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싸늘했다.
카드와 금화가 오가는 도박판에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카단뿐이었다.
‘벌써 10판째인데, 한 번도 설계가 먹히지 않는 게 말이 돼?’
‘능구렁이 같은 놈. 기술만 들어가면 잽싸게 죽어버리니, 뭘 할 수가 없잖아?’
‘젊은이가 감이 좋은 걸까? 아니면 기술을 꿰뚫고 있는 걸까?’
괴짜 남성과 관능적인 드레스를 입은 여성. 그리고 중년 남자는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분명 세 사람은 도박판에서 알아주는 수준급의 기술자.
손기술 몇 번만으로 도시 ‘렐페이라’의 도박장을 점령했고, 늘 그들이 원하는 그림으로 골드를 쓸어 담았다.
“이런 판은 죽을 수가 없지! 받고 20골드 더!”
“다들 좋은 패가 나왔나? 흥. 나는 죽어.”
“이번엔 저도 끝까지 가봐야겠군요.”
그러나 카단을 상대로는 좀처럼 그들이 원하는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다들 벌써 흥분했네.’
카단은 자연스레 베팅하는 세 사람을 보며 가면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기술을 쓰든 사기를 치든 몇 번이고 시도해봐라.’
카단은 여태껏 세 사람이 작정하고 만들어놓은 설계에 넘어가지 않았다.
‘너희들의 설계대로 움직여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카단이 전생에 타짜에게서 기술을 배웠다고 하지만, 기술을 간파하는 능력까진 없었다.
게다가 타짜에게 배운 손기술도 처음 세 번 이후로는 전혀 사용한 적이 없었다.
마음먹고 배운 게 아닌 재미로 배운 기술. 기술의 종류도 적었고 숙련도도 현저히 떨어졌다.
그런 카단이 어떻게 수준급 기술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이 여자는 투 페어. 아? 어차피 죽었으니 상관없나?
-이 못생긴 놈은 노 페어. 딱 보니까 이번에도 바람잡이 하면서 판을 키우고 죽을 것 같아.
-이 늙다리는 트리플. 일단 제일 높은데?
고스트.
4성 네크로맨서부터 소환할 수 있는 언데드 ‘고스트’ 덕분이었다.
카단의 눈에만 보이는 영혼 형태의 언데드가 실시간으로 도박판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 도박장 안에 네크로맨서가 없는 이상 너희들이 원하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을 거야.’
공격 능력은 전혀 없었기에 주로 투명 상태라는 장기를 활용해 정찰용으로 쓰이는 언데드.
카단은 그런 고스트를 도박판에서 활용하고 있었다.
“흠. 저는….”
카단이 카드를 만지작거리자, 주변을 떠돌던 고스트 두 마리가 카단의 뒤로 다가왔다.
-주인님은 풀하우스네?
-뭐해요? 무조건 이기잖아? 걸어! 판 키워! 진행 시켜!
고스트들의 말에 따라 이번엔 카단의 손이 앞쪽에 쌓인 금화를 향했다.
그때.
-잠깐! 이 늙다리 방금 기술 썼어! 와~ 순식간에 트리플에서 포카드를 만들어 버리네.
중년 남자 뒤에 있던 고스트가 다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뭐야? 그럼 주인님이 지잖아? 주인님! 죽어요!
-죽어! 판 뒤엎어!
고스트들의 외침에 카단은 피식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들고 있던 카드를 내려놨다.
“죽습니다.”
그러자 도박판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네? 또 죽습니까? 아니, 배짱이 그렇게 없어요?”
조급함을 이기지 못한 괴짜 남성이 짜증 섞인 말투로 카단을 도발했다.
“운이 좋지 않았네요. 제 카드 조합이 배짱을 부리기엔 부족했거든요.”
카단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의 도발을 받아쳤다.
그러자 이번엔 중년 남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분명 풀하우스를 쥐여줬는데? 부족하다고? 운이 없다고?’
승부를 걸 만한 상황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카단은 승부를 포기했다.
‘설마 내가 기술을 쓴 걸 본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돼.’
지금과 같은 상황이 몇 번이고 일어났다.
