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공작 부인?’
종일 플로이안 공작 부인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고 다녔다.
그런데 아카데미로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의뢰를 받게 될 줄이야.
“보면 알겠지만, 운반 의뢰다.”
카단이 멍하니 의뢰서만 보고있자, 크리스 교관이 어서 열어보라는 듯 손짓하며 말을 걸어왔다.
“네.”
촤락.
그 말에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의뢰서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지정자 : 카단]
-네크로맨서가 필요합니다.
-팀 인원은 지정한 생도를 포함 최대 3명까지.
[위험도 : 상]
-왕국 최남단에 있는 에어록손 성벽까지 물건을 운반.
-지정된 경로를 통해서만 이동 (최단 거리)
-텔레포트 불가.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진 않았다.
카단을 지정한 이유와 의뢰 내용이 간략하게만 적혀져 있을 뿐.
“단순한 운반 의뢰인데, 위험도가 꽤 높네요?”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크리스가 휴게실 벽면에 그려진 거대한 지도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높을 수밖에 없지.”
벽면에 그려진 지도는 리베라 왕국의 지도였다.
“자, 여기가 임무 시작 지점인 플로리안 공작령이다.”
툭.
“이곳에서 의뢰자에게 물건을 받고.”
그의 검지가 플로리안 공작령이라고 표시된 곳 위로 올려졌고.
스윽.
이어서 그의 손가락이 아래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이곳 에어록손 성벽까지 최단 거리로 이동해야 한다.”
왕국 최남단. 적국과 야만족들로부터 왕국을 지켜내기 위해 세워진 거대한 성벽.
그곳에서 그의 손가락이 멈춰졌다.
“에어록손 성벽이 목적지라서 위험도가 높은 겁니까?”
“아니. 에어록손 성벽은 왕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벽이자,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성벽이다. 이곳이 위험할 리 없지.”
빈번하게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었지만, 왕국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손꼽는 곳이었다.
그의 말대로 에어록손 성벽이 위험해서 의뢰의 위험도가 높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의뢰서에 적힌 최단 거리의 경로가 문제다. 원래대로라면….”
다시 한번 크리스 교관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플로리안 공작령에서 에어록손 성벽까지 지도에 그려진 길을 따라 그의 검지가 빠르게 이동했다.
“이렇게 길을 따라가는 게 가장 안전하다. 그런데 의뢰서에서 지정한 길은.”
다시 한번 크리스의 검지가 플로리안 공작령을 가리켰고.
스윽.
그는 손가락을 일직선으로 내리그었다.
“최단 거리다.”
개발되지 않는 지역. 미개척지를 통해야 하는 경로. 최단 경로를 선택한다면 빠르기야 하겠지만, 안전성의 문제가 컸다.
“문제가 될 게 있습니까?”
카단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크리스는 피식 웃으며 지도에 한 부분을 가리켰다.
“자세히 안 본 모양이군. 잘 봐라. 최단 거리로 가게 되면 이곳을 지나가게 된다.”
그가 가리킨 곳은 나무 그림이 그려져있는 곳이었다.
“다크 엘프의 숲. 에히아스.”
그제야 카단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곳을 지나가야 하는군요.”
“다크 엘프는 인간과 적대적인 종족이지만,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먼저 공격하지 않아.”
“하지만 영역을 침범하는 순간, 가차 없이 죽이려 들겠죠.”
“그래. 이제 이해가 되나?”
크리스는 히쭉 웃으며 다시 카단에게 다가왔다.
“아마 이곳을 안전하게 지나가기 위해 네크로맨서를 찾는 모양이야.”
다크 엘프 숲을 지나야 한다면 최대한 적은 인원으로 팀을 꾸리는 것이 적절했다.
“교관님. 이 숲을 빠르게 지나가야 한다면 암살자나 사냥꾼 클래스의 생도들이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뭐, 아무래도 은밀하고 빠른 녀석들이라면 더 빨리 숲을 지나갈 수야 있겠지.”
크리스 교관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크 엘프들에게 발각된다면 생존하기 힘들 거야.”
