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가면을 쓴 남자가 어둠을 틈타 토벌대 근처로 다가왔다.
녹슨 풀 플레이트 갑옷과 해골 병사들이 인간을 둘러업은 채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베이스캠프의 바로 앞.
가면을 쓴 남자가 리빙 아머와 해골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고.
툭, 툭, 툭.
언데드들이 들고 있던 기절한 인간들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기에 둔다고 인간들이 찾아낼까?”
그러자 펑퍼짐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찰병이 지나다니는 길목이야. 아마 곧 정찰병이 이들을 발견하겠지.”
가면을 쓴 남자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여자아이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의 눈은 바닥에 내려놓은 세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기절만 했다.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가면 남자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카단이었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지?”
루나는 후련하다는 듯 손을 탁탁 털며 카단을 바라봤다.
그러자 카단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리빙 아머와 해골 병사들을 역소환했고, 곧바로 오크들의 서식지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잠시 후.
“아니, 다 끝났는데 여긴 왜 왔어?”
오크 군락지 근처에 있는 풀숲 뒤편에서 루나가 의아하단 표정으로 카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은 분명 카단과 루나가 오크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었던 그 장소였다.
“네가 말했잖아. 저 군락지에 오크 중 절반 이상이 마족의 수하들이라며.”
“그런데?”
“그렇다면 얻을 건 얻고 가야지?”
루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카단을 노려봤다.
“지금 저 녀석들을 사냥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무리 영혼의 결정인지 구슬인지 흡수하고 마나랑 체력이 회복되었다고 해도 불가능해. 무리야.”
“단순히 회복만 되는 건 아닌데.”
“아무튼.”
루나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하자 카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 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위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이어진 대답에 루나는 눈을 끔뻑이며 멍하니 카단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쿵! 쿵! 쿵!
땅이 울리기 시작하며, 멀리서부터 수백이 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인간들?”
루나가 깜짝 놀란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토벌대가 좀 많이 늦었네.”
카단과 루나가 하급 마족을 죽이고 클로제와 그의 일행을 구출하는 사이에도 토벌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토벌대에 남아있는 병력만으로 오크들을 뚫고 클로제와 그의 일행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사령관은 하는 수 없이 지원 병력을 기다렸다.
“저 인간들은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벌써 어두워졌는데, 이제 와서 뭘 어쩐다고?”
루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볼을 부풀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인질을 구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죽는 것 역시 두고 볼 순 없었겠지.”
카단은 토벌대를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토벌대로서는 지원 병력을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을 거야. 그리고 이 정도면 꽤 빨리 온 거고.”
카단이 처음 오크 군락지에 도착했을 때도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전력이 부족한 토벌대가 바로 달려오지 못했을 뿐이다.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루나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 여차하면 도와주면 되고.”
와아아아아아아!
카단이 루나에게 말을 건네는 사이, 풀숲 너머에서부터 수백 명이 내지르는 함성이 들려왔다.
풀숲 너머를 확인하자, 토벌대가 빠른 속도로 군락지를 향해 돌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내 격돌하는 인간과 오크.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크와호! 크라한!
처음부터 붉은 피부를 지닌 오크 챔피언이 앞서서 새로 정비하고 돌아온 토벌대를 반겨주었다.
그러나 토벌대는 조금도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죽여!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
“군락지 안에 생포된 사람을 찾아! 마법사들은 웬만하면 범위 마법을 자제하고!”
재정비하고 돌아온 토벌대는 처음과 달리 6성 이상의 능력자들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용병 길드와 마법사 길드. 게다가 영주성의 기사단까지 합류한 토벌대였으니, 전보다 강해졌을 수밖에 없었다.
크라아악!
어둠 속에서 오크들의 비명이 들렸다.
6성 이상의 실력자들은 오크를 학살하기 위해 온 만큼 최선을 다해 오크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풀숲에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보던 카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전투를 벌이는 토벌대와 오크를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오로지 쓰러진 오크의 시체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검붉은색 구체만을 쫓고 있었다.
‘미쳤다.’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영혼의 결정만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단 아래 숨겨진 13개의 마석과 클로제 일행을 구하며 흡수하게 된 4개의 영혼의 결정.
그것만으로도 카단은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단은 만족하지 않고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영혼의 결정을 흡수할 수 있을까?
그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이렇게 풀숲에 숨어 토벌대를 응원하며 기다리는 것이었다.
“조금 더 밀어붙여! 이제 거의 끝이다!”
이내 풀숲 너머로 다 끝나간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풀숲 사이로 얼굴을 뺴꼼 내밀며 전장을 확인해보았다.
‘6성 이상들을 모아놓으니 미쳤다는 소리밖에 안 나온다.’
빠른 사냥 속도도 대단했지만, 크게 다친 부상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다는 것에 더 큰 감탄을 내뱉었다.
자잘한 상처를 얻은 이들은 보였어도 쓰러지거나 죽은 이들은 없었다.
새로 정비한 토벌대는 어느덧 군락지 안까지 들어왔고, 살아남은 오크들을 빠르게 사냥하기 시작했다.
쿠웅….
이내 군락지 입구를 지키던 고블린 챔피언이 먼저 무릎을 꿇었고.
크와아아!
군락지를 지키던 오크 족장마저 숨을 거두게 되었다.
“승리다!”
“구석구석 잘 뒤져! 살아서 숨은 오크들까지 모두 죽여버려!”
토벌대의 승리.
“빌어먹을. 처음부터 이 정도를 준비했으면 편하잖아! 애초에 6성 이상만 좀 모았으면 좀 좋아?”
