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후계자 말씀입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마티아스가 놀라며 눈을 끔뻑여댔다.
“이 방패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놈이라면 자격은 충분하지.”
여태껏 방패의 숨겨진 힘을 끌어낸 사람은 가디언인 디미타르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마티아스는 차기 가디언의 자리를 따놓은 자.
디미타르의 후계자가 되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제가 방패의 힘을 끌어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방패에 다른 사람의 마나가 남아 있었거든. 그럼 당연히 이 방패를 운반해준 너희 셋 중 하나겠지.”
그 말에 마티아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 방패를 플로리안 공작 부인에게 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럼 공작 부인의 기사 중 하나가 썼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 질문에 디미타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플로리안의 기사 중 이 성유물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신성한 수호자의 방패는 기본 적으로 ‘항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성력이 가득 담겨 있는 방패였기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악한 기운을 몰아낼 수 있었다.
“리치가 있는 던전을 토벌한다고 하기에 빌려줬지. 이 방패를 지닌 것만으로도 리치의 힘을 억제할 수 있을 테니까.”
즉, 플로리안의 기사 중에는 방패가 지닌 본래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과적으로 이 방패의 힘을 끌어 쓴 사람은 운반책이었던 3명의 생도 중 하나.
“마법사가 이 무거운 방패를 들었을 리는 없고. 네크로맨서가 성유물을 다룰 수는 없을 테니.”
성유물의 힘을 끌어낸 건 마티아스다. 가디언 디미타르는 그렇게 단정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자네의 스승이 용병들의 왕인 ‘제이드’라고 하던데. 맞나?”
“예. 맞습니다. 저는 용병 출신으로 스승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마티아스가 당당히 대답하자, 디미타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훑어봤다.
“그래.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 제이드한테 돌아갈 생각인가?”
“마땅한 제안이 없다면 스승님의 뒤를 이을 생각이었습니다.”
“그 재능을 지니고 고작 용병들의 왕이 되기엔 아깝지.”
디미타르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마티아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기사단에 들어와. 내 후계자가 되려면 내 밑에서 배워야지.”
이어진 제안에 마티아스가 얼어붙고 말았다.
그 모습에 디미타르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아카데미도 오래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에 졸업하도록 해.”
“그, 그게 가능합니까?”
“가디언들이 관리하는 아카데미인데, 생도 하나 조기 졸업 시키는 게 어려울 것 같아?”
전혀 어렵지 않았다.
가디언의 직인 찍힌 서류 한 장만으로도 마티아스의 조기 졸업 제안은 승인될 것이다.
“뭐, 얘기는 이쯤하고 저 빌어먹을 야만족 녀석들이나 살펴볼까?”
디미타르가 걸음을 옮겨 성벽 끝으로 향했다.
“오늘도 지긋지긋하게 몰려왔군.”
성벽 아래에는 수많은 야만족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괴상한 지팡이를 들고 있는 놈들이 보이지?”
“아, 네. 보입니다.”
마티아스는 아직 얼떨떨한 감정을 털어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들이 가끔 검붉은 마나를 뿜어댈 때가 있어. 그게 마족의 힘을 쓴다는 증거이기도 하지.”
디미타르의 말에 마티아스의 시선이 야만족들 사이사이에 배치된 주술사들을 향했다.
‘검붉은 마나라면….’
멧돼지 가면을 쓰고 있던 플로리안 공작 부인 역시 검붉은 마나를 다뤘었다.
‘마족이라는 증거 같은 건가?’
디미타르의 말처럼 야만족 주술사들은 검붉은 마나를 다루고 있었다.
“하필 저런 놈들이 쳐들어온 상황에 성유물이 없어서 조금 힘겨웠던 참이거든.”
디미타르가 방패를 쥐더니, 고개를 돌려 마티아스를 바라봤다.
“이 방패가 지닌 진정한 힘을 보여주지. 자주 볼 수 없는 광경일 테니, 잘 보라고.”
디미타르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성벽 너머를 바라봤고.
척!
이내 방패를 높게 들어 올렸다.
순간 디미타르의 마나가 빠르게 방패에 흡수되었고, 방패는 황금빛 기운을 머금었다.
따스했으며 눈이 부셨다.
번쩍!
순간 방패에서부터 황금빛 물결이 전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크아아아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 아래에서 비명들이 들려왔고, 그 비명들의 주인은 주술사들이었다.
성스러운 황금빛에 노출된 주술사들이 괴롭다는 듯 주저앉아 괴성을 질러댔다.
“전부 죽여라.”
빛이 점차 사그라들자, 디미타르는 방패를 천천히 내리며 근처에 있는 지휘관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성벽 위 곳곳에서부터 마법과 화살, 투척용 창들이 야만족들을 향해 쏘아졌다.
***
성유물의 힘을 사용한 이후 전쟁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끝이 났다.
야만족은 마족의 힘을 쓰는 주술사들 덕분에 평소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주술사들은 성유물의 힘에 노출된 후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야만족들은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폭격에 퇴각을 결정하고 말았다.
와아아아아아아!
야만족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성벽 위에서 우렁찬 환호가 퍼져나갔다.
하늘마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함성이었다.
‘성유물의 힘이 대단하군.’
전투를 관람하기 위해 성벽 위로 올라왔었던 카단이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본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빛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언데드들이 힘을 잃을 줄이야.’
