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다.
분명 조금 전까지 성벽 위 병사들이 느꼈던 감정.
그러나 상황이 역전되었다.
고블린들은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해골 군단을 바라보며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은.
“저,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멍하니 해골 병사들이 보여주는 학살의 현장을 관람하기만 할 뿐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직 전투가 끝난 게 아니니 집중해라….”
지휘관 역시 할 말을 잃었다.
긴장하고 싶어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긴장을 푸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지만, 도무지 긴장의 끈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괜히 네크로맨서가 1인 군단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구나.’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상대를 물량으로 극복해내는 네크로맨서의 전술.
네크로맨서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전투를 보며 지휘관은 무력감과 허무함을 느꼈다.
고블린 군단이 절망하고 병사들이 감탄하는 사이.
‘재료들이 제 발로 달려든다.’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던 카단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전장을 빼곡하게 채운 고블린들이 카단의 눈에는 그저 재료로 보일 뿐이었다.
‘불에 뛰어드는 나방 같네.’
언데드 군단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라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고블린은 날벌레와 같았다.
수백의 홉 고블린이 가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홉 고블린들은 전부 카단의 해골 병사가 되고 말았다.
그 순간부터 고블린 군단은 조금의 희망도 없는 전투를 이어가야만 했다.
끼에에에에엑!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고블린들이 소리를 빽빽 질러대며 소통하는 것 같더니,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이 물러난다!”
“끝났다! 이겼어!”
“트라팔가를 위하여!”
병사들은 후퇴하는 고블린들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고.
성벽 아래만 바라보던 카단이 그제야 뒤로 돌아 멀리 보이는 지휘관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쫓아가서 마저 처리할지, 이대로 전투를 끝낼지를 묻는 것일까?
‘위에서 내려온 지시도 없으니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지휘관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여기까지 하지.”
지휘관은 기쁨을 참아내며 무덤덤한 얼굴로 카단에게 칭찬을 건넸고.
이어서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각자 위치를 사수하고 상황을 지켜본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정비하며 대기하도록!”
와아아아아아!
지휘관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풀지 말라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건 승리의 함성이었다.
지휘관은 이내 피식 웃으며 카단을 향해 걸어갔다.
“카단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덕분에 희생 없이 수성에 성공할 수 있었다. 고생했네.”
지휘관이 악수를 청했고, 카단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카단과 지휘관이 손을 붙잡는 순간, 북쪽에서부터 함성이 들려왔다.
“북동쪽 성벽의 전투도 끝난 모양이군.”
졸업반 네크로맨서 에스더가 향했던 성벽. 그곳에서도 무사히 고블린 군단을 몰아낸 모양.
에스더는 6성 네크로맨서였으니 고블린 군단쯤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 혹시.”
카단이 북동쪽 성벽 방향을 바라보자, 지휘관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네. 말씀하세요.”
“저 시체들이 따로 필요한지 물어보고 싶은데.”
지휘관은 성벽 너머 고블린 시체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크로맨서들과 함께할 땐 꼭 물어봐야 하거든.”
“저 시체들이 필요하십니까?”
오크 해골 병사들이 잔뜩 있는 이상, 고블린들의 시체는 딱히 필요가 없었다.
‘고블린들로 언데드를 일으켜봤자, 없느니만 못하고. 홉 고블린도 쓸모는 없지.’
전투 중 일으켰던 홉 고블린 해골 병사들 역시 챙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필요하지. 몬스터 부산물을 팔기도 하고 급할 땐 몬스터의 뼈와 가죽을 이용해 무기를 만들기도 하니.”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카데미 생도들에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필요도 없는 고블린들에 욕심내봤자 의미가 없었다.
“고맙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하게.”
지휘관은 근처에 있는 병사에게 손짓하며 불렀고, 병사 하나가 빠르게 지휘관을 향해 달려왔다.
“이분들을 숙소로 안내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잔뜩 군기가 들었는지, 병사는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병사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고, 카단과 칼리아는 짧게 지휘관에게 인사를 건넨 뒤 병사를 따라갔다.
***
부서진 신전 안.
“야, 멧돼지. 아직 멀었어? 나 너무 오래 기다리는데?”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조각상 위에 앉아 비아냥대며 말했다.
“생도 하나 붙잡아 오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눈치 보고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라고.”
멧돼지 가면을 쓴 여인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담당한 거니까 맡은 일은 확실하게 책임지고 해내야지.”
“우리가 아직 음지에서 활동한다는 걸 알고 얘기하는 거지?”
“우리의 정체가 들통 나면 곤란해지긴 하지. 아직은 숨어서 지내야 할 때고.”
“그걸 알면서 그래?”
“생각보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말이지.”
여우 가면이 피식 웃으면서 말하자, 멧돼지 가면은 화를 삭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재수 없는 놈. 곧 하나 물어올 거니까 기다려.”
