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폭 네크로맨서-53화 (53/186)

제53화

“제 딸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오신 모든 분에게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블랑쉬의 생일 파티는 가주인 ‘오웬 더글라스’의 연설로 시작되었다.

‘어마어마하네.’

한 여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파티의 규모가 이렇게 클 줄이야.

웬만한 귀족들은 전부 이 파티장에 모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더글라스 가문의 위상 때문이겠지.’

파티에 참여한 귀족들은 대부분 카단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귀족 영애의 생일 파티에 가주들이 직접 움직일 수는 없었는지, 어린 귀족들을 대신 보낸 것 같았다.

가끔 평민 같은 사람도 보였는데, 아마도 거래처 사람이거나 귀족을 대신해 선물을 전달하러 온 심부름꾼일 것이다.

“모두 편하게, 그리고 즐겁게 즐기다 가시길 바랍니다. 더글라스를 위하여.”

“더글라스를 위하여!”

“더글라스를 위하여!”

연설이 끝나자, 파티장에 모인 이들이 모두 술잔을 높게 들어 올리며 외쳤다.

“더글라스 가문의 막내. 블랑쉬 더글라스. 인사드립니다.”

가주에 이어서 오늘의 주인공인 블랑쉬가 화려한 의자에서 일어나 손님들을 향해 인사를 전했다.

짝짝짝짝짝!

자신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카단 역시 그녀를 바라보며 박수를 보내고 있었지만, 아직 블랑쉬는 카단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카데미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르군.’

냉철하고 차가워 보이던 귀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으며, 부드럽고 따스한 여인의 모습.

물론 카단에게는 늘 집요하게 승부를 걸어오는 블랑쉬의 모습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선물도 준비했으니까 2학기 때는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집요함이 조금은 덜어지기를 바라며 카단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사이.

“더글라스를 위하여.”

블랑쉬가 감사 인사를 끝내며 술잔을 높게 들었고.

“블랑쉬 더글라스를 위하여!”

사람들은 환호성과 함께 큰 소리로 블랑쉬에게 축하 인사를 보냈다.

본격적인 파티의 시작.

파티장 한편에 마련된 무대 위에서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차분한 멜로디가 파티장을 채웠고,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술잔을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살벌한 시간이 시작됐군.”

그때 루카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살벌한 시간이라뇨?”

파티의 시작이 왜 살벌하다는 걸까? 카단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족들의 파티는 사교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지.”

“젊은 귀족들이 모였으니, 이곳에서 혼사를 구하거나 지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시간이 시작된 거나 다름없어.”

루카스에 이어 아라드도 함께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잘 봐봐. 귀족들 눈이 얼마나 빠르게 굴러가는지.”

“서로의 지위, 재산, 매력, 장래성 등을 파악하는 거야. 혼사, 혹은 지인으로서 노력할 가치가 있는지 평가하는 거지.”

카단이 생각했던 파티와는 또 달랐다.

단순히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목적들을 지닌 채 파티장에 찾아왔다니.

‘그런 거였나?’

어쩐지 두 사람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귀족들의 환한 미소가 모두 가식처럼 느껴졌다.

‘만약 평범한 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끔찍하군.’

따지고 보면 샬로트의 자식인 카단도 귀족이었다.

그러나 샬로트는 평범한 귀족처럼 살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유로웠으며, 카단 역시 자유롭게 사는 법을 보고 배웠다.

아마 다른 귀족처럼 살아야 했다면 카단은 좀이 쑤셨을 게 분명했다.

“슬슬 시작이군.”

“우리도 움직이자.”

카단이 생각에 잠긴 사이, 루카스와 아라드가 어디선가 포장된 선물 상자를 가져왔다.

“선배님들도 사교의 현장에 참여하시는 겁니까?”

“아니. 우리가 뭐하러?”

“영웅 아카데미 생도는 생도라는 사실 자체가 매력이고 지위고 재산이며 장래성이야.”

비록 가디언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웅 아카데미의 졸업생은 어느 곳에서든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된다.

“졸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느 귀족보다 더 나은 삶을 산다는 말도 거짓말이 아니지.”

“그저 사람을 거를 수 있는 능력만 지니고 있으면 돼.”

루카스와 아라드의 말에 카단은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어디 가시는 겁니까?”

“블랑쉬한테 선물 주고 가주님께 인사드리고, 그다음엔 파티를 즐겨야지.”

“이런 자리에선 선물부터 주는 게 좋아. 우린 블랑쉬한테 점수 딸 생각이 없으니, 인사만 간단히 하고 마음 편히 놀아야지.”

루카스와 아라드는 해맑게 웃으며 더글라스 가문 사람들이 모인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굳이 늦게 선물할 필요는 없겠지.’

카단은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은색의 팔찌를 꺼내 확인해보았다.

‘나도 포장이라도 좀 할 걸 그랬나?’

아무래도 화려하게 포장된 선물 상자들을 보니, 은색의 팔찌가 초라하게만 보였다.

‘뭐, 잘 보이려고 준비한 건 아니니까.’

카단은 피식 웃으며 곧바로 루카스와 아라드의 뒤를 따랐다.

“블랑쉬 님을 만나실 분들은 이쪽에서 대기하고 계시면 됩니다.”

더글라스 가문의 사람들은 곧바로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화려한 의자에 앉아 한 명씩 다가오는 이들에게 선물과 인사를 받고 있었다.

귀족들은 줄지어 블랑쉬에게 선물을 건넨 뒤, 가주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블랑쉬와 혼사를 노리는 놈들은 분명 맨 마지막에 선물을 주려고 할 거야.”

