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던전 안에만 있으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겠네.’
잠에서 깬 카단은 곧바로 야영 도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푹 자고 일어났지만, 해를 볼 수 없으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 정도 지났겠다고 하며 짐작할 뿐.
‘피곤함도 충분히 덜었고, 몸 상태도 괜찮네.’
던전 안에서 잠을 잤다고 하지만 위험할 건 없었다.
잠을 잘 필요가 없는 해골 병사들과 리빙 아머가 밤새 주변을 경계하며 보초를 섰기에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루나도 푹 쉰 거 같고.’
루나 역시 편하게 잤는지, 전날보다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카단.”
카단의 시선을 느낀 루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카단의 손목을 붙잡았다.
“샌드위치 더 없어?”
“어제 네가 다 먹었잖아.”
카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설마 그 많은 샌드위치를 다 먹어버릴 줄이야.
“쩝.”
루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다음에 또 준비할게. 넉넉하게.”
“그래!”
또 준비해준다는 말에 신났는지 루나가 다시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오늘도 내가 먼저 갈 테니, 조심히 잘 따라와!”
루나가 재빨리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카단이 자세를 낮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오늘은 같이 가자. 마족의 기운이 점점 짙어진다며?”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족의 수하쯤은 어렵지 않아. 그 두꺼비보다 훨씬 약하니까.”
“네가 그랬잖아. 보통 몬스터보다 강하니까 긴장하라고.”
“그건 네가 인간이니까….”
어쩐지 무시당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카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전한 게 제일이야. 혹시 모르니까 같이 이동하자.”
그러자 루나가 무언가 깨달은 듯 손뼉을 짝! 하고 부딪혔다.
“아! 네가 위험할까 봐 그런 거구나?”
카단은 콧방귀를 뀌며 루나를 바라봤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내가 위험할까 봐 그래. 내가 위험할까 봐.”
치이익.
카단은 루나의 머리에 묻은 먼지를 떼어주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에 붙은 잔불을 꺼버렸다.
치이이익.
“그럼 출발할까?”
잠시 후.
“여기다.”
지하 39층. 그 끝에 도달했을 때 루나가 걸음을 멈췄고 손가락으로 거대한 문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서 마족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어.”
“마족은 아닌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물어보자 루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하급 마족도 이보다 강한 기운을 풍겨. 확실히 마족은 아니야. 마족의 수하인 것 같아.”
그녀의 말에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고리를 붙잡았다.
마족이 없다면 걱정할 건 없다.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슈우우우우우웅!
문이 열린 순간, 거대한 도끼가 크게 회전하며 카단을 향해 날아왔다.
“어?”
카단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도끼를 피해냈다.
‘깜짝이야.’
자칫 몸이 두 개로 쪼개질 수도 있던 상황.
스릉.
카단은 단검을 꺼내 자세를 취했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문 너머의 도끼를 던진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건 또 뭐야?’
괴상한 생명체.
거대한 몸을 지닌 무언가가 카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입…자. 생포… 한다…….”
분명 오크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머리 부분은 멧돼지의 머리가 달려 있었다.
쿵! 쿵! 쿵!
멧돼지 머리를 달고 있는 오크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카단을 향해 달려왔다.
‘그나저나 생포라니?’
보통은 죽인다고 할 텐데. 카단은 왠지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깊이 생각을 이어갈 순 없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달려오는 괴물 앞에서 여유를 부릴 순 없으니까.
카단은 괴물을 주시하며 움직임을 살폈다.
‘막으면 죽는다.’
강력한 힘으로 휘둘러진 도끼를 고작 단검으로 막아낼 순 없는 일.
카단은 타이밍에 맞춰 공격을 피해낼 준비를 했고.
부우우웅!
이내 카단 앞에 도달한 괴물이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괴물의 도끼는 카단에게 닿을 수 없었다.
퍼어어어억!
카단의 옆에 있던 루나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곧바로 멧돼지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쿠우우웅!
육중한 괴물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맞다, 루나가 있었지.’
갑작스러운 전투 상황에 루나의 존재를 깜빡하고 있었다.
루나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털며 쓰러진 괴물을 바라봤고, 카단도 그녀의 시선에 따라 쓰러진 괴물을 바라봤다.
‘키메라?’
