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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네크로맨서-97화 (97/186)

제97화

“왜 그래?”

블랑쉬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카단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아무것도 아니다.”

속삭이듯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카단이 곧바로 표정관리를 하며 고개를 저었다.

‘뭐지? 목소리가 들렸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루나의 외침이 들렸고,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행히 카단이 놀란 모습은 옆에 있던 블랑쉬만 본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것도 가능했던 거야?’

카단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응? 뭐야? 어디 갔어?’

그런데 종탑 위에 있어야 할 루나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자기를 봐달라고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집중 안 해?”

카단이 멍하니 창문 너머를 바라보자, 블랑쉬가 다시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아, 미안.”

카단이 다시 집중하기 위해 몸을 바로잡자, 블랑쉬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공작 부인을 바라봤다.

“아시다시피 성유물은 아공간에도 넣을 수 없습니다. 번거롭겠지만, 직접 들고 가셔야 해요.”

프롤리안 공작 부인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방패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공작령의 기사들에게 시키려고 했지만, 이를 운반할 만한 정예들은 모두 파견 나간 상태라….”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마저도 참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그러자 마티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패를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최고의 실력자들로 구성된 팀입니다. 방패를 무사히 운반해드리겠습니다.”

시작하기 전부터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일까?

마티아스는 전보다 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었다.

“감사합니다. 아, 필요한 비용, 물품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집사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또각, 또각.

공작 부인은 요염하게 걸음을 옮겨 마티아스 앞에 섰다.

“최대한 빨리 출발해주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지만, 물건이 물건인지라. 꼭 성공해주셔야 합니다.”

그녀가 마티아스를 향해 손을 뻗었고, 마티아스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최단 경로로 간다면 10일 정도 후 물건을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사고만 없다면 말이죠.”

개척된 길을 따라간다면 20일이 넘게 걸릴 거리였지만, 다크엘프 숲이라고 불리는 ‘에히아스’를 횡단한다면 10일 정도를 단축할 수 있었다.

마티아스와 악수를 끝낸 공작 부인은 이어서 블랑쉬에게도 다가가 악수를 청했고.

“더글라스 가문의 영애를 이렇게 뵙다니 영광이네요. 잘 부탁드려요.”

“저 역시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블랑쉬는 긴장이라도 했는지 딱딱한 말투로 공작 부인의 손을 붙잡았다.

또각, 또각.

공작 부인은 다시 걸음을 옮겼고, 그녀의 걸음은 카단의 앞에서 멈춰졌다.

그녀는 무언가 확인하는 듯한 눈빛으로 카단을 훑어봤고.

스륵.

이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음?’

공작 부인이 다가오자 향긋한 향이 코끝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그 향마저도 매혹적이었다.

“당신이 네크로맨서 카단. 맞죠?”

“네. 공작 부인.”

카단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저희 기사단장이 이번 작전엔 꼭 네크로맨서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어려운 선택이셨을 텐데, 의뢰를 맡아주셔서 감사해요.”

“무사히 운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네, 감사해요.”

공작 부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이내 걸음을 옮겨 세 명의 생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도록 하죠. 보수는 확실히 할 테니, 무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공작 부인은 그렇게 인사를 남기곤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공작 부인이 응접실을 빠져나간 후, 세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취침 도구, 식사와 요리도구는 정확히 삼등분했으니까 잘 챙기도록 하고. 이 비상금은 내가 챙길게. 이의 있는 사람?”

“없습니다.”

대략 열흘 치의 식량과 돈. 그리고 야영을 대비한 취침 도구까지.

플로리안 공작가의 집사를 통해 여정의 필요한 물품과 돈을 받았고, 세 사람은 보급 물품을 균등하게 나누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마티아스가 긴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방패는 누가 챙기는 게 좋을까?”

그러자 블랑쉬와 카단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왜 날 그렇게 봐?”

마티아스가 눈을 끔뻑이며 묻자, 블랑쉬가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마법사가 무거운 방패를 매고 다니는 건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여정이 길어질 수도.”

단호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을 하니, 반박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그렇지. 아무래도 위험할 거야.”

마티아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이어서 카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네크로맨서입니다.”

“근데?”

“저건 성유물입니다.”

카단이 방패를 가리키자, 마티아스는 그제야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아….”

성유물은 성스러운 힘이 담긴 물건. 당연하게도 네크로맨서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서로를 잡아먹는 극악의 성질.

“망할.”

결국엔 답이 정해져 있었다.

팀의 이동속도와 전투 시 안전을 위해서라도 마법사에게 방패를 맡길 수 없었다.

또한 작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네크로맨서에게 성유물을 맡긴다면 네크로맨서는 힘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들어야 했네.”

정하고 말 것도 없이, 애초에 물어볼 질문도 아니었다.

마티아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방패를 향해 다가갔다.

“뭐, 대충 정해진 것 같으니 바로 출발할까?”

마티아스가 방패를 챙기며 물었고, 카단과 블랑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카단 일행이 성 밖으로 빠져나오자, 노년의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가왔다.

