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신을 잃었던 카단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눈을 뜨는 순간 멀리서부터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카단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야? 넌 왜 거기 있어?”
카단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루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행히 멀쩡한 것 같네.”
“아니,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루나가 마나를 머금은 손으로 등을 후려쳤고, 그와 동시에 미칠 듯한 통증이 시작됐다.
수천 개의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듯한 기분 나쁜 통증을 시작으로 살면서 느낄 수 없는 괴상한 고통까지 느껴야 했다.
이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되긴. 실컷 소리 지르다가 기절했지. 좀만 참으라니까.”
“그걸 참아…?”
루나의 말에 카단이 고통스럽던 감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갑자기 왜….”
카단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묻자, 루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네가 직접 확인해봐. 어떻게 됐는지.”
루나는 피식 웃으며 카단을 바라봤고, 카단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자 루나는 검지를 이용해 카단의 심장 쪽을 가리켰고.
‘마나 하트?’
카단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눈을 감고 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어라?’
이상했다.
불안정했고 불규칙하던 마나의 흐름이 안정적으로 변했다.
울퉁불퉁한 느낌의 마나 하트도 매끈하게 변한 것 같았으며, 마나 하트에서부터 뿜어지는 마나는 안정적으로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때? 개운하지?”
루나가 피식 웃으며 묻자, 카단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기절한 사이 잘 정리됐나 확인해볼까 했는데… 도저히 가까이 못 가겠더라.”
이어진 루나의 말에 카단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가까이 오지 마! 죽여버릴 거야!”
카단이 다가오려 하자, 멀리 떨어져 있던 루나가 기겁하며 손을 내저어댔다.
“왜 그래?”
“뭘 왜 그래야! 우선 씻고 옷부터 좀 갈아입을래?”
“여기 오기 전에 씻었는데 무슨 소리… 윽.”
그 순간 카단은 몸에서 풍기는 괴상하고도 역한 냄새를 느꼈고, 곧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우웁!”
그러나 그건 실수였다.
옷뿐만 아니라 손바닥을 비롯한 몸 전체에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카단은 이게 무슨 냄새냐며 억울한 눈빛으로 루나를 바라봤다.
“마나의 흐름이 정리되면서 마나의 불순물이 제거됐고, 노폐물 같은 게 함께 몸 밖으로 배출됐어.”
루나는 진하게 느껴지는 하수구 냄새에 뒷걸음질 치며 코를 막았다.
“그러니까 빨리 나가서 씻고 와.”
루나는 못 참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빨리 나가라 손짓했고, 카단은 고개를 끄덕인 뒤 땅을 박찼다.
잠시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온 카단이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루나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몸이 좀 가벼워진 것 같은데?”
“그뿐이겠어? 마나의 흐름이 정리돼서 마법을 사용하는 게 더 수월해졌을 거야.”
루나는 한 번 실험해보라는 듯 손짓했고.
달그락!
카단은 곧바로 손을 뻗더니 허공에 뼈로 된 방패를 만들어냈다.
뼈 방패를 만들어낸 카단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루나를 바라봤다.
“정말인데?”
“네가 그동안 마족의 힘을 흡수하면서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힘을 흡수했잖아?”
“그래서 마나 하트랑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해졌다는 건가?”
“응. 마나를 잔뜩 쌓아둔 느낌이었어. 그러니 가진 마나에 비해 마법이 형편없었지.”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카단에게 다가왔다.
“몸도 재료도 다 준비됐으니까, 이제 수업을 시작해볼까?”
“재료?”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자, 루나는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루나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몬스터들의 사체가 잔뜩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카단이 기절한 사이 사냥을 보냈던 데스나이트가 잔뜩 사냥해온 것 같았다.
“카록은 어디 갔어?”
“너 깨어나기 전에 시체를 잔뜩 가져다 놓더니, 또 사냥하러 나가던데?”
아무래도 당분간 피 마법에 쓰일 재료는 충분한 것 같았다.
“말했지만, 가르치기로 한 이상 설렁설렁 가르칠 생각은 없어. 각오해야 할 거야.”
루나가 진중한 태도로 바꿔 말하자, 카단 역시 몸을 바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렁설렁할 생각 없어.”
“인간이 뱀파이어만큼 피를 다룰 수는 없을 거야. 욕심은 적당히 내도록 해.”
루나는 카단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우선 네가 어떻게 피를 다루는지 제대로 봐야 할 것 같아.”
휙.
루나는 몬스터들의 사체가 쌓인 곳을 가리켰고, 카단은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듯 곧바로 마나를 활성화했다.
“기본적인 추출부터 시작해봐.”
***
일주일 후.
카단이 지친 몸을 이끌고 여관 ‘백조의 꿈’에 돌아왔다.
“카단. 여기야.”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티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카단은 곧바로 마티아스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들 일찍 왔네요.”
마티아스와 블랑쉬는 이미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배는 안 고프고?”
“네. 오는 길에 간단하게 먹고 왔어요. 그런데 두 사람 상태가 왜 그래요?”
카단은 자리에 앉으며 마티아스와 블랑쉬의 상태를 살폈다.
일주일 사이 홀쭉해진 얼굴.
눈 밑에는 진한 눈그늘이 생겨났고, 표정은 암울해 보였다.
‘도대체 뭘 했기에….’
두 사람의 얼굴만 보더라도 지난 일주일간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면서 이번 일주일이 가장 치욕스러웠어.”
