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마나 하트에 징표가 새겨졌으니, 미세하게나마 통증이 느껴졌다.
“응. 이제 다 됐어.”
루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카단은 잘 부탁한다며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 루나.”
“나도 잘 부탁해. 언니가 최선을 다해 도우라고 했어.”
어린 애의 모습을 하고 있다지만, 루나는 분명 카단이 전생을 합친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애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상대하는 게 좀 어렵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름 모를 교관님과 함께 있는 게 더 편할 것 같다.’
악수는 빠르게 끝이 났고, 손을 놓은 루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단을 바라봤다.
“응?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너 아직 약하네. 아무래도 힘을 좀 더 키워야 할 것 같은데?”
무심하게 내뱉어진 현실을 관통하는 말. 카단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그래?”
“지금 그 정도로는 내가 크게 힘을 낼 수가 없어. 이 계약은 제약이 꽤 많거든.”
카단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소환을 두 번이나 해서 마나가 좀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지만, 앞으로 루나를 소환해서 함께 싸우려면 마나의 양이 부족한 상황이 자주 올 것만 같았다.
“알겠어. 더 강해지도록 할게.”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할게. 언니한테 보고해야 하거든. 다음에 필요하면 불러.”
루나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고, 카단도 자연스레 손을 들었다.
그때.
콰아아아앙!
벽난로 입구가 있던 곳에서부터 폭발음이 들려왔다.
“뭐야?”
카단은 당황스럽다는 듯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고, 루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대체 뭘 달고 온 거야?”
루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달고 왔다니?”
“앞에서 느껴지는 기운. 모르겠어?”
카단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고, 루나는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마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