다크 엘프들에게 걸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걸리더라도 생존할 수 있어야 했다.
‘하긴 네크로맨서가 느리긴 해도 가장 안정적으로 숲을 지나갈 수 있겠지.’
영체 상태인 언데드 레이스를 소환하여 정찰부터 경계, 감시까지 시킨다면 더욱 안전하게 숲을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강요는 아니다. 네가 거절한다면 다른 곳에 의뢰서를 넣으시겠지.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선택해.”
영웅 아카데미의 네크로맨서는 에스더와 카단 둘. 그중 하나는 아직 임무에서 복귀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카단에게 이 의뢰서가 도착한 모양이다.
“언제까지 결정해야 합니까?”
“의뢰서에 적힌 임무 시작 날짜는 보름 뒤다. 그러니 적어도 5일 안에는 결정해줘야 해.”
크리스의 말에 카단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기회가 주어질 줄은 몰랐는데.’
공작 부인을 만날 명분이 없었기에 고민만 하고 있던 찰나, 곧바로 기회가 찾아왔다.
루나에게 플로리안 공작 부인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그녀가 마족화가 진행 중인 자인이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했다.
일이 쉽게 풀릴수록 의심을 해봐야 한다는 샬로트 잉그마르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공작 부인을 마주할 수 있는지 모른다.’
의심도 가고 불안함도 들었지만, 이처럼 좋은 기회가 또 언제 찾아올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단순한 운반 의뢰다. 다크 엘프 숲만 조심한다면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아.’
이내 카단은 고민을 끝내며, 크리스 교관을 바라봤다.
“이 의뢰를 제가 받아들이게 되면 꼭 팀을 꾸려야 합니까?”
이왕 위험한 곳을 간다면, 혼자가 편했다.
위험한 상황에 힘을 숨길 필요가 없을 테니, 오히려 혼자 의뢰를 수행하는 것이 안전했다.
“말했듯이 위험만 임무다. 1학년을 혼자 보낼 수는 없어.”
그러나 카단이 힘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크리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널 지켜줄 팀원이 필요하다.”
그 말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굳이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크리스 교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을 테니.
‘아, 그러고 보니.’
순간 카단의 머릿속에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혹시 교관님들 중 한 분과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교관? 누구?”
“발렌티나 교관님이요.”
루나에 의해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발렌티나.
그녀와 함께라면 위험한 상황에서도 힘을 숨기지 않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카단이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봤지만, 크리스 교관은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적국으로 잠입하는 의뢰가 아닌 이상 교관이 임무에 함께 가는 건 힘들다.”
“그렇습니까?”
“발렌티나 교관과 친해진 모양이구나.”
“비슷한 소환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시기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카단은 이번에도 아쉬움을 숨기며 대답했다.
“뭐, 팀원은 내가 고민하고 선정한 뒤 내일 저녁에 알려주겠다. 저녁 먹고 연병장으로 올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그만 가서 쉬도록 해. 피곤할 텐데.”
크리스는 이만 들어가 보라는 듯 손짓하며 말했고, 카단은 인사를 남긴 후 교관 전용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흠. 카단이 인기가 좋군. 아무래도 신입생 중에 가장 파급력이 큰 아이니까.”
홀로 남게 된 크리스는 종이 하나를 펼치더니 그곳에 카단의 이름을 적었다.
“그래도 공작 부인께서 카단을 콕 집어서 의뢰를 맡기실 줄은 몰랐는데.”
펜을 이리저리 굴리며 허공을 바라보던 크리스의 미간이 점차 좁아졌다.
“그나저나 이번엔 누구를 붙여주지?”
***
부서진 신전 안.
“뭐? 이번에도 실패라고?”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목소리 좀 낮춰줄래?”
그러자 멧돼지 가면을 쓴 여성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협박하듯 말을 이었다.
“너만 짜증 나는 거 아니거든? 나도 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 난 상태니까 서로 예의 좀 지키자고.”
“예의? 벌써 두 번째야. 도대체 뭔데? 왜 실패하는 거냐고!”
