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식사를 끝내고 급하게 밖으로 나온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식당 간판을 바라봤다.
‘도대체 뭐야?’
식당 안에서 정체를 들켰다간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물론 카단을 이길만한 사람은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목숨이 오가는 전투따윈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위기만큼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차라리 던전 안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정말 대차게 쫓겨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나저나 더글라스 가문의 위상이 대단하군.’
주민들이 이토록 영주를. 아니, 영주의 자식을 위할 수도 있다다니. 조금은 놀라웠다.
‘블랑쉬 녀석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평판이 굉장히 좋은 모양인데?’
더 놀라웠던 건 블랑쉬의 평판이었다.
카단에게 있어 블랑쉬는 첫인상부터 굉장히 차갑고 날카로웠다.
고귀한 귀족. 건드려선 안 될 것 같은 날카로움을 지녔던 여성.
게다가 귀족 특유의 거만함이 제대로 박혀 있었기에 카단은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웬만한 평민들은 제대로 쳐다도 못 볼 것 같았는데.’
아무리 영주의 자식이라지만, 싫으면 싫어했지 이처럼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할 줄은 몰랐다.
‘내가 못 봤던 모습도 있는 모양이네.’
식당 안에서는 카단을 위협하는 말 말고도 블랑쉬를 찬양하는 듯한 말들도 많이 오갔다.
블랑쉬는 몸소 어려운 이들을 위해 나섰고,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그녀 덕분에 도시의 치안까지 좋아졌다고 하니, 영주민들이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휴식기가 되었으니 그 녀석도 이곳을 지나치겠지?’
더글라스 가문의 영주성이 있는 도시에 가려면 지금 카단이 머무는 도시를 지나가야만 했다.
자칫하다간 블랑쉬와도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에 카단은 흠칫하며 주변을 살펴봤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군.’
블랑쉬에게 패배를 안긴 장본인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는 않을 것이다.
심하면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시끄러운 일은 만들지 말아야지.’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가 일반일을 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전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빨리 벗어나야겠네.’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용병 길드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갈 땐 가더라도 던전 정보 얻는 것쯤은 괜찮잖아?’
당장 용병 길드의 건물이 보이지 않았기에 카단은 천천히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찾았다.’
이내 용병 길드의 문양이 걸린 간판을 발견했고, 카단은 곧바로 용병 길드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카단!”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카단을 불러 세웠다. 얼마나 우렁찬 소리였는지 몸이 움찔할 정도였다.
‘설마….’
카단은 불안한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고, 그곳엔.
“여기다! 여기!”
블랑쉬의 친오빠인 클로제 더글라스가 서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 정복을 입은 채 카단을 향해 크고 긴 손을 열심히 흔들어대고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이 왜….’
하필 여기서 더글라스 가문의 장남을 마주칠 줄이야.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카단은 당황함을 감춘 채 클로제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짜악! 짜악!
카단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자, 클로제는 반갑다며 큰 손바닥으로 카단의 등짝을 몇 번이고 두드렸다.
“커헉!”
“반갑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볼 일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카단은 애써 통증을 참아내며 몸을 일으켰고, 클로제는 여전히 반갑다는 듯 카단의 어깨를 두드려댔다.
“그래? 아, 맞다! 인사해! 여긴 내 친구들이자 네 선배들이다.”
클로제가 뒤를 가리켰다.
그의 뒤로는 아카데미 정복을 입은 두 명의 생도가 있었다.
‘졸업반이라서 그런지 보통내기처럼 보이진 않네.’
클로제가 가장 강해 보이긴 했지만, 뒤에 서 있는 두 생도 역시 뛰어난 실력자처럼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카단입니다.”
카단이 낯선 두 생도를 향해 인사하자, 그들은 놀란 눈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카단? 카단이라면 그 녀석 아냐? 1학년 최강이라는 네크로맨서?”
“아! 이 녀석이 클로제 네 동생을 쓰러트… 커헉!”
짜악!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로제가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등짝을 후려쳤고, 그는 말을 끝까지 이어갈 수가 없었다.
“여긴 더글라스 가문의 영지야. 괜히 이 녀석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고.”
호탕하게 웃던 클로제가 속삭이듯 말했고, 등짝을 맞은 생도는 오만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제의 말대로 이곳은 더글라스 가문이 다스리는 도시의 거리 한복판.
오가는 이가 클로제를 알아보고는 멈춰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배려심이 많으신데?’
카단이 블랑쉬를 쓰러트리고 아카데미 1등을 차지한 소문의 주인공이란 걸 알게 된다면 꽤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아, 미안하다. 후배!”