“난 재능이 없어. 쓰레기야.”
카단의 질문에 마티아스와 블랑쉬가 암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그런데 카단 넌 일주일간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거야? 왜 넌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지?”
마티아스가 퀭한 눈으로 카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어디서 푹 쉬고 있는 거 아니야?”
블랑쉬도 차갑게 식은 눈으로 카단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척해진 두 사람과 다르게 카단의 모습은 전보다 더 멀끔해져 있었다.
피부도 좋아졌으며, 몸의 근육들도 전보다 더 균형이 잡힌 듯한 모습.
확실히 마티아스, 블랑쉬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던전에 들어가서 훈련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 도시엔 네크로맨서가 없어서.”
두 사람의 말에 카단은 조금 억울함을 느꼈다.
카단 역시 두 사람 못지않게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늘 끝까지 물고 늘어지던 카단의 머릿속으로 포기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를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
루나의 가르침에는 ‘봐준다’라는 개념은 없었고, 늘 한계까지 카단을 몰고 갔다.
‘이상하긴 해.’
그러나 이상했다.
분명 지쳐 쓰러질 때까지 수련을 이어갔는데,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감쪽같이 몸이 회복되었다.
회복되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것 같았고, 괴로운 수련 속에서도 몸은 가볍기만 했다.
“뭐, 어쨌든. 다들 성과는 좀 있어?”
카단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마티아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시간이 더 필요해요.”
그러자 블랑쉬가 우중충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저도 조금 더 수련하고 싶어요.”
카단은 만족스럽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선배는요?”
이어서 카단이 마티아스에게 물었고, 마티아스는 곧바로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지금 상황으로는 라디아 님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아.”
세 사람 모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 시간이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희망을 찾았고, 나아간다는 성취감이 그들에게 욕심이란 감정을 피어오르게 했다.
세 사람은 아카데미에서 보낸 그 어떤 시간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벽을 마주했고, 그 벽은 절망감 대신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수많은 실전 경험은 물론 실력까지 뛰어난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무언가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역시 일주일 더 지켜보는 게 좋겠지?”
마티아스의 제안에 카단과 블랑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세 사람은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해볼 생각인 듯싶었다.
“그럼 일주일 더 머물면서 각자 시간 좀 보내자고.”
***
부서진 신전 안.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는 중압감마저 느끼게 했고, 어둠 속에서부터는 알 수 없는 공포가 새어 나왔다.
“멧돼지는 죽은 건가?”
고요함이 머물던 곳에 음침한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신전을 가득 울리는 낮고 굵은 목소리에 촛불 위 녹색의 화염이 불길하게 흔들렸다.
“죽었다.”
또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대답했고, 불꽃들은 더욱 거칠게 흔들거렸다.
“도대체 누가 멧돼지를 죽였지?”
“멧돼지가 어디서 죽은 건데?”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왔고, 이내 신전 중앙으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누가 죽였는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잖아. 다들 진정하라고.”
여우 가면을 쓴 남자였다.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목소리, 발걸음 소리에도 왠지 모를 분노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멧돼지가 맡았던 일은 어떻게 할 건데? 영웅 아카데미는 누가 관리해?”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어둠 속을 향해 질문을 던졌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둠 속 존재들은 침묵을 지켰다.
“관리할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없애는 게 좋지 않겠어?”
여우 가면은 다시 질문을 던졌고, 이번엔 사방에서 불만 섞인 대답들이 들려왔다.
“그럴 순 없어.”
“마족의 힘을 버틸 녀석들을 찾기엔 영웅 아카데미만 한 곳이 없다.”
“여우. 네가 관리하는 건 어때? 어차피 너 하는 일도 없잖아?”
여우 가면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난 자신 없어. 쓸만한 놈들은 다 내가 데려갈 생각이거든.”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뻔뻔한 태도로 대답하자, 어둠 속에서는 짧은 신음들이 이어졌다.
여우 가면을 쓴 남자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았기에, 쉽사리 영웅 아카데미를 맡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왜 하는 일이 없어? 그렇게 불만이면 너희가 샬로트의 유산을 쫓아보던가.”
분위기가 점차 험악하게 변해가자,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다들 진정해라. 우리끼리 이런다고 상황이 바뀌는 건 없어.”
흉측하게 생긴 문어 가면을 쓴 남자가 긴 지팡이를 바닥에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우리 중에 멧돼지처럼 공평하게 생도들을 전해줄 녀석은 없을 것 같은데, 여우 말대로 그냥 없애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자 어둠 속에서 질문들이 쏟아졌다.
“영웅 아카데미를 관리하는 녀석이 없으면 잠재적 위험 요소가 된다는 건 인정해. 근데 그 아카데미를 누가 처리할 건데?”
질문에 문어 가면은 여우 가면을 가리켰고, 여우 가면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문어 가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둠 깊은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건 차기 마왕님께서 정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떠들썩하던 신전 안이 고요해졌다.
어둠 뒤편에 있는 이들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문어 가면을 쓴 남자와 여우 가면을 쓴 남자 역시 입을 다문 채 어둠 속을 바라볼 뿐이었다.
“실패하면 우리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한 명도 살려둬선 안 돼.”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깊은 곳에서 소름 돋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어.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겠느냐.”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문어 가면을 쓴 남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시키시면 최선을 다해야겠죠.”
“그럼 영웅 아카데미는 문어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확실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