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느닷없이 마족의 기운이라니.
평온하기만 하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 녀석들이 마족이라는 소리야? 아니면 마족의 수하인가?”
카단은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며 루나에게 물었다.
“아니. 마족이었다면 여기에 소환되자마자 내가 느꼈겠지. 저 녀석들에게 마족의 기운이 묻어 있을 뿐이야.”
카단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루나를 바라봤다.
“다른 건 모르겠고. 저 녀석들이 마족의 힘으로 되살아난 녀석들이라는 건 확실해.”
“그렇다면 여기 마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건 아닐 거야. 그렇게 짙은 마족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거든. 있어봤자 마족의 수하겠네.”
마족의 수하라면 카단 혼자서도 상대가 가능할 것이다.
‘마족이 없다는 건 다행이네.’
카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루나를 바라봤다.
‘뱀파이어가 마족의 기운을 느낄 줄이야.’
만약 이곳에 마족이 있다고 했다면 카단은 공략을 포기하고 곧바로 던전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준비도 없이 마족을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
‘마족의 수하라면 영혼의 결정을 얻을 수 있겠어.’
불안감이 사라지고, 기대감이 차올랐다. 부푸는 기대감에 카단의 얼굴엔 미소가 걸렸다.
“뭐야? 왜 웃어?”
그 모습을 본 루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카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마족이 없는 곳. 그러나 마족의 기운이 남아있는 던전.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영혼의 결정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럼 잘 부탁할게.”
“마나는 충분해?”
루나가 질문을 던지자,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절반도 남지 않았지만, 네가 있다면 문제는 없어. 저번처럼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네.”
마족을 상대하지도 않을 테니, 마나가 얼마나 있던 상관 없었다. 뭐, 루나가 있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고.
“마족의 수하라도 보통 몬스터보다 강하다는 거 잊지 마. 끝까지 긴장하고.”
“던전 안에서 긴장을 풀 수는 없지. 걱정하지 마.”
루나는 경고를 담은 눈빛으로 카단을 바라보다가 이내 주먹을 쥐며 다가오는 플래시 골렘을 향해 달려갔다.
‘이번에도 주먹질이려나?’
카단은 달려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퍼억!
그러나 주먹질 한 번에 살이 터져나가는 플래시 골렘을 확인하곤 카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
***
루나까지 소환하자 던전 공략은 더욱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다른 언데드들은 필요가 없었네….’
해골 병사와 리빙 아머, 놀 형태의 플래시 골렘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아니, 나설 기회가 없었다.
퍼어어어억!
루나가 휘두르는 주먹 한 방에 거대한 플래시 골렘의 살덩이가 터져나갔다.
자신보다 몇 배는 큰 골렘을 상대로 모래성 부수듯 주먹질하는 루나의 모습을 보면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나중엔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도 안 가네.’
루나의 전투를 지켜보던 카단은 잠시 팔짱을 끼며 생각해봤다.
‘만약 루나를 소환하고 클로제와 대련했다면 어땠을까? 클로제에게 마나 제약이 없더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10분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클로제를 쓰러트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만큼 루나가 보여주는 뱀파이어의 파괴력은 엄청났으니까.
“답답해. 나 먼저 갈 테니까 잘 따라올 수 있지?”
“어?”
“갑자기 튀어나오는 녀석들은 알아서 처리해. 위험할 것 같으면 다시 돌아올게.”
공략 속도가 느리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나는 사냥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카단에게 통보만을 남긴 채 곧장 앞으로 튀어 나갔다.
물론 걱정되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마주할 언데드들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이후 던전 공략은 쉬웠다.
아니, 공략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정찰대처럼 멀리 앞서나간 루나가 곳곳에 숨은 언데드를 처리했고, 카단은 그녀가 만들어준 평온한 시체의 길을 걷기만 하면 됐다.
카단의 모습을 보면 공략하러 온 사람이 아닌 던전을 탐사하기 위해 온 사람 같았다.
‘탐사도 아니고 산책이지.’
그저 걷기만 하는 것이 카단이 하는 전부였다.
‘실전 경험을 쌓는 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여기서 오래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플래시 골렘과 해골 마법사를 상대로 충분히 싸워봤다.