‘우리 셋이 돈을 뜯어내긴커녕 돈을 퍼주게 될 줄이야.’
돈을 잃도록 설계한 판은 귀신같이 빠져나갔고, 승리할 수 있도록 설계한 판은 기가 막히게 돈을 챙겨갔다.
‘기술자가 확실해. 함정에 걸린 건 녀석이 아니라 우리다.’
순간 싸늘함을 느낀 중년 남자는 조심스레 옆에 앉은 여성과 괴짜 남성에게 신호를 보냈다.
‘나가서 출입 통제해. 여차하면 죽여야 하니까.’
그 신호를 알아차린 두 사람이 인상을 구기며 자신들의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 먼저 일어날게. 쩨쩨하게 구니까 할 맛 안 나네. 술이나 마셔야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봐, 가면 쓴 나리. 게임 참 재미없게 하시네. 나도 그만하겠습니다.”
괴짜 남성도 인상을 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판이 깨져버렸군요.”
중년 남자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슥.
그러자 카단은 아무런 말 없이 테이블 위 어질러진 카드를 모으기 시작했다.
“혹시 게임을 더 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그만할까요?”
그 모습에 중년 남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고, 카단은 피식 웃으며 더 말해보라는 듯 손짓했다.
“더 하실 생각이라면 자리를 이동해서 게임을 이어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동?”
“2층에 귀빈들만 모시는 특별한 곳이 있습니다. 큰 판에서 게임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중년 남자의 제안에 카단은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가시죠.”
***
잠시 후.
중년 남자는 도박장 2층에 있는 커다란 방으로 카단을 데려왔다.
‘죄다 비싸 보이는 것들이군.’
낙후된 도시에 있는 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방.
“이쪽입니다.”
중년 남자는 방 가운데 놓인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키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잠시 앉아계시면 다른 분들을 모셔오겠습니다. 술이나 음식은 문 옆에 있는 놈들에게 시키시면 됩니다.”
그러자 카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게임은 이만 됐습니다. 다른 기술자들을 데려와도 똑같을 테니.”
“네? 그게 무슨?”
“게임보다는….”
툭.
카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테이블 위로 금화 주머니를 올려놨다.
“이 사업장에 투자하고 싶은데, 담당자 좀 만나게 해줄래요? 1층엔 보는 눈이 많아서 말을 못 꺼내겠더라고요.”
카단의 정중한 제안에 중년 남자는 흠칫하며 카단을 살폈다.
“호, 혹시 귀족이십니까?”
“그것까진 알 거 없고. 이 금화의 열 배 정도는 투자할 생각입니다. 뭐, 관심 없다면 그냥 가도 상관없습니다.”
중년 남자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카단은 미련 없다는 듯 금화 주머니를 다시 챙기려 했다.
“아, 아닙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관리자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중년 남자는 다급하게 손을 젓더니, 이내 빠르게 방문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녕하십니까. 이 사업장의 관리자 클롭이라고 합니다.”
촌스러운 외모와 다르게 고급스러운 의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나타나더니 카단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음. 이곳에 투자하고 싶다고 하셨죠? 아니, 사업장에 투자하는 건 또 어디서 들으시고?”
“도둑 길드를 통해 정보를 얻어 왔습니다.”
“도둑 길드에서 이 사업장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면 상당한 돈을 쓰셨을 텐데.”
클롭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카단을 바라봤고, 카단은 어깨를 으쓱이며 테이블 위에 올려있는 금화 주머니를 가리켰다.
“돈만 있으면 문제는 없겠죠.”
“좋군요. 그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볼까요?”
자신을 클롭이라 소개한 남자는 카단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무법 도시에서 사업장을 운영한다지만, 저희는 꽤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안전성은 확실하겠죠?”
불법 조직과 관련된 지식은 이미 전생에 충분히 습득된 상태.
불법 사업장의 투자자가 어떤 식으로 질문하고 답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이죠. 세금 걱정 없이 돈을 불리는 데는 도박장만 한 곳이 없습니다.”
“돈 불리는 것 말고는 없습니까?”
카단이 투자자가 되면 얻는 이득이 더 없냐는 질문을 던지자, 클롭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투자자분들께는 특별히 약물도 제공하고 귀빈들만 모시는 노예 경매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죠.”
