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휙!
데스나이트 카록의 도끼와 앤서니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멧돼지 가면을 쓴 여성이 몸을 던지거나 숙여서 공격을 피해낸 것이 아니었다.
화륵!
데스나이트들의 일격이 그녀의 목에 닿기 직전, 그녀의 몸이 불로 변했고, 검과 도끼는 불로 바뀐 그녀의 몸을 베고 지나갔다.
“이번 건 좀 놀랐어.”
불로 변했던 여성의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그녀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퍼어어어엉!
순간 그녀의 몸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뒤에 서 있던 데스나이트들이 폭발에 휩쓸려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제법 괜찮은 기습이야. 데스나이트의 오러가 조금 더 강했다면 나도 위험했겠는데?”
멧돼지 가면을 쓴 여성이 흥미롭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데스나이트라니. 힘을 숨기고 있었네? 어린 네크로맨서?”
섬뜩한 그녀의 목소리는 카단을 향했고, 카단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카단 너….”
“너, 너 5성이었어?”
마티아스와 블랑쉬는 전투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놀랍다는 얼굴로 카단을 바라봤다.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집중해요.”
카단은 멧돼지 가면을 가리키며 말했고, 그제야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저걸 어떻게 쓰러트리지?’
몸이 불로 바뀌어 버리면 물리적인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오러를 두른 공격이라면 신체가 불로 변하더라도 타격은 줄 수 있겠지만.
‘지금의 카록과 앤서니만으로는 타격을 주기가 힘들어.’
고작 5성 네크로맨서가 소환한 데스나이트들의 오러로는 가면을 쓴 여성에게 생채기조차 남길 수 없었다.
‘역시 마족이었나?’
평범한 마법사라면 신체를 화염으로 바꾸는 말도 안 되는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대마법사로 불리는 가디언 ‘길버트 루고’조차도 사용할 수 없는 마법.
‘마족이 아니고서야 저런 기괴한 힘을 지녔을 리 없어.’
확신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여성의 정체는 마족일 거라고.
‘물리적인 공격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마티아스뿐이야. 그렇다면….’
카단의 눈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블랑쉬를 향했다.
마법. 그녀의 마법이라면 분명 통할 것이다.
‘불이라면 얼음과 상성이 좋지도 않으니 통한다.’
데스나이트 두 기가 마티아스와 함께 멧돼지 가면을 쓴 여성을 몰아붙이고 그사이 블랑쉬의 마법으로 한 방 먹인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작게나마 희망이 보였다.
퍼엉! 퍼어어엉!
그때 카단과 마티아스의 눈앞에서 갑자기 불꽃이 폭발했다.
“크흑!”
“윽!”
마티아스는 반사적으로 뒤로 날리며 폭발을 피해냈고.
촤르륵!
카단은 불꽃과 자신의 사이로 뼈 방패를 만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털썩!
작은 폭발이었지만, 그 충격에 의해 카단 역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스스스스스스스!
마티아스가 붙잡고 있던 불의 뱀이 블랑쉬를 향해 빠르게 기어갔다.
화륵!
거대한 덩치를 지녔지만, 그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지나간 모든 것을 불태우던 불의 뱀이 곧바로 블랑쉬를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네까짓 게!”
블랑쉬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앞으로 거대한 얼음벽을 세웠다.
콰과과과과광!
그러나 불의 뱀이 휘두른 꼬리는 얼음벽을 손쉽게 무너트렸고.
촤라라라락!
이어서 블랑쉬를 지키고 있던 해골 병사들도 단숨에 박살 냈다.
“으악!”
모든 것을 부순 꼬리는 그대로 블랑쉬를 후려쳤다.
쿠웅!
블랑쉬는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가더니, 이내 거대한 나무에 부딪히며 바닥에 쓰러졌다.
“…….”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거대한 나무에 그대로 균열이 생겨났고, 그 충격으로 블랑쉬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무언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블랑쉬가 쓰러졌다.
“원래 가장 까다로운 놈부터 처리하는 법이잖아? 안 그래?”