쓰러진 괴물을 살피던 중, 카단은 오크의 몸과 멧돼지 머리 사이로 보이는 바늘자국을 발견했다.
괴물의 정체는 인위적으로 다른 생명체를 섞어놓은 키메라.
‘키메라 제조는 오래전에 잊힌 고대 네크로맨시일 텐데?’
카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최고의 네크로맨서라고 불리던 그의 아버지 샬로트 역시 키메라 제조법을 알고 있지 않았다.
오래전에 잊힌 고대 네크로맨시 ‘키메라’. 그런데 어째서 그 키메라가 눈앞에 있는 것일까?
“마족이 만든 키메라야.”
카단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키메라를 바라보던 루나가 말했다.
“어?”
“이 키메라, 마족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어. 인간이 만든 게 아니야.”
루나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역시 마족이 왕국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뜻인가?”
“그렇겠지. 이게 그 증거고.”
키메라는 플래시 골렘과 다르게 지능도 있고 감정도 느끼는 괴물.
중급 던전과 어울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존재.
아마 던전을 탐사하던 자가 키메라까지 발견했다면 이 던전은 중급 던전이 아닌 상급 던전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지. 왕국이든 기사단이든 나서서 곧바로 공략했겠지.’
위험하기보단 존재 자체를 믿을 수 없는 괴물이었으니.
카단이 쓴웃음을 짓는 사이, 키메라가 육중한 몸을 다시 일으켰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
“괜찮겠어?”
키메라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었기에 카단이 조심스레 물었다.
“응. 괜찮아. 혹시 모르니까 넌 조심하고.”
뱀파이어 앞에선 키메라의 존재도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일까?
루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하며 곧바로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여차하면 마법으로 도와주면 되니까.’
마냥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그러나 카단도 알고 있었다. 루나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존재라는 걸.
단순히 주먹만으로 싸운다고 하더라도 카단은 루나를 이길 수 없었다.
주먹질 한 번에 플래시 골렘을 폭격하듯 터트리는 그녀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어야 할까?
안전하고 확실하게 던전 공략을 끝내기 위해선 그녀의 뒤에서 서포트 해주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이게 네크로맨서의 전투 방식이기도 하고.’
카단이 직접 키메라를 쓰러트리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리빙 아머와 놀 형태의 플래시 골렘을 앞세운다면 마족의 수하가 된 키메라라고 하더라도 쓰러트리는 건 가능할 터.
‘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루나가 처리하는 게 가장 빠르고 깔끔한 상황에 굳이 카단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꾸웨에에엑….
카단의 예상대로 전투는 빠르게 끝이 났다.
침입자를 처리한다던 키메라의 몸 곳곳에는 구멍이 뚫렸고, 더는 일어설 힘이 남지 않은 키메라가 바닥에 쓰러졌다.
콰직!
이내 루나의 발길질로 겨우 붙어 있던 숨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카단. 이리 와 봐. 이거 보이지?”
루나는 쓰러진 키메라의 등을 가리켰고, 카단은 곧바로 걸음을 옮겨 그녀가 가리킨 곳을 확인해보았다.
“마족의 증표. 마족의 수하가 맞았네.”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검붉은색 육망성이 키메라의 등에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알고 있었네?”
“예전에도 본 적 있어.”
카단의 대답에 루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왜 이렇게 마족이랑 인연이 자주 닿아?”
“나야 모르지.”
카단은 가볍게 웃으며 키메라 몸 위로 떠오른 검붉은색 구체를 바라봤다.
우웅.
루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는지, 검붉은 구체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루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잠깐만 루나.”
카단은 곧바로 팔을 뻗어 영혼의 결정을 쥐었고.
슈우우욱!
영혼의 결정을 쥐는 순간, 불길한 마력이 빠른 속도로 카단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러자 루나가 깜짝 놀라며 카단을 바라봤다.
“왜, 왜 너한테서 갑자기 마족의 힘이 느껴…. 어라? 사라졌어. 잠깐만. 너 뭐야? 왜 갑자기 강해졌어?”
루나는 당황스러운 듯한 모습으로 카단에게 질문을 던져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조차 끔뻑이지 못한 채 카단을 응시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카단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무언가 결심하곤 당황한 표정의 루나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네크로맨서의 전설 중 아는 거 있어?”
