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카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하자 생도 하나가 카단에게 다가왔다.
“난 2학년 파에론이라고 한다.”
카단 앞에 멈춰선 파에론이라는 자가 악수를 청했고, 카단은 자연스레 그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아, 네. 1학년 카단입니다.”
파에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얘긴 많이 들었다. 1학년 중 가장 강하며 3학년 클로제 선배와 대련도 했었다고?”
갑작스러운 칭찬에 카단은 고개를 갸웃했고, 파에론은 그런 카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다.”
“부탁 말입니까?”
부탁하러 왔다기엔 무척이나 뻔뻔한 얼굴과 빳빳한 자세.
“그래. 2학년 중 네크로맨서가 없어서 대련할 기회가 없었거든? 연습 대련을 신청하러 왔다.”
2학년이 1학년에게 직접 찾아와 대련을 신청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식당에 있던 1학년 생도들은 헛숨을 삼키며 이어질 두 사람의 대화를 기다렸다.
“초면에 미안하지만,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까?”
파에론이 다시 한번 말을 꺼내자, 그 뒤에 서 있던 2학년 생도들도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카단에게 말했다.
“나도 부탁할게! 네크로맨서와 꼭 붙어보고 싶었거든!”
“과제 때문에 언데드 던전에 다녀와야 하는데, 도움 좀 부탁하마.”
조금의 굽힘도 없이 당당하게 해오는 제안들.
과연 이것을 부탁이라고 해야 할까 명령이라고 해야 할까?
‘나쁜 제안은 아니지만.’
지금 카단의 실력이라면 1학년 생도들보다 2학년 생도들과 대련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사람은 극한의 순간에 성장하는 법.
1학년들을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2학년들과 대련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게다가 다양한 전투 경험을 얻게 될 테니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
그러나 문제도 있다. 이렇게 2학년들을 한 명, 한 명 전부 상대해주다 보면 카단은 개인의 시간을 빼앗기게 될 것만 같았다.
‘뭐든 처음이 쉬운 법이니.’
처음부터 이렇게 당당하고 뻔뻔하게 제안해오는 것을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하 부리는 듯한 태도를 보일 것이 뻔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2학년들의 연습용 허수아비 신세가 되겠지.’
이내 생각을 정리한 카단이 고개를 살짝 꾸벅인 뒤 정중하게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굳이 거절의 이유까진 말하지 않았다. 부탁해온 건 그들이고,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카단은 정중하고 단호한 대답을 내뱉을 뿐,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자 카단에게 다가왔던 2학년 생도들의 표정이 확 굳었다.
실망감에 물든 시선들이 카단을 향했고, 앞서 말을 전해왔던 파에론은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후배. 너무 단칼에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 텐데.”
“충분히 고민하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요.”
카단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뭐, 대가가 없어서 그래? 대련비라도 준비할까?”
파에론은 가시를 세우며 말했지만, 이번에도 카단은 여유롭게. 그리고 정중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뇨. 얼마를 주신다고 하더라도 부탁을 받아 줄 생각은 없습니다.”
냉철한 거절에 파에론이 잠시 당황하는 것 같더니, 이내 얼굴을 붉혔다.
“좋은 의도로 다가왔더니, 무슨 장사꾼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네.”
파에론이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내비치자, 뒤에 있던 생도들도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1학년 최강자라고 하더니,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냐? 너 그거 자만감이야.”
“평민들은 예의라는 걸 배우지 않는 모양이네.”
“영웅 지망생이라는 놈이 상급자한테 보이는 태도가 뭐 그따위야?”
자칫 싸움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에 1학년 생도들은 고민에 빠졌다.
말려야 할지, 교관을 불러와야 할지.
그러나 정작 시기 어린 눈빛을 한 몸으로 받고 있는 카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다니.
“저는 충분히 제 의사를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1학년 중 이 상황에서 이만큼의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고위 귀족의 자제도 아닌 평민 출신의 생도가 선배들의 위협적인 부탁을 거절하며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
1학년 생도들은 속으로 감탄을 하며 이어질 상황을 기다렸다.
그때.
“후배들 보는데 부끄럽지도 않냐?”
식당 구석 쪽에서 누군가 카단과 2학년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옮겼고.
“마티아스?”
그들의 시선 끝에는 2학년 마티아스가 있었다.
“후배한테 잘하는 짓이다. 예의? 선배 대접 받고 싶으면 너희들부터 예의를 좀 차려.”
마티아스가 카단 옆에 멈춰서더니, 2학년 생도들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진짜 멋없는 놈들이네. 부탁을 거절당했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도적이지 영웅이냐?”
이어진 마티아스의 말에 2학년들은 움찔하기만 할 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상대는 2학년 최강자.
반박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당장 이곳에 있는 2학년 모두가 작정하고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는 상대.
2학년 중 당당하게 마티아스 앞에서 여러 이유를 들먹이며 반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심한 놈들이네.’
카단은 강자 앞에서 꼬리를 내린 선배들의 모습에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어쩌면 2학년 중 주목받는 자가 마티아스밖에 없는 이유는 마티아스가 특출나게 강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대련이라면 내가 실컷 해줄게. 어때? 누구부터 덤빌래?”
