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다크 엘프의 숲 ‘에히아스’로 향하는 마차 안.
‘마족이 너무 많다.’
카단은 창문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겨우 하급 마족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는데, 상급 이상의 마족이라니.’
루나와 데스나이트를 소환한다면 중급 마족까지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급 이상의 마족이 등장한다면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이긴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도망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법이 아닐까?
‘아무래도 공작 부인이랑 마주칠 일은 최대한 줄여야겠네.’
어차피 이번 임무가 끝나고 나면 공작 부인을 마주칠 일이 줄어들 것이다.
공작령 근처에 올 일은 없을 것이며, 의뢰가 들어온다고 한들 거절하면 그만.
‘플로리안 공작가가 영웅 아카데미를 후원하고 있다고 했지?’
아카데미의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마다 후원자인 플로리안 가문에서 공작 부인이 대표자로 참여하긴 했다.
물론 이 역시도 마주치지 않으면 그만.
적어도 그녀를 상대할 힘을 키울 때까지는 그녀를 피해 다녀야만 했다.
‘그나저나 상급 이상의 힘을 지닌 마족이 어떻게 인간계에 버젓이 있을 수 있을까?’
두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제약 때문에 힘이 억제된 상태로 인간계에 남아있는 마족. 혹은 상급 이상의 힘을 얻고 마족이 된 인간.
두 가설 모두 부정적이고 두려운 가설이었다.
‘인간이 마족이 되면 인간계에서도 그 어떤 제약을 받지 않는다던데….’
힘이 억제되지 않은 마족을 상대해본 적은 없다.
제약받아 본래의 힘을 쓰지 못하는 하급 마족 둘을 잡아본 것이 전부였으며, 마족화가 덜 된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끝.
만약 공작 부인이 온전히 힘을 쓸 수 있는 상태의 상급 마족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하필 그런 힘을 지닌 마족이 공작 부인의 자리에 앉아 있다니.
플로리안 가문은 공작 가문인 만큼 나름대로 큰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공작 부인과 같은 자가 더 있다면?
‘어쩌면 벌써 왕국이 마족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군.’
도대체 마족으로부터 왕국을 지켜야 할 가디언들은 왕국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하고 있던 걸까?
카단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카단. 무슨 일 있어?”
카단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걸까?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마티아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카단을 살펴봤다.
“아, 그냥 좀 피곤해서요.”
“네가 웬일로 피곤해?”
“그러게요.”
카단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마티아스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푹 쉬어. 공작 부인 덕분에 다크 엘프 숲까지는 편하게 갈 수 있게 됐잖아?”
일반 마차를 탔으면 벌써 몇 번이고 도적들의 습격을 받았을 것이다.
개척된 도로라고 해도 도시와 먼 곳이라면 늘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호위대가 붙어 있지 않은 일반 마차는 늘 도적들의 목표가 되었으니.
“플로리안 가문의 깃발이 달려 있으니, 도적놈들도 쉽게 달려들지 못하겠죠.”
그러나 플로리안 가문의 깃발이 걸린 마차를 건드리는 멍청한 도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편히 쉬어. 공작 부인께서 벌어주신 이 휴식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자고.”
마티아스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공작 부인께서 벌어주신 휴식 시간이라….’
기분이 묘했다. 따지고 보면 마족이 벌어준 휴식 시간.
과연 공작 부인은 공작 부인으로서 의뢰를 신청한 걸까? 아니면 마족으로서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일까?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단순한 임무라고만 생각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카단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블랑쉬는 마차에 탄 순간부터 잠이 들었고, 마티아스도 이제 막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나만 위험한 게 아닐 수도 있어.’
이번 의뢰 역시 쉽게 흘러갈 것 같지 않은 불안감이 들었다.
***
며칠 후.
카단이 탄 마차가 거대한 숲 앞에서 멈춰졌다.
“도착했습니다.”
마부는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로 마차 안을 향해 말했고.
철컥.
이어서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티아스와 카단, 그리고 블랑쉬가 순서대로 내렸고 그들은 개운하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마티아스는 곧바로 마부에게 다가와 감사를 전했고.
“더 들어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 이상은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다크 엘프들의 영역과 가깝잖아요. 저희도 마부님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진 않습니다.”
마티아스가 해맑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 그럼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마부는 두 손으로 마티아스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내 마부는 마차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아카데미의 생도 세 명만이 평원에 남겨지게 되었다.
“저기가 다크 엘프의 숲입니까?”
블랑쉬가 눈살을 찌푸리며 거대한 숲을 가리켰다.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기분이 느껴지는 숲.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이상하게도 불길하게 느껴졌다.
“응. 맞아. 저기가 다크 엘프의 숲. 에히아스야.”
마크로스는 평소와 달리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숲에 들어가서 나오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춰선 안 돼.”
“네.”
“네.”
마크로스의 진중한 태도에 카단과 블랑쉬도 조금은 긴장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차기 가디언으로 지정되어 있는 마티아스가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다크 엘프는 정말 위험한 존재일 것이다.
“카단.”
“이미 소환해 뒀습니다.”
마티아스의 부름에 카단은 허공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마티아스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카단이 가리키는 곳엔 레이스 넷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전방은 정찰. 나머지 셋은 우리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돌아다니며 경계 좀 서줘.”
