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에어록손 성벽.
왕국 최남단에서 적국과 야만족들로부터 왕국을 지켜내는 거대한 성벽.
‘생각했던 것보다 더 웅장하군. 이 정도면 트라팔가의 성벽은 우스운 수준인데?’
그 웅장한 성벽을 마주한 카단은 헛웃음을 삼키며 잠시 감상의 시간을 가졌다.
플로리안 공작령을 떠난 지 정확히 11일이 되어서야 카단과 그의 일행은 에어록손 성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에어록손의 북쪽 성문 앞까지 다가가자, 기다란 창을 들고 있던 병사들이 창으로 X자를 그리며 성문을 막아냈다.
“저흰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들입니다.”
마티아스가 대표로 나서서 영웅 아카데미 생도의 증표인 목걸이를 보여줬고.
“물건 운반 의뢰를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이어서 플로리안 공작 부인의 의뢰서를 건넸고. 마지막으로.
척.
가디언 디미타르가 소유한 성유물 ‘신성한 수호자의 방패’를 꺼내 경비병에게 보여주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경비병들은 마티아가 건넨 것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확인하더니, 이내 길을 창을 치우며 성문 안쪽을 가리켰다.
“가디언께서는 정찰대와 함께 성벽 너머에 계십니다.”
“야만족 놈들이 또다시 성벽을 넘으려고 하는 바람에 아직 전쟁이 한창이죠.”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백조의 꿈’이라는 손님 전용 여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쉬고 계시면 안내자가 찾아올 겁니다.”
경비병들은 현재 에어록손의 상황을 전해주었고, 마티아스는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며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도 상황이 좋진 않은가 보군.’
문지기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며칠 잠을 설치기라도 한 듯 눈그늘이 짙었고, 안색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지만 여태껏 봤던 문지기 중 가장 강인해 보였다.
“당장 임무를 완수하긴 힘들어 보이니 경비병들이 말한 여관이나 가볼까?”
“네.”
푹신한 침대가 그리웠던 걸까? 블랑쉬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위치는 어딘지 알았어요.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레이스를 소환해 이미 여관의 위치를 파악해 놓은 카단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백조의 꿈]
도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끝에 문지기들이 말한 여관 앞에 도착했다.
벽면부터 시작해 하얗게 칠한 깔끔한 외관의 여관이었다.
병원을 떠올릴 법도 했지만, 왠지 모를 평안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휴식 마법이 걸려 있네.”
여관을 살펴보던 블랑쉬의 말에 카단은 그제야 이 포근함의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마티아스는 카단에게 고생했다는 듯 어깨를 두드린 뒤, 앞장서서 여관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40대로 보이는 여관 주인이 해맑게 웃으며 반겨주었고, 마티아스는 곧바로 영웅 아카데미의 증표와 의뢰서를 건네주었다.
“멀리서 오신 분들이군요. 고생하셨습니다. 평안히 쉬실 수 있는 방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곧바로 방 3개를 내어주었고.
“점심 먹을 사람은 알아서 먹고, 저녁은 다 같이 먹자.”
마티아스는 저녁까지 푹 잘 거라는 말을 남기며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철컥.
블랑쉬 또한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루나랑 얘기 좀 해야겠네.’
카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확실히 일반적인 여관보다 더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하얀 외관과 다르게 내부는 베이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색상만으로도 방 안은 평온함이 느껴졌고, 그 차분함에 절로 잠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루나도 걱정하고 있을 테니.’
역소환되기 전 힘겨워 하던 루나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쓰였다.
스릉.
카단은 문을 잠근 뒤 단검을 이용해 손가락을 찔렀다.
토옥.
이내 바닥에 핏방울을 떨어뜨렸고, 핏방울은 빠르게 퍼지더니 마법진을 그려냈다.
“야!”
붉은빛이 번쩍이던 마법진에서부터 루나가 나타나 카단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커헉!”
느닷없이 휘둘러진 공격에 당황한 카단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고 그대로 턱을 맞아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쿵!
진심으로 휘두른 주먹이었다면 그대로 기절했겠지만, 다행히 적당히 힘 조절을 한 듯 싶었다.
“놀랐잖아.”
카단이 맞은 턱을 어루만지며 루나를 바라봤고, 루나는 잔뜩 심술난 표정으로 카단을 노려봤다.
“내가 그 여자 처음 봤을 때 말했지. 절대 못 이긴다고!”
“쉿. 무슨 말이든 다 들을 테니까 목소리 좀 낮춰 줄 수 있을까? 너까지 걸리면 곤란하거든.”
카단은 진정하라는 듯 손짓하며 조심스레 제안했고, 루나는 크게 한숨을 내뱉더니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왜 그렇게 무모해? 처음부터 도망갔어야지. 나한테 맡기고!”
“일행들을 남기고 혼자 어떻게 도망을 가? 마족들이 무슨 짓을 할지 뻔한데.”
“살아남아야 복수를 하든, 뭘 하든 할 거 아냐!”
루나의 잔소리는 한참을 이어지고 난 뒤에 끝이 났다.
카단이 걱정됐다는 듯 눈물까지 글썽이며 잔소리를 해대니, 차마 그녀를 멈출 수가 없었다.
“자, 이것부터 마셔.”
카단은 잔소리하느라 지친 루나를 향해 아공간에서 물통을 꺼내 건넸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루나가 눈물을 훔치며 다시 카단을 노려봤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어.”
“왜 몰라?”
“그게 네가 역소환된 후에….”
