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루나의 등장으로 상황은 빠르게 종료되었다.
제압당한 발렌티나는 피로 만들어진 밧줄에 묶여 동굴 구석에 앉아 있었고.
“고생했어. 루나.”
“뭘. 이 정도쯤이야.”
그 앞에는 카단과 루나가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풀지 못해? 당장 풀어!”
발렌티나가 악을 써봤지만, 카단과 루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둘이서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루나.”
“왜?”
“이 녀석 마족화가 진행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
순간 의문이 들었다.
발렌티나는 영웅 아카데미의 신입 교관. 재능과 실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강자였다.
그런 그녀가 마족의 힘까지 얻었는데, 루나는 어떻게 쉽게 발렌티나를 제압한 걸까?
“웅. 맞아. 진행 중이지”
“그런데 어떻게 이겼어?”
여태껏 만났던 마족들은 모두 이질적인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루나 역시 힘든 전투 끝에 마족들을 쓰러트려 왔는데, 이번엔 왜 이렇게 쉬웠던 걸까?
“마족화가 진행 중이지 아직 마족이라고 할 순 없어. 지금은 하급 마족만도 못한 정도야.”
루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마족의 힘을 완벽히 흡수해 마족이 되었다면 모를까, 아직 인간이야. 마족의 힘을 흡수한 지 얼마 안 된 평범한 인간.”
“그렇다고 해도 이 사람은 공식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강자인데?”
“그래봤자. 소환수나 부리며 뒤에서 농땡이 피우는 녀석이지.”
루나의 말에 카단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발렌티나는 늘 소환수를 앞세워 전투를 치렀지, 직접 나서서 싸운 적은 드물 거야.’
발렌티나의 소환수는 모두 카단이 붙잡고 있었고, 발렌티나는 속박 마법만을 이용해 루나와 전투를 치렀다.
그것이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고, 루나는 생각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발렌티나가 근접 전투 클래스였다면 위험했겠지?’
마족의 힘을 흡수했다지만, 소환사의 신체 능력으로는 루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맨손으로 하급 마족도 때려잡는 루나가 마족도 아닌 그저 소환사에게 패배하긴 힘들겠지.
“이 녀석이 마족이 되지 않는 이상 날 이길 수는 없을 거야.”
루나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웃어 보였고, 카단은 인정한다는 듯 미소를 그렸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했겠지.’
물론 발렌티나가 약하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루나가 압도적으로 강했을 뿐.
루나가 없었다면 카단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믿음직스럽네.’
카단은 고생했다는 듯 루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고, 곧바로 발렌티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루나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목소리.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발렌티나가 흠칫하며 카단을 노려봤다.
“너, 너 정체가 뭐야! 저 미친 꼬마는 또 뭔데!”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 악을 쓰며 카단에게 외쳐댔다.
그녀의 목소리에 귀가 아팠는지 루나는 인상을 쓰며 손가락을 이용해 두 귀를 막았고.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카단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여기서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싸늘한 질문에 발렌티나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발렌티나의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한 상태였다.
‘어째서 고작 1학년인 애송이한테 내가….’
영웅 아카데미라곤 하지만 고작 생도. 그것도 1학년인 카단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할 줄이야.
그저 카단의 재능이 탐스러웠고,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기 전 카단을 수하로 삼고 싶었을 뿐이다.
‘이 녀석을 내 수하로 삼으면 빠르게 인정받을 수 있었을 텐데.’
패배 따위는 그려본 적이 없었다. 마족의 힘까지 얻은 상태였으니, 아카데미 생도 하나쯤 상대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게 다 저 꼬마 녀석 때문이다.’
그녀의 계획이 완성되기 직전. 느닷없이 이상한 여자아이가 나타났고 상황을 반전시켰다.
기껏 잡아놓은 카단은 포박에서 풀려났고, 포박 마법이 전문인 그녀는 피로 만들어진 밧줄에 묶여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이 속박 마법은 뭐야?’
순간 그녀의 눈에 처참하게 죽은 소환수들이 보였다.
‘빌어먹을 네크로맨서. 저 자식 힘을 숨기고 있었어.’
4성 네크로맨서라고 알려진 카단은 포박에서 풀려나자 5성 네크로맨서의 상징인 데스나이트를 소환했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는 발렌티나의 소환수들을 무참하고 도륙했다.
‘4성이 된 지 두 달밖에 안 지났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5성이 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머리를 맑게 해줄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분노만 쌓일 뿐이었다.
“날 죽일 생각이냐?”
발렌티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카단에게 물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날 죽인다면 네가 곤란해진다는 건 알고 있지?”
발렌티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묶여있는 비참한 신세였지만, 카단이 자신을 쉽게 죽일 수는 없다고.
“영웅 아카데미의 교관인 내가 트롤 서식지에서 죽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거든.”
“글쎄. 과연 그럴까?”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카단은 당황하지 않고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던전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유명한 말이잖아?”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까지 발렌티나가 들고 있던 마석을 들어 올렸다.
“트롤 서식지에 마족이 숨어 있었고, 영웅 아카데미의 교관 발렌티나는 생도를 지키기 위해 영광스러운 죽음을 선택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 그걸 믿어줄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발렌티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마족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마족의 힘을 받은 발렌티나가 마족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테니.