“다크 엘프 숲 근처까지는 마차로 모시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집사는 뒤쪽에 보이는 거대한 마차를 가리켰다.

마차에 걸린 깃발에는 플로리안 가문의 문양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경험이 많은 마부도 준비되었습니다. 다크 엘프 숲 근처까지는 편안하게 이동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어서 집사가 마부로 보이는 남자를 가리켰고.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부는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

마티아스가 앞장서서 집사에게 감사를 전했고, 옆에 있는 마부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성을 빠져나온 뒤 마차를 구할 생각이었으니.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집사는 세 사람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고.

“예. 알겠습니다.”

마티아스는 해맑게 웃으며 마차에 탑승했다.

“다들 타. 공작 부인의 배려 덕분에 더 편하게 갈 수 있겠다.”

마티아스의 말에 블랑쉬가 먼저 마차에 탑승했고, 이어서 카단이 탈 차례였다.

“저기 선배.”

그러나 카단은 곧바로 마차에 오르지 않았고, 조심스레 마티아스를 부를 뿐이었다.

“뭐해? 안 타고?”

“저 여관에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씻을 때 들렀던 여관에 뭘 좀 두고 와서요.”

“중요한 거야?”

“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칠칠찮긴. 알았어. 다녀와.”

마티아스는 어서 다녀오라고 손짓했고, 카단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땅을 박찼다.

얼마나 달렸을까?

종탑 근처 골목에서 걸음을 멈춘 카단은 곧바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루나?”

속삭이듯 루나를 불렀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루나…?”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카단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루나를 불렀다.

덜그럭.

그때 뒤쪽에 있는 나무 상자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이내 나무 상자의 뚜껑이 열렸고, 그 안에서 심통 가득한 표정을 지은 루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나무 상자에서 빠져나왔다.

“꼴이 왜….”

귀족보다 더 우아한 모습을 보였던 루나지만, 지금은 영락없이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얼굴은 물론 옷에도 시커먼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놀리는 거야?”

루나는 원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카단을 쏘아보며 다가왔다.

카단은 가까이 다가온 루나의 머리와 얼굴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주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내가 종탑에 매달린 아이라고 착각했는지, 인간들이 날 붙잡으려고 쫓아오더라고.”

루나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인간들을 피해 열심히 도망 다녔고 결국엔 이렇게 나무 상자 안에 몸을 숨기게 되었다.

“그랬구나…. 아, 그런데 아까 머릿속에 네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거 네가 한 거 맞아?”

루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카단이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질문을 던졌다.

“피의 계약으로 맺어진 사람들은 의지만 있으면 생각만으로도 대화할 수 있어.”

놀랍지는 않았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라면 머릿속으로 대화하는 것 정도야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니.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가장 궁금해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왜 나한테 당장 나오라고 한 거야?”

루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루나. 왜 그래?”

“상급.”

“어?”

“공작 부인인지 뭔지. 그 여자 적어도 상급 이상의 마족이야.”

루나의 말에 카단은 잠시 멈칫했다.

“마, 마족화 진행 중인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라고?”

“응. 마족화가 끝난 인간인지, 마족이 인간계에 와서 인간인 척하고 지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공작 부인의 등에 멧돼지 문신이 있다기에 마족화가 진행 중인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상급 이상의 마족이라니.

“그뿐만이 아니었어. 이 도시 도대체 뭐야? 마족화가 진행 중인 인간들이 종종 보어던데?”

“마족화가 진행 중인 인간들이 또 있다고?”

“응.”

카단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댔다.

수도와 하루 정도 거리인 플로리안 공작령의 주인은 상급 마족이었고, 공작령 곳곳에 마족화가 진행 중인 인간들이 있다니.

“몇 명이나 있는데?”

“내가 본 녀석들만 10명이야.”

어쩐지 그 10명이 끝이 아닐 것 같았다. 아니, 마족이 지배하는 도시가 이 하나가 끝이 아닐 것 같았다.

‘공작령이 이 정도로 마족에게 오염되었으면 다른 도시 상황도 좋지는 않을 거야.’

카단이 입을 다물고 있자, 루나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족 새끼들. 아무래도 인간계를 접수하려고 작정한 거 같은데?”

“상급 이상이면 우리 둘만으로는 무리겠지?”

당황하고 있던 카단이 작은 희망을 지닌 채 조심스레 물었다.

“응. 절대 불가능해. 쓰러트리긴커녕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걸?”

루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런 일로 장난을 치지도 않았으며, 느끼고 있는 모든 걸 진솔하게 내뱉는 사람. 아니, 뱀파이어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말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불길한 기운이 성 전체를 뒤엎고 있었어. 그 힘이 점차 커지기에 급하게 외친 거야.”

루나가 표정을 굳히더니 경고하듯 말을 이어갔다.

“조심해. 지금 상태로 그 여자랑 싸우면 승산 없어. 무조건 죽을 거야. 너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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