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그 소문의 생도가 저 사람이라고?”
“블랑쉬 님과 친한 사이인가?”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제 발로 드래곤 레어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는 짓이지.”
카단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이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생 패배를 모르고 살았고, 어디서든 1등의 자리를 놓친 적 없던 블랑쉬에게 패배를 안겨주고 1등의 자리를 빼앗았다.
그런 그가 더글라스 가문의 영주성에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 파티장에서 카단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더글라스 가문의 사람들은 물론 파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카단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영웅 아카데미 1학년 하면 카단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된다면서?”
“아무래도 가장 주목받는 신입생이라니까, 자주 언급될 수밖에.”
침묵에 이어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지만, 파티 분위기는 이어지지 않았다.
분위기를 이끌어가던 악사들도 카단의 이름을 듣곤 연주를 이어나가지 못한 채 멍하니 카단과 가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오웬의 반응을 기다렸다.
과연 딸에게 패배를 안겨준 카단을 어떻게 대할까?
“네크로맨서 카단…. 자네의 얘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네.”
긴 침묵을 깨고 오웬이 입을 열었다.
의외로 그에게선 분노나 기분 나쁘다는 등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무덤덤하게 가주로서의 차분한 모습을 유지할 뿐.
“미천한 제 이름을 알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크하하! 어느 누가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를 향해 미천하다 하겠는가?”
마치 클로제처럼 호탕하게 웃던 가주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2성일 때 입학하여 얼마 전에 4성이 되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네. 사실입니다.”
“대단한 재능이군. 내가 살면서 봤던 네크로맨서 중 가장 발전이 빨라.”
띄워주기 위한 가벼운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감탄.
더글라스 가문의 가주로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네크로맨서를 많이 만나봤으나, 카단처럼 급격하게 성장하는 네크로맨서는 본 적이 없었다.
“아직 부족합니다.”
“그렇겠지. 그 재능을 지녔으면 지금 발전 속도도 만족스럽지 않을 거야.”
카단이 겸손하게 대답하자, 오웬 더글라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성장을 이 오웬 더글라스가 주시하고 있겠네. 자네라면 차기 가디언의 자리도 헛된 꿈이 아닐 테니.”
이어진 가주의 말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가주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카단을 두고두고 지켜보겠다는 것은 카단의 성장을 기대한다는 뜻.
그렇다면 가주는 카단을 인정한 것일까?
“블랑쉬의 패배 소식이 들렸을 땐 깜짝 놀랐었네. 언젠가 패배를 경험하겠지 싶었는데, 입학하자마자 그 소식이 들릴 줄은 몰랐으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패배하는 건 저였을 겁니다.”
중압감을 느낄 만도 했지만, 카단은 조금도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클로제가 헛웃음을 지으며 눈썹을 들썩였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놈이네.’
귀족 중 귀족이라는 더글라스 가문. 그 가문의 가주 앞에서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자식인 나조차 아버지와 대화할 때 저렇게 여유롭진 않은데.’
자신조차 가질 수 없는 여유를 지녔으니, 클로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네크로맨서라고 해도 카단은 평민 출신이다. 귀족을 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평민 출신이 귀족 앞에서 기죽지 않은 모습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영웅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도 더글라스 가주 앞에서는 긴장하기 마련.
클로제의 기억 속 가주 앞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건 가주보다 작위가 높은 귀족과 왕족, 그리고 가디언뿐이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카단을 바라보던 클로제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하긴. 저 녀석은 나도 그렇고 루카스와 아라드를 대할 때도 어려워하지 않았지.’
상대가 누구이던 카단은 긴장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작위도 계급도 카단을 긴장하게 하는 상대는 없는 것일까?
‘웬만한 귀족보다 낫군.’
클로제의 시선이 이번엔 가주인 오웬 더글라스를 향했다.
가주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카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시지? 싫어하긴커녕 눈빛에 관심이 가득하신데.’
다른 사람들 역시 클로제처럼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오웬 더글라스가 왜 저렇게 카단에게 관심을 두는 것일까?
그때.
“그런데 혹시 내 딸과는 무슨 사이지?”
오웬이 얼굴에 웃음기를 빼며 질문을 던졌다.
숙덕거리던 파티장의 분위기가 다시 무거워졌고,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저 사람들이 놀라 헙! 하고 숨을 멈춘 소리만이 곳곳에서 들려올 뿐.
직접 질문을 받은 카단은 전보다 심한 압박을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아빠들이란 어디든 다 똑같은 건가.’
물론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블랑쉬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
그저.
“영웅 아카데미의 동기일 뿐입니다.”
카단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말했고, 그제야 오웬의 얼굴에 다시 자상한 미소가 그려졌다.
“블랑쉬가 아카데미 동기들을 초대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이 먼 곳까지 찾아와줄 친구가 하나는 있었군.”
“저는 우연히 클로제 선배에게 소식을 들어 이렇게 올 수 있었습니다. 초대장도 없이 파티장에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카단은 정중한 자세로 사과를 전했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블랑쉬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평민 출신이 어떻게 아버지 앞에서 저렇게 뻔뻔할 수 있지?’
