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열기를 내뿜는 붉은색 마나석.
마나석은 마도구의 재료였고, 이처럼 뚜렷한 속성을 드러낸 마나석은 다른 마나석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일반 용병들이었다면 횡재했다며 환호성이라도 질렀겠지만, 카단은 감흥 없다는 눈으로 마나석을 챙겼다.
‘나한테 필요한 물건은 아닌데.’
불과 관련된 마법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카단에게 마나석은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던전에서 얻은 보상들은 용병 길드에서 필요한 물건과 바꿀 수 있으니까.’
용병 길드에서는 던전의 보상을 돈이나 비슷한 가치의 물건으로 교환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제 더 챙길 건 없는 것 같고.’
마나석과 여왕개미의 갑각을 모두 챙긴 카단은 이내 걸음을 돌려 던전 출구를 향했다.
잠시 후.
던전을 빠져나오는 순간, 용병 하나가 카단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사람이야!”
동시에 무장한 용병들이 카단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뭐지?’
습격인가?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재빨리 마나를 활성화했다.
“정말 당신이 한 겁니까?”
“네?”
그러나 이어진 용병들의 행동에 카단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 던전 끝까지 공략한 게 당신이냐고요!”
“사실이라니까? 저 사람 여왕개미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내가 두 눈으로 봤어!”
“미쳤다! 그럼 여왕개미도 잡고 나온 겁니까?”
용병들은 잔뜩 흥분한 상태로 질문을 쏟아부었고, 카단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여왕개미까지 처리했습니다.”
그 대답에 카단에게 모여들었던 용병들 모두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해방이다!”
“이게 몇 달 만이냐!”
“됐어! 이제 다른 던전에 갈 수 있겠다!”
던전 공략 한 건 충분히 대단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이처럼 용병들의 환호를 받을 줄이야.
“왜 그렇게 좋아하시는 겁니까?”
카단은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용병을 막아내며 질문했다.
“좋아할 수밖에 없지! 우린 모두 강제로 이곳에 배정받은 용병들이니까.”
“이 개미굴 던전이 좋아서 공략하러 온 용병은 손에 꼽지.”
용병 길드 소속 용병 중 계급이 낮은 용병들은 용병 길드가 배정한 던전을 공략해야만 했다.
“용병 길드에서는 더글라스 가문에서 기회를 줬는데 체면을 구길 수 없다며 우리를 몇 달씩이나 이곳으로 보냈어.”
용병 길드도, 용병들에게도 골칫거리였던 개미굴 던전.
더글라스 가문에게 공략권이 넘어갔다면 용병 길드는 다시 한번 체면을 구기게 됐을 것이다.
‘상생이라며 기회를 주었지만, 일종의 책임감을 지니게 해준 거로군.’
더글라스 가문이 상생을 명목으로 기회를 주었으니, 이 도시의 용병 길드는 존재 가치를 위해서라도 그 기회를 놓쳐선 안 됐다.
카단이 보기엔 나쁘지 않은 시스템이었다.
반강제로 용병 길드가 최선을 다해 일하게 만드는 방식.
어쩌면 더글라스 가문이 만들어낸 이런 시스템 덕분에 왕국에서 인정받는 치안율을 얻게 도니 건 아닐까?
“오늘은 길드에서 미친 듯이 먹고 마셔야지!”
“난 집에 가서 쉬고 싶어. 당분간은 휴직이야.”
“용병 길드 때려치울까….”
해방의 기쁨을 느끼는 용병들을 뒤로한 채 카단은 다시 도시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저 사람 전날 저녁에 던전에 들어가지 않았나?”
“뭐? 단 하루 만에 이 던전을 공략했다고? 미쳤군.”
“저 사람 누구야? 자유 용병인가?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
“교환 좀 하러 왔습니다.”
도시 더글라스로 돌아온 카단은 곧바로 용병 길드를 찾았다.
던전에서 얻은 보상이나 몬스터 부산물은 용병 길드에서 어떤 식으로든 처리해줬으니.
“어떤 걸 교환하려고 하시죠?”
용병 길드의 안내원이 해맑게 웃으며 질문했고, 카단은 곧바로 아공간을 열어 테이블 위로 붉은색 마나석을 올려놓았다.