카단은 레이스들에게 간단하게 명령을 내렸고, 그 모습을 보던 마티아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숲을 빠져나가기까지 너의 역할이 가장 중요해. 알지?”
“네. 문제가 있으면 바로 전달할게요.”
카단 역시 마티아스가 경계하는 다크 엘프들과 마주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레이스를 이용해 다크 엘프들의 위치를 파악한 뒤, 그들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으로만 이동할 계획.
걸리지만 않는다면 안전하게 다크 엘프의 숲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블랑쉬는 어때? 출발해도 되겠어?”
“네. 가시죠.”
긴장이라도 한 것일까? 블랑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차갑게 들려왔다.
“명심해.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조용히 몰래 이 숲을 가로질러야 해.”
은밀하고 신속하게.
마티아스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숲을 향해 걸었고, 카단과 블랑쉬가 뒤를 이었다.
‘으스스한 곳이네.’
숲속에 들어온 순간 온몸에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 들었다.
네크로맨서가 으스스하다고 느낄 정도로 에히아스 숲은 꺼림칙한 기운을 풍기는 곳이었다.
“이 숲은 다크 엘프 외의 다른 몬스터는 없어. 뭐, 짐승들이 있긴 하지만 문제는 없을 거고.”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 숲에서 경계해야 할 대상은 다크 엘프뿐이었다.
“짐승은 무시하고 지나가자. 괜히 피 냄새가 나면 다크 엘프 놈들이 쫓아올 수도 있으니까.”
마티아스는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도 쉼 없이 경고를 이어갔다.
“적어도 3일 정도 이 숲에서 지내야 할 거야. 생각보다 넓고 험한 곳이거든.”
마티아스가 경고를 이어가는 사이, 카단은 씁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공작 부인이 마족만 아니었다면 마음이 좀 더 편했을 텐데.’
카단에게는 다크 엘프 말고도 경계 대상이 하나 더 존재했다.
‘하급, 중급 마족이 나타나면 다행이지. 상급 마족이 나타나면 전멸이야.’
공작 부인이 마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힘을 숨길 수는 없겠네.’
만약 마족이 나타난다면 카단은 자신이 가진 힘을 모두 드러낼 생각이었다.
‘루나를 소환하면 골치가 아프긴 하겠지만, 죽는 것보단 낫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까지 힘을 아끼는 것은 바보 같은 짓.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 걸음을 옮기던 중 전방에서부터 반투명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카단 일행을 향해 날아왔다.
-주, 주인! 멈춰!
반투명한 무언가는 카단이 소환한 레이스였다.
-다크 엘프들이 곰을 사냥하고 있었어. 수가 꽤 많아!
레이스는 반투명한 손을 마구 휘둘러대며 전방의 상황을 보고했고.
“선배. 다른 길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카단은 곧바로 레이스의 말을 마티아스에게 전달했다.
“왜?”
그 말에 마티아스가 걸음을 멈추며 카단을 바라봤다.
“전방에 다수 다크 엘프가 있다네요.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마주칠 겁니다.”
카단은 옆에 있는 레이스를 가리키며 말했고, 마티아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쯧. 할 수 없지.”
숲에 들어온 첫날부터 다크엘프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추격을 피해 숲을 빠져나가기엔 숲이 너무나 거대했다.
대략 3일 정도의 거리.
3일 내내 추격을 피해 다니다간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터.
사락.
마티아스는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 무언가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렸고.
“그러면 이쪽 길로 가자.”
이내 무언가 결정했는지, 옆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조금 돌아가긴 해도 방향은 비슷해. 다크 엘프를 피해 가는 게 우선이니까. 불만 없지?”
“네.”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카단과 블랑쉬는 이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블랑쉬.”
“네?”
마티아스가 지도를 다시 품에 집어넣으며 블랑쉬를 불렀다.
“너무 긴장하지 마. 다크 엘프를 마주친다고 한들 너희가 죽는 일은 없을 거야.”
그녀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마티아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전했다.
짝! 짝!
블랑쉬는 순간 흠칫하더니 이내 손바닥으로 자신의 볼을 때리며 대답했다.
“아, 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애써 긴장한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잔뜩 굳은 얼굴을 보면 단번에 그녀의 상태를 눈치챌 수 있었다.
‘드세 보이던 녀석이 실전에선 엄청나게 긴장하네.’
카단은 블랑쉬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웃지?”
그 작은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블랑쉬가 카단을 노려보며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평민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눈빛은 전보다 살벌했다.
“이제야 좀 너답네. 과도한 긴장은 오히려 위험을 초래해. 어깨에 힘 좀 빼고.”
카단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고, 그 말에 블랑쉬가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설마 평민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블랑쉬가 주먹을 꽉 쥐며 무언가 말하기 위해 카단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때.
“카단. 이쪽으로 정찰 부탁해. 우리는 천천히 이동하자.”
마티아스가 카단을 부르며 지시를 내렸고, 카단은 피식 웃으며 곧바로 마티아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잠시 재정비하는 사이.
스륵.
나뭇가지 위 그늘진 곳에 누군가가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았음에도 카단, 마티아스, 블랑쉬 모두 자신들을 향하는 불길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누군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고.
스륵.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