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남은 오러로 몸을 지탱하는 것이 전부면서, 왜 멋진 척이야?”
바네사는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마티아스에게 다가갔다.
화륵!
그녀는 다시 한번 불꽃을 두른 손바닥을 휘둘렀고.
짜악! 퍼엉!
불꽃이 폭발하며 마티아스는 다시 옆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남은 힘을 쥐어짰다고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바네사의 말대로 남은 오러를 이용해 겨우 서 있는 것이 전부.
그러나 마티아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영웅 아카데미가 참 잘 가르쳐. 죄다 쉽게 포기를 안 해. 희망이 전혀 없는데도.”
짜악! 퍼엉!
다시 마티아스에게 다가온 바네사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어. 걱정하지 말고 편히 누워있어. 어쩌면 다시 눈을 떴을 때 나한테 감사해할지도 몰라.”
마티아스가 이를 악물며 다시 일어나려 하자, 바네사가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짓했다.
“네 후배들도 너랑 같이 데려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티아스 앞에 멈춰선 바네사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마티아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손가락을 끝을 따라갔고, 그곳엔 카단이 서 있었다.
‘이런 미친.’
카단을 발견하자, 마티아스가 인상을 구기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카단! 이 미친놈아!”
마티아스가 발악하듯 외쳤지만, 카단은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충분히 도망갈 시간을 벌어줬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아직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다니.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순간 마티아스의 시선이 손에 쥐어진 거대한 방패를 향했다.
‘그 힘을 한 번만 더 쓸 수 있다면….’
성유물의 힘을 사용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마티아스 본인도 어떻게 방패에 숨겨진 힘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었다.
창이 부러진 순간, 어떻게든 살아서 후배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꺼내 공격을 막아냈을 분이다.
‘남은 힘을 죄다 가져다 쓰는 무식한 방패라지만 위력은 확실했어.’
방패가 뿜어낸 성스러운 빛은 분명 바네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사용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녀를 쓰러트릴 수도 있지 않을까?
마티아스는 이를 악물며 다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방패를 앞세워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조금 더 무르익으면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아쉽네. 그래도 뭐 너 정도면 쓸만할 거야. 여우 녀석도 만족스러워하겠지.”
바네사는 힘겹게 일어선 마티아스를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훑어봤다.
그 순간. 그녀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짙어졌다.
철그럭! 철그럭!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데스나이트 두 기가 있는 힘껏 들고 있던 무기를 휘둘렀다.
따악!
바네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고.
퍼엉! 퍼어어엉!
곧바로 그녀의 뒤쪽으로 불꽃이 폭발했다.
그 충격에 데스나이트들은 힘없이 뒤로 밀려났고, 바네사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카단을 바라봤다.
“조금만 기다릴래? 성급하게 굴 거 없어. 너도 데려갈 거니까. 여태 가만히 있었으면서.”
잠깐이나마 그녀에게 빈틈이 생겨났다.
데스나이트와 카단이 만들어준 잠깐의 빈틈. 마티아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제발 한 번만!”
마티아스는 남은 오러를 모조리 방패에 두르며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간절함이 통했던 것일까?
번쩍!
그가 바란 대로 방패에서부터 성스러운 빛이 뿜어지며 바네사를 덮쳤다.
콰아아아아아앙!
눈앞에 뿜어졌던 황금빛은 폭발과 함께 사라졌고, 눈앞에 있던 바네사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았다.
‘되, 된 건가?’
마티아스의 얼굴에 작게나마 희망이 그려지던 찰나.
“내가 멍청해 보이니? 또 당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절망을 전해주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제기랄.”
털썩.
남은 힘마저 모조리 끌어 쓴 탓일까? 바네사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마티아스가 정신을 잃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편히 누워있어. 남은 녀석도 마저 처리한 다음에 데리러 올 테니까.”
바네사가 히쭉 웃더니, 이내 시선을 옮겨 카단을 바라봤다.
“힘을 숨겼던 우리 네크로맨서는 왜 도망도 안 가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을까?”
그녀는 거만한 표정으로 카단에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선배가 죽어가는데 제대로 도와주지도 않고. 도와주는 것 같더니 또 멍하니 있네?”