멧돼지 가면을 쓴 여성이 히쭉거리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블랑쉬를 가리켰다.
스스스스스스!
그러자 불의 뱀이 거대한 입을 쫙 벌리며 블랑쉬를 향해 기어갔다.
쩌억!
불의 뱀이 막 블랑쉬를 집어삼키려던 순간.
피잉! 콰아아아앙!
오러가 둘린 창이 빠른 속도로 날아와 뱀의 뒤통수를 그대로 관통했다.
창이 관통하는 순간 큰 폭발이 일어났고, 불의 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쿠웅….
불로 이루어졌던 뱀이어서 그런지, 불의 뱀은 재도 남기지 않고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이 빌어먹을.”
창을 던진 자는 당연하게도 마티아스였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재빨리 블랑쉬를 향해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갈비뼈 쪽이 부러진 것 같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짝, 짝, 짝.
불의 뱀이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자 멧돼지 가면을 쓴 여성이 우아하게 손뼉을 쳐댔다.
“대단하네. 한 방에 처리할 줄이야. 차기 가디언이라 이건가?”
기분 나쁘게 들려오는 박수 소리와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섬뜩한 목소리.
마티아스는 분노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물더니, 나무에 꽂힌 창을 뽑아 들었다.
“카단.”
바로 달려들 줄 알았던 마티아스는 침착하게 심호흡하며 멀리 떨어진 카단을 불렀다.
“내가 시간을 벌 테니까, 블랑쉬 데리고 도망쳐. 지금은 그게 최선이다.”
처음 불의 뱀을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데스나이트가 나타날 때만 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도망쳐.”
그러나 지금은 조금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다.
카단이 5성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신체를 불로 바꿔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낸 순간부터 패배가 그려졌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이질적인 존재이며 이길 수 없는 존재. 그렇기에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도망이었다.
“아무런 희생 없이 도망치긴 힘들어. 그러니 도망쳐.”
“선배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셋 중 둘을 살려야 한다면 그게 맞아요.”
카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크로맨서인 자신이 블랑쉬를 업고 도망치는 것보다 마티아스가 도망치는 것이 생존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카단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네크로맨서가 마법사를 챙겨 도망친다고 한들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마티아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희생은 대장인 내가 해.”
꽈악.
마티아스가 그렇게 말하며 창을 고쳐 쥐었고.
“잠깐만요!”
카단의 외침과 동시에 마티아스가 땅을 박차며 멧돼지 가면을 쓴 여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떻게 하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길 수 있을까? 루나를 소환한다고 해도 이 상황을 뒤바꿀 수 있을까?
꾸욱.
카단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고민하는 것조차 시간 낭비야.’
어차피 힘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스릉!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큰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 폭발의 충격파가 카단을 덮쳤고, 카단은 팔로 얼굴을 감싸고 다리에 힘을 주며 충격파를 받아냈다.
이 정도 충격이라면 단순한 폭발이 아닐 터.
카단은 급히 팔을 내리며 급히 마티아스가 달려간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엔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폭발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지, 아직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
이내 연기가 거둬졌을 때 카단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멧돼지 가면을 쓰고 있던 여성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낭패한 행색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로브는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었고, 쓰고 있던 가면도 반쯤 부서져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카단의 시선이 여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마티아스를 향했다.
마티아스는 우뚝 서 있긴 했어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창이 들려 있어야 할 마티아스 손에는 거대한 방패가 들려 있었다.
“저건?”
가디언 디미타르가 소유한 성유물. 이번 임무의 운반 물품인 ‘신성한 수호자의 방패’였다.
“네, 네가 어떻게 그 방패의 힘을….”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던 여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티아스를 바라봤다.
“아무리 네 놈이 차기 가디언이라지만, 이건 생각 못 했네.”
성유물의 힘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유물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성유물의 진정한 힘을 끌어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카데미의 생도 따위가 성유물의 힘을 끌어냈단 말인가?
“분명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여성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키며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거리를 좁힌 마티아스가 창을 내질렀고, 여성은 손가락만을 이용해 마티아스의 창대를 옆으로 쳐냈다.
