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카단은 곧바로 더글라스 영주성으로 향했다.
‘일찍 오길 잘했군.’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성문 앞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아마 조금만 더 늦었다면 파티에 참여하러 온 귀족들 때문에 한동안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카단이 성문 앞으로 다가오자, 문지기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오늘은 블랑쉬의 생일을 기념하는 파티가 있는 날.
분명 귀족들이나 유명인들이 영주성을 찾아올 것이기에 어느 때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평민처럼 보이더라도 귀족이 보낸 선물을 대신 전달해주는 사람일 수도 있었기에 정중한 자세를 유지해야만 했다.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어진 카단의 대답에 문지기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단의 차림을 살폈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서라기엔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복장이었다.
“선물 전달이 아니라 파티에 참여하러 오셨다고요?”
의아함을 느낀 문지기가 다시 물었고, 카단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보통 파티에 참여하는 귀족분들은 화려하게 입고 오실 텐데….’
겉만 봐서는 귀족인지 평민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었기에 문지기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혹시 초대장을 받으셨습니까?”
“아, 그건 아니고 제안을 받긴 했었습니다.”
“초대도 아니고 제안이요? 누구한테…?”
“클로제 더글라스…님? 이라고 해야 하나?”
카단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문지기는 이내 결심한 듯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냈다.
“어디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그러자 카단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문지기에게 보여주었다.
“이, 이건?”
사자 문양이 새겨진 푸른 보석의 펜던트. 영웅 아카데미 생도라는 증표였다.
“모,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아무나 들여보내선 안 되었기에 제가 의심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카단은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목걸이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럼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자, 잠시만요! 그래도 확인이 필요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클로제 공자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클로제와 블랑쉬와 같은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라지만, 사실을 확인해야 했기에 문지기는 양해를 구한 뒤 어디론가 빠르게 뛰어갔다.
잠시 후.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헐레벌떡 뛰어온 문지기가 길을 열어주었고, 카단은 그의 안내에 따라 성문 너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진짜 카단이네?”
영주성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클로제가 놀란 눈으로 카단을 반겨주었다.
“안녕하십니까.”
“뭐야? 너 왜 왔어?”
“파티에 오라고 저한테 제안하셨잖아요?”
“할 일 있다면서?”
“그때는 블랑쉬의 생일을 기념하는 파티라는 걸 몰랐잖아요?”
클로제는 잠시 카단과 만났었던 일을 떠올려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문지기한테 블랑쉬 불러달라고 하지, 왜 날 불러달라고 했어?”
“오라고 제안했던 건 선배님이시니까요?”
카단이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클로제는 피식 웃으면서 카단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너 괜찮겠어? 이곳에서 널 반겨주는 사람은 나뿐일 텐데?”
더글라스 가문 사람들은 물론 더글라스 영지에 사는 모든 이가 카단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클로제 역시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휴식기가 된 이후 더글라스 가문에서 가장 큰 이슈가 블랑쉬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 카단의 이야기뿐이었으니.
“선배님이라도 계시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도 지금 이 상황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 어떤 때보다도 불편하고 눈치 보이는 도시. 마치 몰래 경찰서 정문을 넘어선 현상수배범이 된 기분이랄까?
“블랑쉬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건 명분이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 거지?”
카단을 살피던 클로제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잖아? 너한테 그 어느 곳보다 불편한 곳일 텐데, 굳이 찾아온 걸 보면 이유가 있겠지.”
“역시 선배님이시군요.”
카단은 순순히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블랑쉬나 내가 아니라 아버지한테 볼일이 있는 거지?”
정말 생각을 꿰뚫고 있는 걸까?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래. 무리하고 무례한 부탁만 아니면 아버지가 노하실 일은 없을 거야. 잘 말할 자신 없으면 그냥 파티나 즐기다 가고.”
이번엔 평소처럼 밝은 느낌이 아니라 꽤 진중한 모습이었다.
그가 진지하게 말하니, 카단 역시 웃음기를 빼고 진중한 얼굴로 대답해야만 했다.
“네. 선배님.”