그런 블랑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단과 오웬 더글라스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용서는 무슨. 나야 고마울 뿐이지. 이렇게 찾아와 파티를 빛내주었으니 난 그저 기쁘다네.”
“좋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단은 이쯤 하면 됐다 싶었는지 숙였던 머리를 들고 슬슬 인사를 끝낼 준비를 했다.
“카단. 자네에게 부탁. 아니, 제안 하나 하고 싶은데, 들어보겠나?”
가주는 카단이 고개를 드는 순간,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제안…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카단이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봤다.
더글라스 가문의 가주가 뭐가 아쉽다고 고작 영웅 아카데미 1학년 생도에게 부탁. 아니, 제안한다는 걸까?
카단은 물론 파티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의아하단 얼굴로 가주의 말을 기다렸다.
파티장엔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적막만이 맴도는 곳. 누가 이곳을 파티장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러한 적막 속에 가주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아들 녀석과 대련하는 걸 보고 싶은데.”
이어진 말에 사람들은 입을 틀어막으며 놀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버지?”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의 말에 클로제와 블랑쉬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며 놀란 모습을 보여주었다.
파티 도중 갑자기 대련이라니.
그러나 정작 제안받은 카단은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어질 가주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부담스럽다는 건 알고 있네. 대련이라고 하지만 자네가 불리한 건 사실이니까.”
6성 검사인 클로제와 4성 네크로맨서인 카단. 애초에 대련이 성립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가르침을 위한 대련이 아닌 승부를 내기 위한 대련이라면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 조건.
“클로제 선배는 6성에 도달하였고 곧 7성을 앞두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이제 막 4성이 된 자네와 차이가 클 거야. 게다가 경험과 실력 차이도 무시할 순 없겠지.”
가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도 모르고 제안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조건을 걸고 대련하는 게 어떨까 싶네. 단순한 대련이 아닌 10분간 대련하며 버티는 건 가능하겠나?”
“버티기 대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버티기 대련은 실제로 강자와 약자가 대련할 때 자주 등장하는 방식이다.
일정 시간 동안 강자를 상대로 버티는 것.
“그래. 더해서 클로제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추가하지. 만약 10분을 버텨내면 자네의 승리일세.”
이어진 말에 카단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상대를 쓰러트리는 게 아닌 방어를 하든 공격을 하든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되는 대련.
‘게다가 상대가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버티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아.’
어렵겠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조건.
‘하지만 굳이 내가 이 대련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카단에게는 무의미한 대련이었다. 강자와의 대련이 좋은 경험이 된다고는 하지만, 파티장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광대가 되고 싶진 않았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단순히 가주의 호기심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이내 마음을 정한 카단이 입을 열려는 순간.
“만약 자네가 이 대련에서 이긴다면 특별히 자네의 부탁 하나를 들어주도록 하지.”
가주 오웬 더글라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탁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도록 하겠네.”
이어진 가주의 말에 이를 지켜보던 이들이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땅을 달라고 해도 주실 분인데?”
“만약 양자로 받아달라고 하면 그것도 들어주시려나?”
“후원자가 되어달라고 하면 평생 더글라스 가문의 지원을 받게 될텐데?”
“블랑쉬 님과 혼인하게 해달라고 해도 들어주실 생각인가?”
오웬 더글라스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광범위했다.
“법에 어긋나지 않으며 더글라스 가문이 위협되는 일이 아니라면 모든 들어주겠네.”
그 말에 카단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러면 일이 쉽게 풀리는데?’
무의미한 대련에 의미가 생겼으니, 이 대련을 피할 이유는 없어졌다.
어렵게 자리를 마련해 무작정 도시 렐페이라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것보다 훨씬 좋고 확실한 기회가 생겼다.
‘더글라스 가문이면 도시 렐페이라의 소유권을 돈으로 사는 것도 가능해.’
그뿐이랴? 가문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소유권을 얻게 된 도시 렐페이라의 치안을 좋게 바꿔놓을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내 마음을 정한 카단이 가주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부족하지만 도전해보겠습니다.”
그러자 클로제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카단의 옆에 섰다.
“아니, 아버지. 제 의사도 물어보지 않으시고 이러시면 제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가주의 뜻이라면 클로제가 거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카단이 대련을 받아들였으니, 이 대련을 거부해서는 안 됐다.
“너에게도 조건 하나를 걸어주도록 하마. 명성을 걸어야 할 대련인데 마땅한 포상은 있어야겠지.”
오웬은 근엄한 미소를 지으며말을 이었다.
“그래. 네가 이긴다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즉시 기사단 하나를 만들어주마.”
그 말에 클로제의 눈이 반짝였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가주가 내민 조건이 마음에 들었는지, 파티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옆에 있던 카단은 순간 깜짝 놀라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클로제를 바라봤다.
‘기합이 너무 많이 들어갔는데?’
이 거대한 남자를 상대로 10분을 버티는 게 가능할까?
클로제가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인 대련. 분명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클로제 옆에 서고 나니 희망이 조금씩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