그 말에 반가웠는지, 여우 가면은 곧바로 바닥으로 내려와 멧돼지 가면을 향해 걸어왔다.
“드디어 하나 물어오는 거야? 그 하나를 어디서 물어오는데?”
“트라팔가.”
“전쟁의 도시? 아! 생도들을 그쪽으로 지원 보냈구나? 이번엔 어떤 녀석이야? 난 튼튼한 녀석이 좋은데 말이지.”
“네크로맨서야.”
멧돼지 가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여우 가면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어댔다.
“싫어. 다른 놈으로 줘.”
“주는 대로 받아.”
“네크로맨서는 마족화 성공 확률이 너무 낮아. 난 튼튼한 놈을 원한다니까?”
“마족이 된 네크로맨서만큼 좋은 전력도 없을걸?”
“그건 그런데. 쯧.”
멧돼지 가면이 단호하게 말하니, 여우 가면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댔다.
“어쩔 수 없지. 그래. 뭐 언제쯤 데려와? 금방이지?”
“조금 걸려. 일단 트라팔가로 보내놓긴 했고, 이어서 절망의 평원 쪽으로 유인할 생각이야.”
“거긴 통제구역 아니야? 어떻게 유인할 생각인데?”
“다 방법이 있어. 이번엔 무조건 데려올 수 있으니까, 얌전히 기다려. 짜증나게 하지 말고.”
멧돼지 가면이 쏘아보며 말하자, 여우 가면은 진정하라는 듯 손짓했다.
“알겠어. 알겠어. 그나저나 왜 하필 네크로맨서야? 트라팔가의 지원 요청서로 다른 놈들을 불러내도 됐잖아?”
선택지는 많았을 텐데, 왜 하필 네크로맨서를 선택한 것일까?
여우 가면으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멧돼지 가면이라면 분명 네크로맨서가 아닌 다른 생도를 트라팔가로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겸사겸사 알아볼 게 있어서.”
“알아볼 거?”
여우 가면이 고개를 갸웃하자, 멧돼지 가면이 허공을 노려보며 답했다.
“조사해 보니까 마법사들의 무덤을 공략한 게 네크로맨서더라고.”
“네크로맨서가 그 던전을 공략했다고? 아무리 네크로맨서라지만 거길 공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맞아. 내 키메라까지 죽일 정도라면 적어도 6성 이상이어야 해.”
“그러니까 그 던전을 공략한 게 이번에 데려올 그 네크로맨서라는 거지?”
여우 가면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멧돼지 가면은 고개를 저어댔다.
“아니. 확실하진 않아. 이번에 데려올 녀석이 가장 의심되는 녀석일 뿐이야.”
“뭐, 아무튼. 이번엔 확실한 거지?”
“어. 준비되면 부를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기나 해.”
“이번에도 밀리면 나 진짜 가만히 안 있을 거야. 강제로 하나 챙겨올 거니까 알아서 해.”
***
도시 트라팔가 영주성 회의실.
“먼저 트라팔가의 주인으로서 감사하다고 말해주고 싶군.”
중년의 남자가 카단과 칼리아, 그리고 에스더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에스더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옆에 앉은 카단과 칼리아에게 어서 일어나라는 듯 눈치를 보냈다.
스륵.
그렇게 카단과 칼리아까지 일어서자, 에스더는 중년의 남자를 향해 고개 숙이며 말했다.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카단과 칼리아 역시 눈치껏 에스더와 함께 고개를 숙여 예를 차렸다.
트라팔가의 주인은 세 사람을 향해 앉아도 좋다는 듯 손짓하며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이 그 유명한 트라팔가 백작이로군.’
카단은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트라팔가의 주인이라는 자를 바라봤다.
사령관이자 이 도시의 주인.
이곳에서만큼은 왕과 대등한 권력을 지닌다는 변경백 아론 트라팔가.
‘딱히 강해 보이진 않지만, 위압감만큼은 더글라스 가주와 맞먹는다고 볼 수 있겠는데?’
아론 트라팔가는 그 위치에 어울리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목소리, 품위가 느껴지는 자태와 날카로운 눈빛.
‘존재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군.’
전투 실력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없으나, 아론 트라팔가의 존재감이 이 회의실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완벽하게 전쟁이 끝났다고 할 수 없으니, 우선 회의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아론 트라팔가가 미소를 지우며 말하자, 회의장의 분위기가 확 변했다.
“아, 그전에 이번에 왕국 기사단과 용병 길드에서 지원군이 도착했네. 대표자들이 회의에 참석했으니, 간단히 인사들 하지.”
아론이 누군가 가리키자, 지목당한 두 사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콜린퍼스 기사단의 기사 앤서니입니다.”
정복을 입은 금발의 미남형 기사가 먼저 인사를 건넸고.
“용병 길드 대표자로 온 프람이올시다.”
장발의 덥수룩한 수염을 지닌 용병이 이어서 인사를 건넸다.