“그러는 너는. 샬로트의 유산은 찾았어? 내가 알기로는 조금의 진전도 없다던데?”
멧돼지 가면의 말에 여우 가면이 헛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멧돼지 가면은 매섭게 쏘아보던 걸 멈추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이번 작전엔 프람을 투입했어. 꽤 잘 키운 녀석이라 충분히 해낼 거 같았거든.”
“그런데 그 용병이 당했다?”
“어. 마족의 힘을 완벽히 흡수하진 않았지만, 중급 마족 정도의 힘은 낼 수 있거든? 그런데 죽었대.”
멧돼지 가면이 짜증 난다는 듯 발을 굴렀고.
쿵!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땅이 크게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진정해. 다 무너져가는 신전이라지만, 더 무너트릴 필요는 없잖아?”
여우 가면은 진정하라는 듯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이봐, 멧돼지. 그래서 누가 그 용병을 죽였는데?”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네크로맨서래. 일행도 있다고 한 거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어.”
멧돼지 가면은 프람이 기사 앤서니를 죽인 것부터 팔 하나가 잘려 죽은 것까지 모두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프람을 죽인 놈은 하나가 아니라는 거네?”
“둘 이상. 일단 알려진 정보는 그래.”
멧돼지 가면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생도 잡아 오는 건 좀 기다려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해야 할 일?”
“확실하진 않은데, 뭔가 의심 가는 녀석이 있거든. 그 녀석을 좀 조사해보려고.”
그 말에 여우 가면이 고개를 갸웃하며 흥미를 보였다.
“누군데?”
“그건 비밀이야. 이제 너도 못 믿겠거든.”
“나를? 왜?”
멧돼지 가면이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여우 가면이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한테 정보를 알려줄 때마다 내 작전이 실패했거든. 이번엔 누굴 데려오려 하는지, 어디서 작전 지역은 어딘지 전부 비밀이야.”
확고한 듯한 목소리와 말투.
아무리 회유한다고 한들 그녀의 마음이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알아서 하라고.”
“만약 녀석이 필요 없어지면 너 줄게.”
“어떤 녀석인 줄 알고?”
“서비스야. 그냥 받아.”
그 말에 여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 거라면 또 감사히 받아야지. 아무튼 알겠어. 그럼 다음 총회의 때나 볼 수 있는 건가?”
“한 달 정도 남았지? 그때까지 너도 샬로트의 유산에 관한 정보를 찾아냈으면 좋겠다.”
멧돼지 가면은 이만 가보라는 듯 손짓했고, 여우는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비스 기대할게.”
***
다음 날.
저녁 시간이 끝난 후 카단은 크리스의 말대로 연병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선 칼리아는 아니고.’
식당에서 만난 칼리아에게 혹시 임무를 받았냐고 물어봤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옆에 있던 알비스 역시 자신은 아직 임무를 다녀온 적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제외.
최소 인원으로 보낸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졸업반 생도 중 하나. 아니면 2학년 생도가 함께 가게 되는 것일까?
“교관님은 아직이시군.”
연병장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니, 식사 후 간단하게 산책하는 이들만 보일 뿐, 크리스 교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응? 저 녀석은 왜 나한테 와?’
그때 연병장 한가운데 서 있던 푸른 머리칼의 여성이 카단을 발견하곤 갑자기 걸어오기 시작했다.
모를 수 없는 얼굴.
“교관님은 이쪽에서 기다리면 되는 건가?”
블랑쉬가 카단에게 다가와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교관님? 혹시 네가 나랑 가는 건가?”
“널 따라가고 싶어서 임무를 받아들인 게 아니니까 괜한 착각하지 마.”
“착각한 적 없는데, 정말 네가 나랑 간다고?”
“응.”
설마 팀원 중 하나가 블랑쉬일 줄이야.
카단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순간, 뒤쪽에서 크리스 교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기다리고 있었군. 늦어서 미안하다. 마지막 팀원을 데려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고, 카단은 다시 한번 헛웃음을 지어야 했다.
“마티아스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