등짝을 맞은 생도는 카단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사과를 전했다.
“괜찮습니다.”
“이 자식들아. 소개하다 말았잖아.”
클로제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두 생도를 가리켰다.
“여기 호리호리해서 여리여리하게 생긴 놈은 루카스. 마법사.”
“반갑다.”
“그리고 활을 매고 있는 놈은 아라드. 보시다시피 궁수도 둘 다 뛰어난 실력자들이야.”
이어서 등짝을 맞은 생도의 소개까지 이어졌고, 카단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관님들, 교수님들 할 것 없이 모두 입 모아서 널 칭찬하던데? 성장 속도가 무섭다고?”
“3학년 모두 궁금해했다고.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설마 클로제 녀석과 알고 있는 사이라니.”
세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클로제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카단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나저나 얼마나 급한 볼일이기에 우리보다 빨리 이곳에 도착한 거야? 설마 블랑쉬를 보러 온 건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볼일은 다 끝낸건가?”
“네.”
벨리드 교관의 의뢰를 발설할 수 없었기에 카단은 그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다행히 클로제도 더는 이곳에 온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는데?”
클로제가 싱글벙글 웃으며 카단의 어깨 위로 팔을 걸쳤다.
“글쎄요. 여기까지 온 김에 괜찮은 던전이 있다면 들려볼 생각입니다.”
“던전? 벌써 실전 경험부터 쌓을 생각인 거냐?”
“아, 네. 뭐….”
카단은 어쩐지 적진 한복판에서 적의 수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클로제를 알아보고 시선을 보내오니 부담스럽기도 했다.
‘친근하게 대해주는 건 감사하지만, 빨리 이 도시를 떠나고 싶은데….’
카단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들은 어디 가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가문으로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어. 이번에 가문에서 파티가 열리거든. 보름 뒤에 열리는데 괜찮으면 너도 같이 갈래?”
클로제는 장난기 있는 미소를 짓더니 카단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블랑쉬도 있을 거야.”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클로제는 호탕하게 웃기까지 했다.
“아, 초대는 감사하지만, 사양해도 되겠습니까?”
“강요는 아니니 어렵게 생각하지는 말고!”
카단은 잠시나마 더글라스 가문의 파티에 참석하는 본인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끔찍하군.’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곳에 굳이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네. 감사합니다. 아, 혹시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카단이 다시 화제를 돌리며 물었고, 클로제는 해도 좋다며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에 언데드가 나오는 던전이 있을까요?”
더글라스 가문의 속한 도시. 이 근방이라면 클로제도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언데드? 네크로맨서랑 관련된 수련이라도 할 생각이야?”
“네. 뭐, 비슷합니다.”
카단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고, 클로제는 고민도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제일 가까운 게 배고픈 시체들의 동굴이야. 좀비가 가득한 곳이라 추천하지 않아. 얻을 것도 없거든.”
용병들 사이에서도 좀비 던전은 쳐다도 보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목숨 걸고 공략해봤자 얻는 건 시체 냄새뿐이니.
“아 그렇습니까?”
“내가 알기론 이 근방에 언데드 던전은 물론, 다른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도 없어.”
“네?”
카단이 당황하자 클로제는 손가락을 들어 용병 길드를 가리켰다.
“용병 길드에 가도 똑같은 말을 들을 거야. 더글라스 가문의 영지는 치안이 좋기로 유명하거든.”
더글라스 가문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영지의 치안을 관리했다.
덕분에 영지 내에 던전이나 몬스터 서식지가 생겨나면 기사단이든 용병들이든 죄다 나서서 공략해버리곤 했다.
“좀비 던전은 까다로운 곳이라서 아직 공략되지 않았지만, 뭐, 이번 여름이 지나면 가문이 나서서 공략한다고 알고 있어.”
던전 ‘배고픈 시체들의 동굴’은 카단이 공략을 끝내고 나온 상태.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나중에 다 알게 될 테니.’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클로제에게 감사를 전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제대로 도와준 것도 없는데? 그나저나 우리는 이제 배 좀 채우려고 하는데. 내가 끝내주는 식당을 알고 있거든.”
클로제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 카단이 빠져나온 식당을 가리켰다.
“이 도시를 들르면 꼭 찾아가는 식당이지. 어때? 배고프면 같이 먹을래? 내가 살 테니 부담 갖지는 말고.”
카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식당 간판을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며 클로제에게 대답했다.
“방금 저 식당에서 먹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확실히 맛있더군요.”