“그래야 조금이라도 오래 블랑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카단이 귀족들에게 인사를 받는 더글라스 가문을 바라보고 있자, 앞에 서 있던 루카스와 아라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처럼 일찍 선물을 건네려는 사람들은 이미 더글라스 가문과 친분이 두텁거나, 혼사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이지.”

“아니면 빨리 선물부터 주면서 얼굴도장 찍고, 다른 귀족들과 인맥을 쌓으려는 사람들.”

두 사람의 친절한 설명에 카단은 곧바로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제대로 부탁할 수나 있으려나.’

아무래도 축하받는 자리에서 어려운 부탁을 꺼내는 건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안 되면 어떻게든 따로 찾아뵙기라도 해야겠네.’

파티의 분위기를 망친 사람의 부탁을 누가 들어줄까? 카단은 지금은 우선 얼굴만 비추고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다음 분.”

시녀복을 입은 사람이 루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라드. 같이 가자. 작년에도 그렇게 했잖아?”

“응. 카단 너는 어떻게 할래?”

루카스와 아라드가 선물을 챙기며 물어보자, 카단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혼자 가겠습니다.”

그 대답에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더글라스 가문의 사람들이 모인 곳을 향했다.

루카스와 아라드가 블랑쉬에게 다가가자, 블랑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친해 보이는군.’

한심하다는 듯한 제스처가 아닌, 굳이 뭐하러 왔냐는 듯 미안함이 섞인 제스처.

‘게다가 가주님도 저 두 사람을 반기는 듯하군.’

블랑쉬에게 선물을 주며 짧게 인사를 건넨 두 사람은 곧바로 가주에게 향했다.

가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귀족 특유의 가식적인 미소가 아닌 반가움에서 나오는 미소.

‘가주님의 기분이 한층 더 좋아지셨는데?’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에서 진중한 얘기는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충 인사만 하고 기회를 기다려야겠어.’

더글라스 가문의 장남인 클로제와 함께 있다 보면 가주와 진중하게 대화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다음 분.”

루카스와 아라드의 인사가 끝나자 시녀가 카단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감사합니다.”

이번엔 카단의 차례.

카단은 시녀의 안내에 따라 블랑쉬를 향해 걸어갔다.

붉은 카펫의 끝. 화사한 의자에 앉아있던 블랑쉬는 카단을 발견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깜짝 놀라는 그 모습에 카단은 속으로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네, 네가 왜?”

“축하하려고.”

카단은 귀족도 아니었으며, 초대자 명단에도 없었다.

뜬금없는 카단의 등장에 블랑쉬는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블랑쉬는 카단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당황스러움에도 고고하고 부드러운 귀족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포장은 못 했다.”

카단은 무심하게 주머니에서 꺼낸 은색의 팔찌를 블랑쉬에게 건넸다.

“뭐해? 안 받을 거야?”

선물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블랑쉬도 더글라스 영지에서 카단의 평판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블랑쉬를 제치고 영웅 아카데미의 1위를 차지한 자. 블랑쉬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준 자.

영주민들에게 미움의 대상이었고, 어쩌면 저주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카단이 눈앞에 있으니, 머릿속이 하얗게 될 수밖에.

“정령의 힘이 깃든 팔찌라던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준비했어.”

블랑쉬가 얼떨결에 선물을 건네받자 카단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생일 축하해.”

더 나눌 말이 있을까? 생일도 축하했고 선물도 주었으니, 이제 할 일은 끝났다.

카단은 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달라는 듯 블랑쉬를 바라봤다.

‘많이 당황했나?’

얼마나 당황했으면 새하얀 블랑쉬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화가 난 건 아니겠지?’

괜히 자신을 곤란하게 했다며 화를 내지 않을까? 카단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고마워.”

그러자 정신을 차린 블랑쉬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감사를 전했다.

“조용히 있다가 가.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가도 된다는 듯 블랑쉬가 카단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고, 카단 역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다시 고개를 든 카단의 시선이 파티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의자를 향했다.

위엄이 느껴지는 듯한 의자 위에 앉아있는 자는 가주 오웬 더글라스.

‘무게감이 다르군.’

전생에 봐왔던 조직의 보스들이나 국회의원들과는 또 다른 무게감이었다.

아니, 전생에서 봤던 그 누구도 풍기지 못하는 분위기.

‘가디언만큼은 아니긴 하지만.’

물론 입학시험 당시 마주했던 가디언 대마법사 ‘길버트 루고’만큼의 무게감은 아니었다.

충분히 마주할 수 있을 정도. 아니,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무게감.

“안녕하십니까. 위대한 더글라스 가문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오웬 더글라스 앞에 선 카단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낯선 이의 등장에 오웬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카단을 살폈다.

‘심상치 않은 녀석이군. 죽음의 냄새가 느껴지는 걸 보면 네크로맨서인가?’

카단이 네크로맨시를 사용하지도 않았음에도 오웬은 단번에 카단의 정체를 파악했다.

카단의 몸에서 새어 나온 마나는 죽음의 향을 품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 카단이라고 합니다.”

순간, 떠들썩하던 파티장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하필 악사들이 다음 곡을 준비하던 사이, 카단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바람에 근처에 있는 모든 이가 카단의 이름을 들을 수가 있었다.

의외로 블랑쉬와 클로제는 무덤덤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이상 가주에게 이름을 밝히며 인사하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으니까.

“카단이라면…. 내 딸 아이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줬다던 그 생도인가?”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던 오웬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진 상태였다.

“네. 맞습니다.”

대답은 짧고 간결하게.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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