더 쌀을 경험이랄 것도 없었다. 지금은 반복적인 사냥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빠르게 공략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던전 끝에 있을 마족의 수하를 찾아내는 거지.’
달그락, 달그락.
해골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중, 던전 깊은 곳에서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내려가는 계단 찾았어.”
그 목소리에 카단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더 편하네.’
목소리가 들려온 곳까지 가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몬스터는 물론 곳곳에 숨겨진 함정까지 루나가 모두 부숴놓은 상태.
루나 덕분에 용병들이 공략하길 꺼리는 이 던전이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루 만에 끝내는 건 불가능이다.’
루나 덕분에 빠르게 25층까지 내려왔지만, 아직도 던전의 주인이나 마석 따위는 발견할 수 없었다.
‘대충 12시간은 훨씬 지났을 거 같은데?’
종일 공략에만 몰두했지만, 던전의 끝은 여전히 보이질 않았다.
아마 밤이 되지 않았을까?
“여기 내려가는 계단 찾았어.”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단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루나. 일로 와.”
루나를 부르는 소리가 벽을 타고 멀리까지 전달되었고, 곧이어 루나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 카단 앞에 섰다.
“왜?”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다시 출발하자.”
“지쳤어?”
“지쳤지. 쉬지도 않고 계속 걸었는데. 뭐, 너한테 할 말은 아니겠지만.”
“난 괜찮은데?”
“난 인간이잖아. 쉬어야 해.”
더글라스 영주성에서 아침을 먹고 정오가 되기 전에 출발했다.
오웬이 준 마법 스크롤 덕분에 단번에 던전에 도착할 수 있었던 카단은 별다른 정비 없이 곧바로 공략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않은 상태.
“뭐, 나쁘지 않은 선택이네.”
루나는 카단의 선택을 따르겠다며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카단. 밑으로 내려갈수록 마족의 기운이 짙어져. 언데드도 위에 있던 녀석들보다 강해졌어.”
먼지를 털던 루나가 카단에게 보고하듯 말했다.
“그래?”
“응. 아까 플래시 골렘 하나는 한 번에 쓰러지지도 않더라.”
여태까지 한 방에 쓰러지지 않은 플래시 골렘은 없었을 텐데.
카단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어질 루나의 말을 기다렸다.
“뭐 위협적이진 않아.”
“넌 괜찮아? 다친 곳은?”
카단이 루나를 이리저리 살피며 묻자, 루나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괜찮다니까? 아니면 카단 너는 쉬고 있을래? 내가 밑에까지 쭉 내려가 볼게.”
루나는 아직 힘이 남아돈다는 듯 발을 동동거렸고, 카단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야. 너도 돌아가서 좀 쉬어. 일어나면 다시 소환할 테니까.”
역소환 할 테니 집에서 푹 쉬고 있어라. 카단이 그렇게 말하며 손짓하자, 루나가 뚱한 얼굴로 카단을 바라봤다.
“여기서 쉬어도 되는데? 왜 굳이 마나를 낭비하려고 그래?”
루나를 소환하는 데에는 절반 이상의 마나가 필요했다.
수천의 해골을 소환하고도 멀쩡한 카단이 절반 이상의 마나를 사용할 정도로 루나를 소환하는 데에는 부담이 컸다.
다행히도 루나 역시 다른 언데드처럼 소환할 때만 마나가 소모되었고, 유지하는 데에는 따로 마나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야 너도 편하게 쉬고 싶을 테니까. 덕분에 마나도 거의 회복했어. 무엇보다 이런 곳에서 재우는 게 좀 그래서.”
“괜찮아. 이런 곳에서 자는 게 뭐 대수라고. 이불이랑 베개만 줘.”
꼬마 숙녀의 모습으로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마치 어른인 척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참. 이 녀석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텐데.’
물론 뱀파이어인 루나는 카단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것도 훨씬.
“잠깐만 기다려봐.”
카단은 곧바로 아공간을 열었고 그 안에서 모닥불을 피울 재료들과 야영에 필요한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야영 준비를 끝내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야영이라면 10살 때 생존 훈련이라며 홀로 무인도에 보내졌을 때 실컷 해봤으니까.