그 승리 속에 사령관에게 불만을 품은 이들도 환호했고.
“포로를 찾아라! 이 빌어먹을 오크 녀석들이 어디다 숨겼는지 모르겠어!”
누군가는 오크들에게 붙잡혔었던 클로제와 그의 일행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사령관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사령관이 군락지 한가운데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이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와 사령관 앞에 멈춰 섰다.
“정찰병이 베이스캠프 앞에서 납치됐던 세 명의 토벌대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뭐?”
“다행히 몸 상태는 멀쩡해 보였습니다!”
이어진 보고에 사령관은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사령관으로서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까?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사령관이 다리에 힘이 풀린다는 듯 주저앉자, 보고를 전하던 이가 냉큼 달려와 그를 부축해주었다.
사령관은 부축 당한 채 군락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오크를 찾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생존자는 멀쩡하다고 한다! 다들 전리품만 챙겨서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도록 하자!”
사령관의 외침에 사람들은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대답하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전리품을 충분히 챙겼다고 생각한 사령관은 토벌대를 이끌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이내 휩쓸린 오크 군락지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럼 슬슬 출발해 볼까?”
카단은 오랜 시간 숨어 있더니 찌뿌드드하다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허공에 떠다니고 있는 검붉은색 마나 구체를 향했다.
“여기에 있는 거 죄다 흡수하려고?”
루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카단에게 다가왔고.
“걱정하지 말. 봤잖아? 하급 마족을 죽이고 얻은 마석에서 힘을 흡수하는 거. 그리고 멀쩡하다는 거.”
카단은 가면을 고쳐 쓰며 영혼의 구체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카단은 마족의 수하가 아닌 오크들은 곧바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즉 바닥에 널브러진 오크의 시체들은 전부 마족의 수하라는 뜻.
카단은 오크의 시체를 챙기거나 영혼의 결정을 흡수하며 주인 없는 군락지를 돌아다녔다.
‘오크들로 해골 병사를 만들면 얼마나 강하려나? 플래시 골렘을 강화하는 것도 좋겠지.’
카단은 마치 남의 돈으로 쇼핑하듯 군락지 곳곳에 있는 영혼의 결정과 오크들의 시체를 수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카단의 걸음이 오크 족장의 시체 앞에 멈춰졌다.
오크 족장 위에 있는 검붉은색 구체는 다른 구체들보다 더 짙은 색을 지니고 있었다.
카단은 자연스레 힘을 흡수하려다 문뜩 무언가 생각났는지 곧바로 아공간을 열었다.
“나와.”
아공간 속에서는 놀 형태를 한 플래시 골렘이 천천히 걸어 나왔고.
카단은 플래시 골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도 이게 보여?”
카단이 가리킨 건 오크 족장 위에 떠 있는 영혼의 결정.
크르릉.
플래시 골렘은 이질적인 눈동자로 카단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언데드의 눈에도 영혼의 결정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고대 네크로맨서들은 플래시 골렘에게 영혼의 결정을 집어넣기도 했다는데.’
카단은 잠시 아이작 교수에게 들었던 네크로맨서의 전설 중 하나를 떠올렸다.
-전설 속 네크로맨서는 골렘 안에 영혼을 넣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전설이 현실이 된 지금. 카단도 골렘에게 영혼의 결정을 넣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혼의 결정을 골렘에게 넣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혼의 결정은 카단의 손이 닿는 순간 흡수되곤 했으니.
그렇다면 플래시 골렘의 몸에 영혼의 결정을 어떻게 넣어야 한다는 걸까?
카단은 고민하듯 미간을 찡그리며 플래시 골렘과 영혼의 결정을 번갈아 봤다.
“아?”
순간 어떤 방법이 떠올랐는지, 카단은 플래시 골렘을 향해 다가갔고.
“아프진 않을 거야.”
푸른색이 아닌 녹색의 마나를 손에 두른 채 플래시 골렘의 상체 위로 올려놓았다.
그러자
쑥!
녹색의 구체가 플래시 골렘의 상체에서부터 뽑혀 나왔다.
철퍼덕.
마력의 핵이 뽑힌 놀 형태의 골렘은 그대로 힘을 잃으며 털썩하고 바닥에 쓰러졌지만, 카단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그의 신경은 손에 들린 마력의 핵과 영혼의 결정에만 쏠려 있는 상태.
‘이 마력의 핵을 영혼의 결정에 직접 가져다 대면…?’
카단은 곧바로 마력의 핵을 든 손을 뻗어 영혼의 결정 근처로 가져다 댔다.
쏴아아아악!
그 순간 영혼의 결정이 마력의 핵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됐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영혼의 결정은 조금도 카단의 몸에 흡수되지 않았고 오로지 녹색의 구체 안으로만 흡수되었다.
이내 영혼의 결정이 모두 마력의 핵 안으로 흡수되자, 카단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쓰러진 플래시 골렘에게 다가갔다.
스륵.
영혼의 결정을 흡수한 마력의 핵을 다시 플래시 골렘 상체에 천천히 밀어 넣었고, 뒤로 두 걸음 정도를 물러섰다.
뜨드드득!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쓰러졌던 놀 형태의 플래시 골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플래시 골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멍한 눈빛으로 카단을 바라봤고.
“혹시 말… 할 수 있어?”
카단은 그런 플래시 골렘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놀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무어라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짐승의 으르렁 소리가 아니었다.
크…와…카….
플래시 골렘의 입에서 나온 언어는 분명 오크의 언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