“가시개미의 개미굴에서 얻은 마나석입니다.”
순간 안내원은 놀란 눈을 하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건 저랑 얘기를 나눌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잠시만 기다리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카단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내원은 급히 어디론가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의 남자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더글라스 지부 용병 길드의 책임자인 호루스라고 합니다.”
붉은색 마나석이 뭐기에 책임자까지 부른 걸까? 카단은 무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석 좀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카단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루스의 시선이 곧바로 테이블 위에 놓인 마나석으로 향했다.
“흠. 이걸 개미굴에서 얻으셨다고요?”
“네. 여왕개미의 머리 쪽에서 발견했습니다.”
“운이 좋으시군요.”
마나석을 확인하던 호루스가 부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불의 마나가 담긴 최상급 마나석입니다. 이 정도 크기라면 이 도시에서 건물 한 채는 살 수 있겠네요.”
더글라스는 부유한 도시. 수도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도시였다.
이런 도시에서 건물 한 채를 살 정도라면 붉은색 마나석의 값어치는 생각보다 더 뛰어났다는 뜻이다.
‘그냥 블랑쉬한테 줘버릴까?’
건물 한 채를 살 정도라면 더글라스 가문의 영애에게 어울리는 선물이지 않을까?
‘아니야. 너무 큰 선물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
카단은 고개를 저으며 호루스에게 물었다.
“혹시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이 없을까요?”
어쩌면 용병 길드 안에 이 마나석과 비슷한 값어치를 하는 물건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판매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교환을 원하십니까?”
마나석을 꼼꼼히 살펴보던 호루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카단에게 질문했다.
호루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다행히 비슷한 값어치를 하는 물건이 존재하는 듯싶었다.
“교환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럼 따라오시죠.”
호루스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카단은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호루스가 카단을 데리고 온 곳은 길드 건물 2층에 있는 길드의 창고였다.
“값어치가 있는 물건들을 모아놓은 곳이죠. 던전의 보상과 장인들이 만들어낸 무구도 있습니다. 천천히 살펴보시지요.”
호루스는 창고 안을 가리키며 말했고,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뭐가 뭔지 알아야 고를 텐데.’
창고에 놓인 물건들은 하나같이 값어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 물건들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음?’
물건들을 살피며 걸음을 옮기던 중 보관함 속에 있는 금색 반지가 카단의 눈길을 끌었다.
작은 금색의 반지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고 카단은 반지를 가리키며 호루스에게 물었다.
“이건 어떤 반지죠?”
마나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반지가 아닌 것 같았다.
“그건 마탑에서 만든 반지입니다. 블링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입니다.”
“블링크?”
“예. 텔레포트처럼 먼 거리를 이동할 수는 없지만, 마법사들에게 유용한 생존 마법이죠.”
카단 역시 블링크 마법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6성 이상의 마법사들이 배우는 근거리 순간이동 마법.
‘벽을 통과할 수는 없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5m 정도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었지?’
설마 6성 수준의 마법이 반지에 담겨 있을 줄이야.
“혹시 마법이 일회용입니까?”
전투 시 거리를 벌려야 하는 카단에게 굉장히 유용해 보였지만, 마법 스크롤처럼 일회성이라면 굳이 이 반지를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아뇨. 마나만 충전되어 있다면 언제든지 쓸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건 마탑의 장인이 만든 걸작이니까요.”
이 정도면 붉은색 마나석보다 비싸지 않을까?
‘뭐, 부족하면 금화라도 더 써야겠군.’
생각을 끝낸 카단이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로 교환할 수 있겠습니까?”
“불의 속성을 띈 최상급 마나석이긴 하지만 이 반지와 교환하기엔 조금 부족하군요.”
카단은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아공간을 열었다.
“부족한 부분은 금화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까?”
렐페이라 자작의 기사단과 전투를 치르며 무기술이나 뼈 마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오는 기사단장을 상대로는 무기술도, 뼈 마법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
‘돈은 충분하다. 이 반지만 있다면 몇 번은 위기 상황을 대처할 수 있겠어.’
블링크 마법을 쓸 수만 있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 같았기에 반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20골드 정도면 될 것 같군요.”
셈을 끝낸 호루스가 말하자, 카단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아공간을 열었다.