빛이 번쩍하는 순간, 성벽 아래 퇴각하며 남겨뒀던 해골 병사들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단 역시 번쩍이는 황금빛에 노출되었고, 그 순간 힘이 빠지는 불쾌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어쩌면 가디언 중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디미타르려나?’
언데드의 약점인 성스러운 힘을 사용하는 자. 게다가 기사로서도 정점을 찍은 남자.
만약 카단이 복수를 이행하기 위해 디미타르와 맞붙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유물을 이용해 언데드를 전부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면 카단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성유물의 힘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만 했다.
‘디미타르를 이기려면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 걸까? 가늠이 안 가는데?’
잠깐 디미타르와 전투를 떠올렸던 카단은 질색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오늘은 축제다! 무조건 축제야!”
“축제! 오직 축제!”
전투가 시작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종료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나오지 않은 완벽한 승리이기 때문일까?
성벽 위 병사들은 축제를 외쳐댔다.
“디미타르 님께서 오늘 술 창고를 개방하신다고 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향해 디미타르의 말을 전했고.
와아아아아아아!
성벽 위는 또다시 함성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텔레포트 스크롤입니다.”
다음날이 되어 아침 일찍부터 기사 라디아가 생도들을 찾아왔다.
전날 완벽한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가 있었고, 라디아 역시 술을 미친 듯이 마셔댔었다.
그런데도 아침 일찍 찾아온 라이다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물론 생도 신분이라 아직 술을 마시지 못했던 세 명의 생도 역시 평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이라면?”
마티아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라디아가 방긋 웃으며 답해주었다.
“수도로 곧바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세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특히.”
라디아의 시선이 카단을 향했다.
“카단 생도 덕분에 정찰대원들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디미타르 님도 카단 생도의 활약에 감명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아마 따로 포상이 주어질 것이다. 라디아는 그렇게 말하며 세 사람의 손 위로 텔레포트 스크롤을 올렸다.
“원래는 이곳에 찾아온 생도들은 알아서 돌아가라며 보냈었지만, 꽤 어려운 의뢰를 수행하셨기에 이 스크롤을 드립니다.”
다크 엘프의 숲을 지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기에 디미타르는 생도들에게 나름의 배려를 베풀었다.
“감사합니다.”
세 명의 생도들에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단번에 수도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그 어느 누가 싫어할까?
“디미타르 님께 따로 인사는 드리지 않아도 되니, 편하실 때 돌아가시면 됩니다. 반가웠습니다.”
라디아는 그렇게 말하곤 여관을 벗어났다.
“바로 가는 게 좋겠지?”
셋만 남게 되자, 마티아스가 카단과 블랑쉬를 향해 물었다.
“네.”
“좋습니다.”
이미 짐은 챙겨놓은 상황. 곧바로 출발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이미 전날 축제에서 도시의 사람들과 작별 인사는 충분히 나누기도 했고.
“힘들고 어려운 임무였는데, 무사히 해결해서 다행이야.”
마티아스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못난 대장 잘 따라와 줘서 고맙고.”
마티아스가 무언가 더 말을 이어가려 하자, 카단과 블랑쉬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저어댔다.
전날 밤, 축제 분위기에 취했던 마티아스가 카단과 블랑쉬를 붙잡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고생했다. 수고했다. 고맙다. 미안하다.
이제는 그 말이 지겨웠는지 카단과 블랑쉬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어졌다.
그러나 마티아스의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대장이었고,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옆에서 지켜봤기에 그가 충분히 감정을 풀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아무튼. 공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비밀로 하도록 하자. 방에서 짐만 챙겨서 앞에서 만나자고.”
공작 부인의 이야기로 마티아스의 말은 끝이 났고, 세 사람은 곧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여관 건물 앞으로 모였고.
“그만 돌아가자.”
마티아스의 말과 함께 들고 있던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찌익!
번쩍이는 빛과 함께 세 사람이 바라보는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축제의 여운이 남아 있던 에어록손에서 익숙한 수도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디어 돌아왔네.’
카단은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설마 이곳의 풍경을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곧바로 아카데미로 돌아가자. 보고는 내가 할 테니까, 너희는 곧장 숙소로 가서 쉬도록 해.”
마티아스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고, 카단과 블랑쉬는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텔레포트 된 곳에서부터 영웅 아카데미까지 거리는 멀지 않았다.
세 사람은 금방 아카데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마티아스는 의뢰를 완료했단 보고를 하기 위해 아카데미 건물로 향했고, 블랑쉬는 피곤하다며 곧장 숙소로 향했다.
‘쉴 시간이 없어.’
그리고 카단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카단?”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네크로맨서 교수인 아이작의 연구실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언제 돌아왔습니까? 에어록손 성벽에 갔다고 들었는데, 잘 다녀왔나요?”
연구실에 들어서자 아이작이 반갑다는 듯 자상한 목소리로 반겨주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푹 쉬고 온 것처럼 피부가 더 좋아진 것 같군요.”
아이작이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카단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수님. 5성이 되면 데스나이트를 강화하는 마법을 가르쳐주신다고 하셨었죠?”
카단의 질문에 아이작이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죠.”
대답하던 아이작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카단. 설마….”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아이작이 말끝을 흐리며 카단을 바라봤다.
그러자 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