카단은 자신이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땐 아무도 없었다는 걸 모두 들려주었다.
“그 정신 나간 마족이 사라졌다고? 죽은 게 아니라?”
“응? 죽었다니?”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바네사가 죽을 만한 상황은 그 어디에서 없었는데, 갑자기 왜 죽었냐고 묻는 것일까?
“그러면 너 그 영혼의 결정인가 뭔가는 어떻게 흡수한 건데?”
“영혼의 결정?”
“누가 죽였는지는 몰라도 정신 차리고 나서 흡수한 거 아니었어?”
루나가 작은 팔로 팔짱을 끼며 물었고, 카단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아니. 영혼의 결정이나 마석은 본 적이 없는데?”
“그럼 그 힘은 뭐야.”
루나가 카단을 가리키며 물었고, 카단은 눈을 끔뻑이며 루나를 바라봤다.
“무슨 힘을 말하는 거야? 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되묻던 카단이 순간 이상함을 느끼곤 재빨리 자신의 마나 하트를 살펴봤다.
‘뭐, 뭐야?’
마나 하트를 확인한 카단이 헛숨을 들이쉬며 루나를 바라봤다.
‘나 왜 6성…?’
마나 하트가 품고 있는 힘은 분명 6성의 힘이었다.
더욱더 견고해진 마나의 벽 안으로 질 좋은 마나가 풍부하게 가득 차 있었다.
분명 5성 초입.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간 상태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6성이 되어 있는 것일까?
“모르겠어.”
카단이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정신을 잃었을 때, 본능적으로 영혼의 결정을 찾아서 회복한 거 아니야?”
루나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말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어댔다.
“소환된 순간 제약이 더 풀려있기에 카단 네가 쓰러트린 줄 알았는데. 하긴 그것도 말이 안 돼.”
성유물의 힘으로 데미지를 쌓고, 루나가 역소환 되기 전 일격을 가했다지만, 카단의 힘으로 바네사를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했다.
소환수도 없는 5성 네크로맨서가 혼자 상급 마족을 쓰러트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구해준 거 아니야?”
“그것도 모르겠어. 다른 사람의 흔적은 물론 전투 흔적도 없었어.”
그러고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몸 상태가 좋다는 걸 느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던 몸인데 어떻게 개운한 상태로 눈을 뜰 수 있었을까?
‘어쩐지 몸이 좀 더 가볍더라니….’
그 의문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았다.
“며칠 지났는데, 6성이 된 걸 이제 알았다고?”
“딱히 힘을 쓸 일도 없었고, 그 마족이 다시 나타날까 봐 계속 긴장하고 있었거든.”
6성이 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기엔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내가 마족의 힘을 흡수했다면 바네사가 죽었다는 뜻인데, 대체 누가?’
어떻게 힘을 흡수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마족의 힘을 흡수한 건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5성 네크로맨서가 하루 만에 6성이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상급 마족의 힘을 흡수해서 그런가? 단번에 6성이 될 줄이야.”
루나가 놀랍다는 눈으로 카단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성장 속도가 이렇게 빠른 사람은 처음봐.”
아무리 전설 속에 존재하는 힘을 사용한다지만,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1년을 걸려야 1성을 올리는 게 평균. 그러나 카단은 1년도 되지 않아서 4단계나 성장해 버렸다.
‘내가 6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오히려 내가 마족이라고 오해받겠는데?’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6성이 되었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죽다 살아나서 웃기는.”
루나는 그런 카단을 보며 혀를 찼다. 아직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녀 역시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카단도 무사했고 자신도 무사했으니.
‘뭐, 어차피 누가 죽였는지는 당장 알아낼 방법이 없다. 답이 없는 고민 붙잡고 늘어져 봐야 시간만 낭비하니까.’
카단은 무언가 생각이 났는 지, 루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루나. 부탁이 하나 있어.”
“또 뭔데.”
부탁이라는 말에 루나는 순간적으로 몰래 숨어 마차를 뒤쫓던 과거가 떠올랐다.
혼자서 풀을 뒤집어쓰고 몰래 카단 일행을 미행했던 고달프고 외로웠던 기억이 그녀의 미간을 좁게 만들었다.
“싫어. 뭔지 몰라도 싫어.”
루나가 재빨리 고개를 저어댔고, 카단은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또 몰래 숨어서 따라오라고 할 생각이지? 싫어. 재미없어!”
그녀의 말에 카단이 자상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러자 루나가 슬쩍 카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뭔데?”
조금은 호기심이 생겼는 지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번 전투를 하면서 느꼈는데, 너나 데스나이트가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
“당연하지. 네크로맨서가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어.”
루나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고, 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싫어서 혼자 나름대로 훈련도 하고 준비도 해봤거든.”
아무리 체력을 늘리고 힘을 키워도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언데드를 내세워 싸우는 네크로맨서라지만,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보다 약한 상대는 혼자서도 가능해.”
하지만 조금이라도 카단보다 강하다면, 아니. 비슷한 실력을 지닌 자라면 언데드의 도움 없이는 쓰러트릴 수 없었다.
“언데드가 강해지는 것도 중요한데 나 역시 힘을 키워야 한다고 깨달았어.”
“혼자 힘을 키워도 소용없다며?”
루나가 본론을 말하라는 듯 손짓하며 답답함을 표현했다.
“맞아. 그러니까 부탁을 하려고.”
“같이 훈련하자고?”
루나의 질문에 카단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마법을 가르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