바네사가 점차 가까워지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단의 얼굴에 느닷없이 미소가 걸렸다.
“어쩌면 널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뭐?”
“그래서 이 순간을 기다렸어. 둘만 남게 되는 순간을.”
“그러니까 네가 날 죽인다고? 어떻게 죽일 생각인데?”
카단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바네사는 그런 카단이 귀엽다는 듯 웃어댔다.
포식자가 피식자를 바라보며 짓는 그런 웃음이었다.
“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용병 프람을 알고 있어? 마족화가 진행 중이던.”
이어진 카단의 물음에 웃음을 짓던 바네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너 설마….”
“반응을 보니 알고 있는 것 같네.”
카단이 바네사를 비웃듯 피식하고 웃었고, 갑자기 땅을 박차더니 다크 엘프의 숲 안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날 방해했던 네크로맨서가 너였구나? 드디어 찾았네.”
굳어졌던 바네사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어쩐지 그 미소에서는 잔인함이 느껴졌다.
“발칙한 놈이네.”
기쁘다는 듯 미소를 짓던 바네사가 곧바로 카단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생도를 납치하는 게 목적이라면 마티아스와 블랑쉬를 죽이진 않겠지.’
숲속으로 도망치던 카단이 슬쩍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
‘쯧. 더럽게 빠르네.’
그의 생각대로 바네사는 마티아스와 블랑쉬를 죽이지 않았고, 곧바로 카단을 쫓아왔다.
‘이쯤이면 충분하겠네.’
정신을 잃은 일행들과 거리를 충분히 벌렸다고 생각한 걸까?
도망치던 카단이 느닷없이 멈추더니,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바네사를 바라봤다.
“왜? 도망치는 건 포기했어?”
바네사가 히쭉 웃으며 큰소리로 외쳤고, 카단은 무표정한 얼굴로 앞으로 팔을 뻗었다.
그의 손에 푸른색의 마나가 일렁였고. 동시에
콰아아아아앙!
바네사의 발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바네사는 몸을 움츠린 채 폭발에 휩쓸렸고, 이내 폭발의 여파가 사라지자 어이 없단 얼굴로 카단을 바라봤다.
“발칙한 짓을 했네? 시체 폭발인가?”
바네사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발밑을 확인했고, 그곳엔 터져버린 짐승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한 거지? 시체가 우연히 이곳에 놓여 있을 리도 없고.”
시체 폭발은 네크로맨서의 마법 중 가장 뛰어난 화력을 지닌 마법이자, 5성부터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설마 아까 그냥 멍하니 서 있던 게 아니었나?”
바네사가 눈을 작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달그락.
그때 그녀의 눈에 시체를 들고 뛰어다니는 해골이 보였다.
“나 몰래 해골을 소환해 시체를 숨겨놓고, 일부러 이쪽으로 유인했구나? 제법인데?”
그녀의 말대로였다.
바네사가 성유물의 힘을 쓴 마티아스에게 시선이 팔린 사이, 카단은 재빨리 해골들을 소환했고, 아공간에서 시체들을 꺼내 숲속으로 던져뒀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나 몰래 해골을 지휘하긴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정교하게 시체를 숨겨놓을 수 있던 것일까? 바네사가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휙.
어디선가 바네사를 향해 고블린 시체가 날아왔다.
“이건 갑자기 어디서….”
콰아아아아앙!
바네사의 눈앞까지 다가온 고블린 시체는 허공에서 폭발했고.
“이런 썅!”
바네사는 얼굴을 가리며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녀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시체가 날아왔던 곳을 바라봤다.
“저건 또 뭐야?”
거대한 나무 위. 굵은 나뭇가지 위에 여자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여자아이가 있는 걸까? 그것도 높은 나무 위에서 한 손엔 고블린 시체를 든 채로.
‘아? 프람을 죽인 네크로맨서 옆에 여자아이가 있다고 했었는데 그게 쟤구나?’
바네사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와 해골을 던져놓기만 하고, 지휘는 저 꼬마가 한 모양이네?”
바네사의 물음에 카단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가 마티아스를 상대하는 사이, 카단은 루나를 소환했고 그녀에게 해골들을 지휘해달라 부탁했었다.