카단이 야영을 준비하는 사이, 그의 해골 병사들이 근처에 있는 시체들을 멀리 치우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이 정리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단도 야영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자, 다 됐어. 들어가서 쉬어.”
카단이 막사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루나가 천천히 다가와 카단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런데 있잖아.”
옷깃을 잡은 루나를 바라보자, 그녀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카단을 향해 말했다.
“나 배고픈데?”
그녀는 자신의 배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고,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카단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네. 우리 식사를 걸렀구나. 잠깐만.”
카단은 다시 아공간을 열더니, 그 안에서 커다란 소풍용 가방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뭔가 카단과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모양의 가방이었다.
“이런 가방도 들고 다녀?”
루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카단과 소풍용 가방을 번갈아 가리켰다.
“나도 받은 거야. 준비해줬는데 거절하기도 어려웠고. 아무튼 간식을 챙겨줬다니 이거라도 먹자.”
더글라스 영주성을 떠나기 전 클로제가 시녀들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준 간식이라며 카단에게 건네주었다.
왜 소풍용 가방에 넣어줬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호탕하게 웃으며 큰 손으로 카단의 등을 두드리는 클로제를 향해 거절 의사를 밝히긴 힘들었다.
‘덕분에 이렇게 또 배를 채우는군.’
카단은 클로제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소풍용 가방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우유가 담긴 유리병 두 개와 예쁜 박스에 포장된 샌드위치들이 들어있었다.
양을 보아하니 성인 남성 4몀이서도 배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
‘뭘 이렇게 많이 줬어?’
아무래도 오웬 더글라스가 추천해준 던전이 하루 만에 공략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공략하는 데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이렇게 챙겨준 건가?’
그 배려심에 고마움을 느끼며 카단은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루나에게 건넸다.
그러자 루나가 눈을 반짝이며 샌드위치를 붙잡았다.
“이게 인간들이 먹는 요리야?”
“뭐, 다 비슷하지 않아? 너가 사는 곳엔 이런 게 없나?”
“없어. 우린 주로 날것만 먹으니까. 가끔 구워 먹기도 하는데, 생으로 먹는 게 최고야.”
그 대답에 다시금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건 샌드위치라는 거야.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만약 별로라면 집으로 돌아가서 식사하도록 하고.”
카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루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루시아 언니가 인간들의 요리는 맛있다고 했어.”
카단은 그제야 생각해냈다.
‘루시아 선생님이랑 자주 식사하긴 했었는데.’
샬로트의 사역마이자 카단의 선생이었던 뱀파이어 ‘루시아’ 역시 인간들의 요리를 즐겨 먹었다.
그제야 안심한 카단은 어서 먹으라며 손짓했고, 루나는 작은 입으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이래서 다들 딸바보가 된다는 건가?’
오물쪼물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루나의 모습을 보니, 괜히 전생에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석훈아. 너는 결혼 안 하냐? 너 닮은 자식 하나 낳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니까?
-형님. 저 진짜 바보 된 것 같습니다. 딸 아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더라니까요?
-자식 바보 중 가장 바보는 역시 딸바보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는 아들도 사랑하지만.
-안 되겠다. 저 오늘은 일찍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딸 아이가 치킨 먹고 싶다고 하네요.
무자비한 조폭들의 세계에도 딸바보는 존재했다. 가정을 꾸리고 조직을 그만두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대로 조직에 남은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번 카단. 아니, 이석훈에게 살면서 자식은 한 번 낳아봐야 하지 않겠냐며 매번 귀찮게 굴었었다.
‘녀석들이 대충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알 것 같네.’
루나가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보니, 괜히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이런 평온함도 나쁘진 않군.’
카단은 곧바로 유리잔을 꺼내 우유를 따랐고.
“천천히 먹어.”
그대로 루나에게 건네주었다.
“응!”
“맛은 괜찮아?”
“응! 이거 맛있는데? 그런데 이 작고 빨간 건 뭐야?”
“딸기.”
“이거 들어간 게 제일 맛있어. 하나 더 먹어도 돼?”
“많이 있으니까 많이 먹어.”
다행히 샌드위치는 루나의 입맛에 잘 맞는 것 같았다.
“하나 더!”
“응?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