“지난번에도 기사단과 용병 길드에게 큰 도움을 받았네. 이번에도 잘 부탁하네.”
“네.”
“예.”
아론은 두 사람을 향해 앉아도 좋다 손짓한 뒤,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정찰대의 보고부터 듣도록 할까?”
“성벽 너머로 보낸 정찰대로부터 고블린 로드와 다수의 고블린 챔피언을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회의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분위기는 확 무거워졌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보름 안에 고블린 군단이 움직일 것 같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우리도 정비할 시간은 충분한 것 같군. 군수품은 충분한가?”
아론이 씁쓸하게 혀를 차더니, 이내 회의를 이어갔다.
“무기와 장비는 충분합니다. 그런데 식량이 문제입니다. 며칠 전 식량 창고가 불에 타는 바람에….”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아끼고 아끼면 5일까지 가능합니다. 상인 길드에게 식량을 요청했지만, 아무래도 일주일은 걸릴 것 같습니다.”
회의는 꽤 오래 이어졌다.
과거에 있던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 상황을 파악하며 앞으로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간.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던 중 콜린퍼스 기사단의 앤서니가 손을 들며 말했다.
“제안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해보시게.”
“별동대를 꾸려 고블린 로드를 먼저 처리하는 건 어떻습니까? 고블린 군단을 빠르게 무력화 될 것입니다.”
앤서니의 제안에 지휘관들이 눈을 동그렇게 뜨며 외쳤다.
“말도 안 됩니다.”
“굳이 성벽 아래로 내려가 고블린들과 직접 부딪힐 이유가 없습니다.”
“의미 없는 희생자가 늘어날 겁니다. 가능성이 너무 낮아요.”
“무엇보다 누가 별동대에 참가하겠습니까?”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내뱉었지만, 앤서니만큼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제가 별동대를 이끌겠습니다. 소수정예로 신속하게 이동해 고블린 로드만 처리하고 곧바로 후퇴하는 거죠.”
그러자 잠깐 고민하던 아론 트라팔가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자네가 왕국 5대 기사단 소속이라고 해도 수만의 고블린을 뚫고 고블린 로드를 죽이는 건 쉽지 않을 걸세.”
무엇보다 고블린 군단이 모여 있는 곳은 통제구역인 절망의 평원 근처.
어떤 몬스터나 위험이 도사리는지 알 수 없는 곳이다.
“함부로 절망의 평원 근처에 가선 안 되네. 아무리 자네라도 죽을 수도 있어.”
콜린퍼스 기사단 소속 7성 기사인 앤서니에게 고블린쯤은 개미만도 못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의 평원에서부터 일어날 변수들은 그의 목숨도 앗아갈 수도 있을 정도.
‘무작정 제안하는 건 아니겠지만 위험하다.’
총책임자인 아론 트라팔가는 고민했다.
만약 별동대가 고블린 로드를 처리하게 된다면 어쩌면 전투 없이 이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자칫 7성 기사를 잃을 수도 있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때.
“저도 함께 가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용병 길드의 대표자로 참석한 프람이 손을 들며 말했다.
확실히. 용병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프람까지 가세한다면 성공 확률이 올라갈 것이다.
“두 사람이 나서준다면 의미가 있겠지. 혹시 더 필요한 인원이 있다면 말해보게.”
아론이 조심스레 묻자, 앤서니가 영웅 아카데미 생도들이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군단을 상대로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네크로맨서가 필요합니다. 실력이 좋은.”
그러자 에스더가 짧게 한숨을 내뱉더니, 이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가 갈게요. 6성 네크로맨서 에스더입니다. 이런 작전이라면 제가 참가하는 게 맞아요.”
위험한 작전에 후배를 보낼 수는 없다는 뜻인지, 그녀의 목소리에선 왠지 모를 책임감도 느껴졌다.
“선배. 괜찮겠습니까?”
칼리아가 조심스레 묻자, 에스더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다기보다는 나에게 좋은 경험의 기회지.”
하긴. 콜린퍼스 기사단의 기사와 명성 높은 용병과 작전을 수행하는 건 쉽게 오지 않을 기회일 것이다.
어쩌면 카단은 이 기회를 놓친 걸 아쉬워하지 않을까? 칼리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카단을 살펴보았다.
‘뭐지?’
카단의 표정이 이상했다.
아쉬움의 표정이 아니었다. 전쟁 도중에도 보인 적 없는 경직된 얼굴.
‘뭘 봤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카단의 시선은 기사 앤서니와 용병 프람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카단? 무슨 일 있어?”
칼리아는 작은 목소리로 카단을 불렀고.
“어? 아무것도 아니야.”
이내 정신을 차린 카단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소를 지웠다지만, 눈 속에 그려진 두려움까지는 지워내지 못했다.
카단은 짧게 한숨을 내뱉더니, 다시 앤서니와 프람이 앉아 있는 곳을 바라봤다.
‘멧돼지 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