괜히 무법 도시가 아니었다.
약물과 노예 경매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을 수 있다니.
“몇몇 귀족분들도 저희 사업장에 투자하며 큰돈을 만지고 계십니다.”
고귀한 핏줄을 운운하는 귀족 중에서도 부패한 이들은 존재했다.
“그보다 이 도시에서 사업장을 운영하는 건 당신 혼자입니까?”
“네? 그건 왜 물어보시죠?”
“조직끼리 사업장이나 구역을 두고 자주 다툰다고 들었습니다. 괜히 사소한 다툼으로 투자금을 날리고 싶진 않아서요.”
“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도시의 조직들은 모두 동맹 상태이니까요.”
클롭의 설명을 들을수록 카단의 미간이 점차 좁혀졌다.
도시 렐테이라는 이미 뿌리까지 오염되어 있었다. 조직끼리 힘을 합친 이상, 그들을 상대하는 것도 꽤 힘들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썩어있다면 조직 몇 개를 없앤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겠는데?’
조직 몇 개를 해체한다고 해서 도시가 깨끗해지는 건 아니었다.
불법으로 가득했던 도시였기에 분명 비슷한 조직들이 또다시 생겨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지금처럼 무법 도시라는 명성을 이어나갈 것이다.
‘무엇보다 조직들의 뒤에는 렐테이라 가문이 있다고 했지?’
치안을 관리해야 할 도시의 주인이 오히려 불법 조직들의 뒤를 봐주며 사업장을 키우고 있었다.
카단이 고민하는 사이, 클롭이 실실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금화 주머니를 살폈다.
‘저 정도면 부피면 100골드 정도는 될 것 같은데? 10배를 투자한다고 했으니, 이번에 사업장 늘리는 것도 문제없겠어.’
일이 풀린다는 게 이런 걸까?
사업장을 늘릴 계획을 세우자마자 큰돈을 투자한다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호구는 아니라고 들었으니, 아주 지극 정성으로 모셔야겠어.’
생각을 끝낸 클롭이 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양피지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투자 계약서입니다. 투자하실 생각이라면 읽어보시고 서명만 해주시면 됩니다.”
슥.
계약서를 앞으로 내밀자, 카단은 그가 건넨 양피지를 펼치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음. 투자자들에게 모두 서명을 받고 따로 보관도 하시는 거죠?”
“그럼요. 서류가 있어야 증명을 할 수 있으니까요. 증거가 남는 것 같아 찜찜하시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클롭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투자와 관련된 서류들은 모두 철저한 보안 속에서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툭.
카단은 서류를 다 읽었는지,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럼 그곳으로 안내해주시겠어요?”
“네? 아하하! 농담도.”
“농담 아닌데.”
스릉.
언제 꺼냈는지, 카단에 손에는 뼈로 만들어진 단검이 들려있었다.
“지금 저를 상대로 협박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단검을 확인한 클롭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도시 렐페이라에서 꽤 큰 사업장들을 관리하는 그를 상대로 협박이라니.
“쯧. 새로운 투자자라고 해서 들떠있었는데, 알고 보니 겁 없고 건방진 애송이였네.”
클롭은 여유롭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험상궂게 생긴 남성들이 각자 허리춤에서 무기를 꺼내 카단에게 다가왔다.
“저희는 귀족이라고 봐주고 그런 거 없습니다. 우리가 귀족 한두 명 죽여봤을 것 같습니까?”
어느덧 10명 정도의 남성이 카단을 포위했다.
충분히 위협을 느낄만한 상황이었지만, 카단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천천히 살필 뿐이었다.
‘딱히 대단해 보이는 녀석들은 없군.’
유명했던 용병들도 불법 조직에 속해있다고 해서 조금은 긴장했지만, 다행히 카단을 포위한 이들 중에는 강자는 보이지 않았다.
“애들아. 깔끔하게 처리해 드려라.”
클롭은 두 다리를 테이블 위로 꼬아 올리며 거만한 자세로 명령했고.
“예!”
10명의 남성은 동시에 대답하며 카단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