“아, 그래? 아~ 이거 아쉽네. 그래도 여기서 보니 반가웠다.”
“저도 반가웠습니다.”
반갑다기보단 식겁했다가 좀 더 가까운 느낌이었지만.
“아, 언데드가 나오는 던전을 찾는 거라고 했지?”
“네.”
“그렇다면 여기 말고 ‘렐페이라’로 가봐.”
“렐페이라 도시 말씀이십니까?”
어딘가 익숙한 도시명에 잠시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하며 클로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응. 그 근방에 생긴 언데드 던전 때문에 용병들을 잔뜩 구한다는 소문을 들었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마차 타고 이틀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멀진 않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래. 렐페이라는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니 조심해. 난 이만 배를 채우러 가보겠다.”
“네. 아카데미에서 뵙겠습니다.”
클로제는 카단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린 뒤 그의 친구들과 함께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늦장 부리다가는 정말 블랑쉬랑도 마주칠 수도 있겠는데?’
카단은 재빨리 도시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차를 구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도시 렐페이라. 왜 이렇게 이름이 익숙하지?’
***
며칠 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더 감사했죠. 덕분에 든든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몇 번이고 렐페이라 행 마차를 찾던 중 카단은 상인 길드의 마차를 얻어타게 되었다.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분과 함께했다는 영광도 누릴 수 있어서 길드원들도 모두 좋아했습니다.”
아카데미 증표를 보여주며 ‘호위’를 명분 삼아 마차에 오를 수 있었고, 덕분에 빠르게 렐페이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인 길드가 카단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영웅 아카데미 생도라면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방해가 될 리가 없었다.
“덕분에 식사와 잠자리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가디언이 되시면 저희 길드 많이 이용해주십시오!”
길드원의 응원을 들으며 카단은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가 도시 렐페이라인가? 다른 도시들보다는 많이 낡아 보이는데?’
떠나는 마차를 바라보던 카단의 시선이 도시의 커다란 성문을 향했다.
렐페이라는 렐페이라 자작의 지배 아래에 있는 도시. 귀족의 영토에 속한 도시였지만, 어쩐지 낙후된 느낌이 많이 들었다.
성벽도 많이 해졌고, 성문도 단단해 보이지가 않았다.
‘발전한 도시가 있으면 낙후된 도시도 있는 법이지.’
카단은 크게 개의치 않아 하며 용병 길드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이곳에 온 목적은 던전. 도시가 낙후된 것이 문제 되진 않았다.
성문을 넘으려는 사람들은 꽤 많았고, 카단은 자연스레 그들에게 합류해 걸음을 옮겼다.
“길을 비켜라!”
막 성문을 넘어서려던 순간, 뒤쪽에서부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마차가 성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길을 비켜라! 렐페이라 가문의 공자님의 마차다! 어서 길을 비켜!”
말을 탄 기사들이 마차 주변을 호위하며 성문을 지나려는 이들을 향해 외쳤다.
그들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재빨리 자리를 비키기 시작했다.
그때.
휘릭! 촥!
“크헉!”
기사 하나가 채찍을 휘둘러 멍하니 마차를 바라보던 남성의 등을 후려쳤다.
“감히 공자님의 마차 앞에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니!”
“다들 예를 갖춰라!”
수도에서도 볼 수 없었던 광경에 카단은 헛웃음을 지었다.
‘고작 자작 주제에….’
느닷없이 사람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괜히 화가 났다.
카단이 오지랖이 넓진 않다지만, 불편한 광경을 그냥 지나치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서 길을 비키고 예를 갖춰라!”
이어진 기사의 외침에도 카단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마차를 바라봤다.
점차 마차와 기사들이 가까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단은 앞서 오던 기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카단을 발견한 기사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카단을 바라봤고, 카단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슥.
기사는 허리춤에 있는 채찍으로 손을 가져갔고, 카단은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한 모습으로 공격을 기다렸다.
아카데미 생도의 신분.
타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웬만한 귀족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영웅 후보생이다.
자작을 향해 고개 숙이지 않았다고 채찍을 휘둘렀다면 그 명분은 충분하지 않을 터.
그때.
“억?”
누군가 카단의 뒤통수를 꽉 눌렀고, 카단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쉿.”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
“가만히 있어. 카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알비스가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알비스의 말에 카단도 목에 힘을 풀고 고개 숙인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자 채찍을 꺼내려던 기사는 콧방귀를 끼며 다시 성문을 향했다.
“알비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일단, 대, 대화는 조금 있다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