“파티는 점심에 열리고, 그때까지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면 되는데. 블랑쉬한테 갈 수는 없을 테니, 나랑 놀자.”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가 후배 챙겨야지.”
클로제는 다시 호탕하게 웃더니, 손바닥으로 카단의 등짝을 세게 두드렸다.
쫘아악! 쫘악!
아니, 후려친다는 표현이 맞는 걸까?
***
‘더글라스가 마법이나 치안으로만 유명한 게 아니었지.’
클로제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카단이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생각을 이어갔다.
‘더글라스 가문을 대표하는 단어로 부유함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군.’
성벽 너머로 각 가족 구성원을 위한 성들이 지어져 있었다.
성 한 곳에서 온 가족이 지내는 것이 아닌, 각자 개인의 궁에서 생활한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따로 독립할 필요도 없겠는데?’
영웅 아카데미도 꽤 넓다고 생각했지만, 더글라스 가문의 영주성은 상상 이상이었다.
귀족 중 귀족이란 말이 체감되는 순간.
“어? 카단?”
“어라? 후배가 여기 왜 있어?”
클로제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선 순간, 이전에 만났던 클로제의 동기 ‘루카스’와 ‘아라드’가 놀란 눈으로 카단을 반겼다.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선배님들.”
한 번 본 얼굴들이라고 낯설지 않았다.
“앉아! 우리도 반가워!”
“반가워. 조금 전까지 각자 미래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거든. 우선 우리 대화부터 마무리해도 될까?”
루카스의 인사 뒤에 이어진 아라드의 말에 카단은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며 미소를 지었다.
‘미래라. 하긴 이 세 명 모두 졸업반이었지?’
클로제가 돌아오자 세 사람은 미래를 주제로한 대화를 다시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기사단이나 길드에서 가입 제안 들어오지 않아?”
“뒤를 봐주겠다는 귀족들도 줄을 섰지. 뭐, 이건 졸업반 생도들 모두가 겪고 있겠지만.”
루카스와 아라드는 물론 모든 3학년 생도가 다양한 곳에서 러브콜을 받았고, 이들은 어느 곳에 소속될지에 관한 고민을 이어갔다.
그때 클로제가 고개를 저으며 팔짱을 꼈다.
“난 그 어디에도 소속될 생각이 없다. 이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지.”
“뭐? 클로제, 너 왕국 기사단에서 가입 제안했다면서?”
“5대 기사단에서도 너를 노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루카스와 아라드의 반응에 카단도 놀랍다는 듯 클로제를 바라봤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왕국 기사단과 왕국 5대 기사단에서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일 줄이야.
“그 어느 기사단도 더글라스 가문의 가주 자리보다 좋은 곳은 없을걸?”
이어진 클로제의 말에 루카스와 아라드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네. 우리가 생각이 짧았네.”
“굳이 다른 기사단에 들어갈 필요도 없겠구나.”
두 사람의 반응에 피식 웃던 클로제가 슬쩍 카단을 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가주 자리를 지켜야 블랑쉬가 가디언이 될 때까지 뒷받침해 줄 수 있을 거 아냐.”
클로제는 가디언이라는 자리에 욕심이 없는 것 같았다.
유명한 기사단에서 가입 제안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음에도 가디언보다는 가주가 되어 동생의 밑거름이 되어주려고 했다.
‘역시 좋은 사람이었군.’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 정이 많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카단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세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 구석에서 대화를 엿든던 카단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질문을 던진 클로제는 싱긋 웃었고, 루카스와 아라드도 기대 가득한 눈으로 카단의 대답을 기다렸다.
“음, 저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아카데미 입학했고 힘을 키우는 중이다.
‘가디언과 왕에게 복수할 거라고 말할 수는 없고.’
카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1학년일 뿐이고 당장 강해지는 것말고는 생각해 놓은 게 없습니다.”
카단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세 사람은 실망한 듯한 눈초리로 고개를 저었다.
“자만이다.”
“맞아. 저거 자만이야. 자기는 1학년 1등이다~ 이거지.”
“애초에 2학년 마티아스처럼 졸업도 전에 차기 가디언 자리를 꿰찰 생각이겠지. 기사단에 들어가려는 우리랑은 다르게.”