카단은 조심스레 그리고 차분하게 ‘영혼의 결정’을 볼 수 있다는 것부터 네크로맨서의 전설까지 카단이 숨겨온 진실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마족의 힘을 흡수할 수 있게 됐어. 지금처럼.”
‘전설은 무슨 전설, 거짓말 하지마.’ 또는 ‘사기적인 능력이네!’라며 소리칠 줄 알았지만.
“몸은 괜찮아?”
그녀가 내뱉은 첫마디는 걱정이었다.
“어?”
“마족의 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자칫 마족의 힘에 몸을 빼앗길 수도 있어.”
“아, 나도 걱정했는데, 다행히 부작용 같은 건 없었어. 나한테 지금 마족의 기운이 느껴져?”
루나는 대답 대신 카단을 뚫어지게 쳐다봤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설에서도 마족의 힘을 흡수한다고해서 그 힘에 잡아 먹혔다고 하진 않았어.”
“음…. 그래서 네가 이렇게 빨리 강해질 수 있었구나.”
아무래도 루나는 네크로맨서에 관한 전설을 믿기로 한 것 같았다.
하긴 이렇게 눈앞에서 지켜봤으니 믿을 수밖에 없는 걸까?
“응. 이 힘을 얻으려고 일부러 이 불쾌한 던전에 들어온 거야.”
루나는 찝찝함을 덜어낼 수 없었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마족의 힘을 흡수하는 인간이라니….”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나에게 필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해.”
카단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마족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니, 최대한 빨리 강해져야지.”
언제 또 마족을 마주할지 몰랐다. 왕국에서 마족과 계약했고, 또 왕국은 샬로트의 유산을 찾고 있었으니까.
‘아버지의 유산을 왜 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단이 왕국에게 칼날을 들이밀며 정체를 드러낸 순간, 분명 왕국과 계약한 마족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해져야 해. 그러니 이 능력을 얻은 건 행운. 아니,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
영혼의 구체에서부터 흘러나온 불길한 마족의 힘은 카단에게 흡수된 순간 사라졌다.
그저 순수한 마력이 되어 카단의 몸과 마나 하트를 성장시켜줄 뿐.
루나가 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카단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 살포시 올려놨다.
“걱정하지 마. 내가 마족이 되는 일은 없어.”
“네가 마족이 되면 난 마족의 부하가 되는 거야. 명심해.”
“알았어. 그럼 일단 방 안을 살펴볼까?”
루나의 머리 위에 올려놨던 손을 다시 가져오며 카단은 키메라가 튀어나왔던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 이상한 곳이네.”
괴상한 조각상들이 가득했고, 방 가운데에는 제단처럼 생긴 넓은 평상이 존재했다.
“그러게. 인간의 피 냄새가 나. 그것도 많이.”
따라 들어온 루나의 말에 카단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루나는 그저 피 냄새를 느낄 뿐이었지만, 네크로맨서인 카단은 방 안에서 무수한 죽음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는데.’
10층 이후로는 던전 안에서 죽은 인간들의 기운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방안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죽은 인간들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루나. 여기까지 오면서 인간의 피 냄새를 맡은 적 있어?”
“아니. 없어. 이 방에서만 나.”
도대체 어떤 던전이기에 던전의 주인이 있는 방안에만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것일까?
카단은 의심쩍은 눈으로 곳곳을 살피다가 이내 제단처럼 생긴 평상위에 올려진 양피지 한 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인간의 언어가 아닌데?’
양피지를 살펴보자, 그곳엔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적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인간은 읽을 수 없는 글자. 인간들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였다.
“루나. 이거 읽을 수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루나에게 물어보자, 루나가 총총 다가와 제단 위에 올려진 양피지를 바라봤다.
“응. 마족의 언어야. 그리고 이건 마족 지령서네.”
양피지를 확인한 루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마족 지령서?”
카단이 되묻자,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읽어주었다.
“남쪽 오크들의 서식지에서 제물을 잡아 마법사들의 무덤에 보관할 것이다. 늘 그렇듯 침입자가 있다면 생포해서 제단 위에 올려둘 것.”
그녀의 목소리에 카단은 당황한 얼굴로 루나를 바라봤다.
“앞부분만 다시 읽어줄 수 있을까?”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양피지의 내용을 읽었고, 카단은 충격받은 얼굴로 허공을 바라봤다.
‘남쪽 오크들의 서식지라면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