마티아스가 2학년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자, 2학년들이 움찔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선배가 되어서 도와주지 못할망정 괴롭히지는 말자. 어?”
뒷걸음질 치는 모습에 마티아스가 혀를 차며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 너희들 중 카단을 이길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자신감으로 대련을 신청한 거냐?”
마티아스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2학년들 대부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던 파에론이 인상을 팍 구기며 마티아스 앞으로 다가왔다.
“마티아스. 너 적당히 나대라. 지금 했던 발언은 우리 모두를 무시한 발언….”
“맞아. 무시한 거.”
무어라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마티아스는 가볍게 그의 말을 잘라냈다.
“뭐?”
“무시할만하잖아? 특히 파에론 너. 도대체 어디서 자신감이 나오는 거냐?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웃으면서 던진 도발적인 발언에 파에론은 이를 악물며 팔이 부들거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허나 그의 손은 휘둘러지지 않았다. 아니, 휘두를 수가 없었다.
주먹을 있는 힘껏 내질러봤자 닿지도 않을 것이며, 1분 뒤 식당에 굴러다니는 자신의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
파에론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돌렸고, 뒤에 서 있던 2학년들도 얼굴을 붉힌 채 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
2학년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걸 확인한 마티아스는 몸을 돌려 카단을 바라봤다.
“오랜만이다. 카단.”
“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마티아스는 반갑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카단은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를 전했다.
“일단. 미안하다. 저놈들을 대신해서 사과할게. ”
“전 괜찮습니다. 선배는 괜찮습니까?”
“내가 왜?”
“굳이 저 때문에 다른 동기들이랑 척 지실 필요는 없을 텐데.”
“저 녀석들? 동기라고 하기에도 쪽팔린 놈들이야. 어차피 저 중에는 친한 놈도 없고.”
마티아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카단에게 다가왔다.
“체력 단련은 꾸준히 한 모양이네? 이런 몸을 보고 누가 네크로맨서로 보겠냐?”
마티아스는 반갑다는 시선으로 카단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2학년들과 신경전을 벌였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그 모습에 카단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배님.”
“응?”
“혹시 친구 없습니까?”
“어?”
“친한 놈 없다면서요?”
“어? 아니, 저 놈들 중에 없다고.”
“아, 알겠습니다.”
카단이 안쓰럽다는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티아스가 헛웃음을 삼키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 나 친구 있다니까?”
“네. 나중에 꼭 소개시켜주십시오.”
“난 말이야. 정신머리 제대로 박힌 놈이랑만 친구 한다고. 저 녀석들 중엔 그런 녀석 없고.”
카단이 던진 농담에 마티아스는 열정적으로 해명했다.
그 모습에 카단은 피식 웃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거렸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선배님. 덕분에 괜한 일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괜한 일에 휘말렸으면? 저 녀석들이랑 여기서 한 판 붙어볼 생각이었어?”
“설마요.”
“했네. 했어.”
시끄럽게 지내고 싶지 않아 웬만한 시비는 무시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조금 전처럼 힘으로 압박해온 자들에게 굴복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힘과 지위로 누르려는 자들에게 굴복하면서까지 조용히 지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래. 아무튼 감사하면 오랜만에 한 판 어때?”
마티아스가 허공을 향해 창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고, 카단은 잠시 생각했다.
‘나도 이제 5성이기는 한데.’
단순한 무기술 대련이 아닌 네크로맨서와 창술사로 대련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같은 5성이니 해볼만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과 동시에 교관님을 모시고 정식으로 대련을 신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나 이제 6성이다.”
그러나 이어진 마티아스의 말에 카단은 곧바로 생각을 접었다.
설마 휴식기 사이에 한 걸음 더 멀어졌을 줄이야.
“네. 그럼 밤에 뵙도록 하죠.”
언젠가 마티아스와도 제대로 한번 붙어보고 싶기는 했다.
2학년 최강자. 영웅 아카데미 생도 중 가디언의 자리와 가장 가까운 마티아스를 이긴다면 가디언을 죽인다는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시기도 좋지 않고, 아직 카단은 5성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밝힐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래. 식사 마저 하고. 이따 보도록 하자.”
마티아스는 카단의 등을 몇 번 두드리더니, 이후 손을 흔들며 식당을 빠져나갔다.
마티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단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식당 안의 다양한 시선들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야? 왜들 저렇게 보는 거지?’
식당에 있는 1학년 생도들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카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움이나 어이없음 등의 다양한 감정이 담긴 시선들.
조금은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카단은 애써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자.
“카단. 너 목숨이 몇 개냐?”
“아니, 어떻게 2학년 선배들 상대로 그렇게 목을 떳떳하게 들고 있을 수 있어? 넌 겁이라는 게 없어?”
“미쳤다! 설마 하반기에는 2학년까지 제패할 생각이야?”
“나 이번엔 진짜 감탄했어. 어떻게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냐? 좀 가르쳐줘.”
1학년 생도들이 달려들며 카단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 마티아스 선배와 뜨거운 우정을 나눈다는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마티아스 선배랑 오늘 밤에 대련하는 거야? 보러 가도 돼?”
“나도 구경 갈래!”
이내 카단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하반기에도 조용히 지내긴 틀려먹은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