“곤란하고 귀찮은 상황이 생기겠지만, 그렇다고 널 죽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아.”
카단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발렌티나 앞에선 조금의 동요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여유롭고 차가운 모습을 보이려 했다.
“영웅 아카데미에서 그런 걸 가르치더라고. 쓸데없는 감정놀음에 적을 살려두는 멍청한 짓을 하지 말라고.”
후환을 남길 생각은 없다. 카단은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뭐?”
발렌티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카단은 이빨을 드러낸 자를 멀쩡히 살려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차갑게 식은 카단의 표정이. 확신에 찬 눈빛이. 여유로운 미소가 그녀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러니까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거지?”
스릉.
카단이 허리춤에서 천천히 단검을 뽑아내 그녀의 목을 겨눴다.
“사, 살려줘. 살려주면 오늘 일은 내가 없었던 걸로 해줄게!”
차가운 칼날이 목에 닿는 순간 발렌티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묻는 말에 대답할 건가?”
카단의 물음에 발렌티나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죽여….”
발렌티나는 체념이라도 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이번엔 카단이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 앞에서도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죽음을 선택했다.
체념한 발렌티나 앞에서 카단의 단검은 멈추고 말았다.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는데.’
발렌티나를 죽인다면 더 많은 위험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마족이 나타나 발렌티나를 죽였다고 얘기한다면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마족들이 카단을 찾아올 확률도 컸다.
‘아직은 위험해.’
이제야 겨우 하급 마족을 상대할 만큼의 힘을 키웠다.
루나 역시 중급 마족을 상대하긴 힘들 것이며, 상급 이상이 나타난다면 카단은 곧바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슥.
카단은 겨눴던 단검을 치우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를 죽이는 건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살려놓을 수도 없는 노릇.
“곤란하군.”
결국,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못 죽이겠지?”
발렌티나는 희망이라도 마주한 듯 히쭉하고 웃음을 지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네.”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루나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똘망똘망한 눈으로 말했다.
“어?”
카단은 고개를 돌려 루나를 바라봤고, 루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 때문에 곤란한 거잖아?”
“맞아.”
“죽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살려두기도 애매하고.”
“응.”
이어진 그녀의 질문에 카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정보를 얻고 싶은 거지?”
“맞아. 고문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 죽음을 각오한 녀석을 고문하는 건 시간 낭비야.”
뭐가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걸까? 루나는 팔짱까지 껴가며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알려줄까?”
개구쟁이 같은 표정. 음모가 담겼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해맑은 웃음에 카단이 헛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응. 알려줘.”
그러자 루나가 느닷없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카단은 고개를 갸웃했고, 루나는 답답하다는 듯 검지를 이용해 송곳니를 툭툭 가리켰다.
“송곳니? 그게 왜?”
“멍청아. 나 뱀파이어야.”
“설마….”
순간 카단이 헛웃음을 삼켰다.
뱀파이어는 피를 이용해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들어 수족으로 삼는 존재.
“그러니까 이 녀석을 뱀파이어로 만들겠다고?”
“응. 내 수하가 되면 그 어떤 비밀도 다 말하게 돼. 말하기 싫어도 다 말할 수밖에 없어.”
“그게 가능해? 이 녀석은 마족이잖아? 아니, 마족화가 진행 중이라며?”
이미 마족으로 변하고 있는 자를 뱀파이어로 만들 수 있는 걸까?
카단은 잘 모르겠다는 눈으로 루나와 발렌티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직은 가능해. 마족의 힘이 많이 퍼지지 않았거든.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뭐, 선택은 네가 하도록 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지금으로서는 루나의 제안 말고는 떠오르는 방법도 없었다.
카단은 고민이 된다는 듯 루나를 바라봤고, 루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 순진한 웃음을 마주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루나의 말대로만 된다면 이 상황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발렌티나를 죽이지 않아도 되며, 원하던 정보까지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민하던 중 궁금한 게 생긴 카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이 녀석이 뱀파이어가 되면, 이 녀석도 루나 네가 사는 곳으로 가야 하는 건가?”
발렌티나가 중간계로 가버리면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다.
‘아카데미는 상관없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이 여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마족들이다.’
발렌티나가 사라진다면 그녀의 행방을 추궁할 수 있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카단뿐.
정체를 숨기고 올지, 대놓고 마족인 것을 드러내며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마족을 마주하는 건 위험했다.
“아니. 인간계에 머물러도 돼.”
“뱀파이어가 계약 없이 인간계에 머물 수가 있어?”
“마족이 된 인간들도 계약 없이 인간계에 머물고 있잖아?”
루나가 손가락으로 발렌티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마족화가 진행 중인 인간은 이 녀석 하나가 아닐걸?”
그녀의 말에 카단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뱀파이어로서 인간계에 있어도 된다는 거지?”
“응. 뱀파이어도 똑같아.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면 따로 제약받는 게 없어.”
어쩐지 루나의 뒤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문제?”
“일반 사람이라면 그냥 지금 상태로도 바로 뱀파이어로 만들 수 있지만… 이 녀석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잖아?”
“힘들다는 뜻이야?”
“힘들긴 한데, 가능해. 그러니까….”
말을 이어가던 루나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카단을 향해 손짓했다.
“응?”
카단은 그 의미를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루나는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피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