바네사의 말대로 그녀 몰래 해골들을 지휘해 정교하게 시체를 숨겨놓을 순 없을 테니.
카단이 멍하니 서 있던 이유는 머릿속으로 루나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나. 계속해.”
카단은 한쪽 팔을 뻗은 채 말했고.
“응.”
루나는 곧바로 들고 있던 시체를 바네사를 향해 집어 던졌다.
휙!
아이가 던졌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시체는 빠른 속도로 바네사를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앙!
던져진 시체는 카단의 마나에 반응하며 곧바로 폭발했고.
타앗!
바네사는 시체가 폭발하기 직전 땅을 박차며 카단을 향해 달려갔다.
‘예상대로 시체 폭발엔 타격을 받나 보네.’
몸을 불로 바꿔 물리적인 공격을 회피해버리는 능력을 지녔다지만, 시체 폭발은 통하는 것 같았다.
“넌 내가 곱게 죽이진 않을 거야.”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바네사가 불꽃으로 변한 손을 카단을 향해 휘둘렀다.
쿠웅!
그때 바네사의 앞으로 거대한 덩치를 지닌 데스나이트가 나타났다.
부웅-
데스나이트는 거대하고 흉측한 도끼를 휘둘렀고,
“진짜 귀찮게 구네.”
바네사의 몸이 다시 한번 불꽃으로 변했다.
화륵-
데스나이트 카록의 도끼는 허무하게 불꽃을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 카단은 뒤쪽으로 거리를 벌렸고, 바네사는 짜증이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퍼어엉!
카록의 머리 옆으로 불꽃이 폭발했고, 카록이 중심을 잃은 사이 바네사가 다시 카단을 쫓았다.
그 순간.
우우웅!
오러를 두른 검이 그녀를 향해 휘둘러졌다.
“뭐?”
위협을 느낀 바네사는 자연스레 땅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다.
오러를 두른 검의 주인은 데스나이트였다.
‘5성 네크로맨서가 소환한 데스나이트가 이런 오러를 쓴다고?’
아무리 불꽃으로 변하는 몸이라지만, 강력한 오러를 두른 공격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네사를 죽일 정도의 오러는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공격을 피하고 만 것.
퍼억!
바네사가 땅에 착지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주먹이 날아와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커헉!”
공격받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충격보다는 놀라움이었다.
“얼굴을 맞은 건 얼마 만이려나….”
차갑게 식은 그녀의 눈빛이 주먹의 주인을 향했다.
“너도 인간이 아니구나?”
그녀의 시선 끝에는 주먹을 쥐고 있는 루나가 보였고, 루나의 주먹은 붉은색 마나를 머금고 있었다.
“응. 나 뱀파이어야.”
루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며 곧바로 바네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신체를 불로 바꾼다고 한들, 마나를 머금은 주먹이라면 회피해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바네사는 땅을 박차고 뒤쪽으로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고 했다.
슈우우우욱!
어디선가 피로 만들어진 창이 날아왔고, 바네사는 곧바로 몸을 틀어 자신을 향해 날아든 창을 피해냈다.
루나는 바네사가 창을 피하는 그 잠깐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콰아아아아앙!
루나의 주먹이 바네사의 턱을 후려치며 손에 머금고 있던 마나가 폭발했다.
그 충격에 바네사는 처음으로 뒤로 날아갔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아.”
누운 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바네사가 짙은 한숨을 내뱉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루나가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네크로맨서… 제법이네?”
바네사는 다가오는 루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멀리 보이는 카단을 응시했다.
“고작 5성 주제에 날 짜증 나게 하다니.”
순간 그녀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검붉은 기운이 그녀의 몸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쯧.”
바네사에게 달려들던 루나는 급히 속도를 늦추더니, 땅을 박차고 뒤쪽으로 빠르게 물러났다.
“꼬마가 제법이네. 감이 좋아.”
순간 바네사의 관자놀이에서부터 기괴한 뿔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그녀의 등 뒤로 박쥐의 그것을 닮은 날개가 펼쳐졌다.
“야, 네크로맨서.”
기괴한 모습으로 변한 바네사가 매서운 눈으로 카단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너 샬로트랑 무슨 사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