‘도박장에서 번 돈을 이렇게 쓰는군.’
클롭이 운영하던 도박장에서 포커를 통해 딴 돈은 무려 100 골드.
20골드쯤이야 부담 없이 꺼낼 수 있었다.
“여깄습니다.”
카단이 20골드와 붉은색 마나석을 건네자, 호루스는 곧바로 보관함에 있는 반지를 꺼내 카단에게 주었다.
“처음엔 다루기 힘드실 겁니다. 사용 시 멀미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고요.”
“연습하다 보면 적응되겠죠.”
카단은 반지가 마음에 드는지 곧바로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다행히 작거나 크진 않네요.”
“그 반지가 드디어 주인을 찾아가는군요.”
호루스는 기분 좋은 말을 하며 창고를 나가자며 카단에게 손짓했다.
“아, 혹시 이 안에 있는 물건들은 꼭 교환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겁니까?”
“규정상 그렇긴 한데, 보통은 지점장 재량으로 해결하곤 합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을까요?”
출구로 향하던 호루스가 걸음을 멈추곤 방긋 웃으며 질문했다.
“얼음 마법사가 사용하기 좋은 아티팩스가 있을까요?”
원래는 붉은색 마나를 통해 블랑쉬의 생일 선물을 구하려 했다.
‘파티에 참여할 명분으로 선물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필요한 걸 구해버렸네.’
마법 길드에서 보여줬던 아티팩트보다 더 값어치 있는 물건들이 많아 보였기에 카단은 이곳에서 선물을 구해보기로 했다.
“얼음 마법사라. 아, 잠시만 기다리시겠습니까?”
잠깐 고민하던 호루스는 이내 무언가 떠올랐는지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건 어떻습니까?”
다시 돌아온 호루스의 손에는 은색의 팔찌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얼음 정령의 힘이 깃든 팔찌입니다. 어렵게 구한 놈인데, 주인을 찾기가 어렵더군요.”
“얼음 정령의 힘?”
“네. 캐스팅 없이 마나만 주입해도 아이스 볼 마법을 쓸 수 있으며 냉기 관련 마법들의 파괴력을 증폭시켜주는 마도구죠.”
확실히 마법 길드에서 보여줬던 냉기 친화력을 올려주는 반지보다는 더 좋은 아티팩트였다.
“돈으로 살 수 있을까요?”
“최상급 마나석을 교환해주신 분이니, 특별히 이 팔찌를 판매하도록 하죠. 150골드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
용병 길드를 빠져나온 카단은 곧바로 근처에 있는 여관을 찾았다.
밤새 던전을 공략하고 용병 길드까지 다녀오니 피곤함이 미친 듯이 밀려왔다.
‘던전 안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긴 했지만.’
던전을 빠져나왔을 때도 해가 지고 있었고, 용병 길드를 빠져나왔을 땐 밤이 되어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틀 사이에 던전도 다녀왔고, 블랑쉬의 선물도 구했다.
무엇보다 적과 거리를 벌릴 수 있는 블링크 마법이 담긴 반지까지 구했으니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파티까지 앞으로 하루.
이제 카단이 할 일은 더글라스 가문의 영주성으로 들어가는 것 뿐이다.
‘초대까진 아니어도 제안은 받았었으니, 클로제를 부른다면 안으로 들여보내 주겠지.’
며칠 전에 만났던 클로제에게 파티에 함께 가자는 농담 섞인 제안을 받았었다.
같은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이니 영주성의 성문을 통과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이걸 확인해보지 못했군.”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카단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아공간을 열었다.
툭!
그가 아공간 안에서 꺼낸 건 벨리드 교관에게 받았던 녹슨 풀 플레이트를 꺼내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과연 얼마나 강한 녀석이 탄생할지 궁금하군.’
갑옷에 달라붙은 망자의 원한이 짙을수록 리빙 아머는 강해진다.
짙은 원한의 리빙 아머는 100기의 해골 병사보다 더 강하다는 건 이미 네크로맨서들 사이에서 증명된 사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갑옷에서는 한이 가득한 망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상급 던전도 문제 없겠지.’
과연 이 짙은 원한이 깃든 갑옷을 일으키면 어떤 리빙 아머가 탄생할까?
카단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갑옷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