세 사람이 놀리듯 비아냥거렸고, 카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어진 카단의 대답에 세 사람은 혀를 둘렀다.
“와, 저 입으로 들으니까 굉장히 기분이 나쁜데?”
“저 정도도 대단한 게 아니면 우리는 그냥 뭐…. 발끝에 묻은 먼지만도 못하다는 건가?”
“우리가 기사단이니 가문이니 얘기할 때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세 사람이 장난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영웅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기사단에 들어가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영웅 아카데미를 졸업한다고 해서 생도 모두가 가디언이 되고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재능과 실력, 노력과 운 모든것에게 선택받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영웅의 길에 발길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마티아스가 정말 대단한 거였군. 같이 연습할 땐 조금 바보 같아 보였는데.’
마티아스는 2학년이 되는 순간 차기 가디언 자리를 차지했으니, 가디언이 될 운명이라고 해도 손색없는 자였다.
‘뭐, 난 가디언이 되고 싶은 생각 따윈 없지만.’
카단은 다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클로제와 루카스, 아라드에게 말했다.
“제가 만약 가디언이 되지 않는다면 제 기사단에 가입 제안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와, 이제 대놓고 저러네.”
“2살이나 어린 후배에게 무시당하다니.”
“안 되겠다. 나 졸업할 때까지 실력 좀 더 키워서 더 좋은 곳에 들어가야겠어.”
카단의 농담에 세 명의 3학년 생도는 기죽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로 장난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고.
“클로제 공자님. 곧 파티가 시작됩니다.”
문 너머에서부터 파티 시작을 알리는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단은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고, 루카스와 아라드 역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그때 클로제가 카단을 바라보며 그를 멈춰세웠다.
“카단. 너 그러고 갈 생각이냐?”
클로제의 말에 루카스와 아라드의 시선 역시 카단을 향했다.
“네?”
“아무리 봐도 파티 복장이 아니잖아. 잠깐만 기다려봐.”
클로제는 잠깐 카단을 관찰하더니, 이내 빠르게 걸음을 옮겨 옷장을 향했다.
‘옷을 빌려주려고? 아니, 덩치 차이만 봐도 맞는 옷이 없을 텐데?’
괜히 몰래 아빠 옷을 꺼내입은 차림새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카단은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어차피 옷이야 아공간 속에 많이 넣어뒀으니까.
“이 정도면 되겠군.”
이내 다시 카단에게 돌아온 클로제의 손에는 옷 한 벌이 들려있었다.
옷 크기를 확인한 카단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끔뻑였다.
“내가 어릴 때 입었던 파티복인데, 이 정도면 맞을 거야.”
“어릴 때라면….”
“12살이었나?”
12살 때 이미 카단의 키와 덩치 정도였다니.
‘나도 작은 편은 아닌데.’
카단은 헛웃음을 삼키며 이내 클로제에게 옷을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
“입는 거 어려울 텐데 도와줄까?”
“아, 아닙니다.”
잠깐 고민했던 카단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잠시 후.
파티복을 혼자 입기는 힘들었고, 결국 3학년 생도 세 명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이제야 봐줄만 하군.”
“카단. 은근히 귀족 같은 느낌이 있다? 분명 평민이라고 알고 있는데.”
“평민이고 귀족이고 아카데미 입학한 순간부터 다 똑같지 뭐.”
카단의 새로운 복장에 3학년 생도들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고, 카단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쫘악!
“고맙긴!”
고개 숙여 감사를 전하는 순간, 클로제의 손바닥이 카단의 등을 후려쳤고.
“크억!”
카단은 짧은 신음과 함께 앞으로 튕겨나갔다.
아니, 튕겨 나갈 뻔했다.
클로제가 막 튕겨 나가려던 카단의 어깨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고왔다.
순식간에 어깨동무한 모습이 된 상태로 클로제의 입이 열렸다.
“카단. 아까 내가 한 말 잊지 않았지?”
그는 카단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버지께서 화나시면 곤란하니까, 부탁이든 뭐든 잘 정리해서 말해. 자신 없으면 파티나 즐기다 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