손가락의 힘만으로 창대는 힘없이 부러졌고, 여성은 즐거웠다는 듯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마티아스 앞으로 검붉은 빛의 마법진이 생겨났고, 마법진에서 검붉은 화염이 방사됐다.
거대한 화염은 그대로 마티아스를 삼켜버릴 것 같았고, 원래대로라면 마티아스는 화염에 삼켜져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마티아스는 반사적으로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꺼내 불꽃을 막아냈고, 그와 동시에 황금색의 빛이 방패에서부터 뿜어져 나와 여성을 덮쳐버린 것이다.
“그 잠재력은 인정해.”
여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투둑, 툭.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반쯤 부서진 가면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고, 공작 부인?”
멧돼지 가면이 벗겨지자, 앞에 서 있던 마티아스가 헛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봤다.
멧돼지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던 여성의 정체는 이 임무의 의뢰자인 바네사 플로리안 공작부인이었다.
“당신이 왜…?”
마티아스는 마치 사고가 정지된 듯 멍한 표정으로 바네사를 바라봤다.
“아무튼 좀 놀랐어. 너 같은 꼬맹이가 그 방패의 힘을 사용할 줄이야.”
바네사는 그렇게 말하며 넝마가 된 로브를 벗어 던졌다.
“그런데 네 상태도 좋아 보이진 않네? 하긴. 성유물의 힘을 쓰는 대가가 상당하다고 하더라.”
그녀의 말대로 마티아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성유물의 숨겨진 능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남아있던 힘을 강제로 끌어 쓴 듯싶었다.
그 증거로 방패를 들고 있는 그의 손과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툭 치면 톡 하고 쓰러질 것 같은데?”
성유물의 힘을 맨몸으로 받아낸 바네사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희망이 생긴 건 아니었다.
아직도 바네사에게선 무한한 여유가 느껴졌으니.
“그 힘. 다시 한번 써볼래?”
바네사가 기분 나쁘다는 듯한 눈빛으로 마티아스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또각, 또각.
미칠듯한 압박감.
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무거운 공기가 숨통을 틀어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우연히 사용한 거 같은데, 마티아스 너도 운이 제법 좋은 편이구나.”
바네사가 가까이 다가오자, 마티아스가 이를 악물며 들고 있던 방패를 휘둘렀다.
부웅.
그러나 느리게 휘둘러진 공격을 바네사가 맞아줄 리 없었다.
한걸음 멈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방패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바네사는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그냥 얌전히 있으렴.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화륵!
바네사가 손에 불꽃을 두르며 마티아스에게 다가가더니.
짜악!
그대로 마티아스의 뺨을 후려쳤다.
퍼엉!
손바닥이 뺨을 후려치는 순간 손에 둘린 불꽃이 폭발했고, 그 충격에 마티아스가 옆으로 날아갔다.
“너희는 모두 이 숲에서 다크 엘프들에게 죽었다고 보고될 거야. 의뢰자인 나는 영웅 아카데미에 가서 너희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릴 예정이고.”
바네사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마티아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방패는 이참에 부숴버려야겠네.”
바네사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마티아스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상태였다.
‘어째서 공작 부인이?’
공작 부인이 왜 이런 힘을 지닌 걸까? 아니, 애초에 공작 부인이 사람이 아닌 걸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제 와 정체를 알아봤자 무슨 소용일까? 괜히 웃음이 나왔다.
‘쯧. 그래도 지금쯤이면 카단이 블랑쉬를 데리고 도망쳤겠지.’
마티아스가 남은 힘을 쥐어짜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벅찼지만, 그는 정신력으로 버텨내며 바네사를 노려봤다.
‘더 멀리 도망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줘야지. 그게 대장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책임이니까.’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우웅!
순간, 힘을 모두 소진했다고 생각한 마티아스의 몸에서 오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뭐야? 아직 힘이 남아있었니?”
바네사가 기껍다는 듯 마티아스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마티아스의 얼굴에 작게 미소가 걸렸다.
“아니. 마지막 발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