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트라팔가 성문 앞.
웅장함이 느껴질 정도로 큰 성문 앞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평소와 다르게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 속 카단은 헛웃음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아이작의 제안에 성사된 대련. 상대는 다름 아닌 용병왕의 제자였다.
‘저 사람은 5성이라고 했지?’
상대는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으며, 꽤 날카롭게 생긴 사내였다.
카단은 공식적으로 5성이라고 알려졌기에, 대련 상대 역시 5성 용병으로 선택되었다.
‘양심이 좀 찔리긴 하네.’
실제로는 6성에 도달한 카단이었기에 마음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상대는 용병왕의 제자.
방심할 수는 없었다.
한편, 이 대련을 추진한 아이작과 용병왕 제이드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대련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디언이 되시더니 몸을 사리시는 건가? 갑자기 제자를 앞세워 대련하자고 하다니.”
제이드는 콧방귀를 뀌며 아이작에게 말했고, 아이작은 자상하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의 시대는 저물고 있으니, 이제 다음 세대에게 영광을 물려줘야 하지 않겠나?”
“저 녀석이 자네의 뒤를 이어갈 놈이라는 뜻인가?”
제이드가 피식 웃으며 카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를 넘어설 녀석이지. 어쩌면 그분보다도 더 높은 곳에 오를지도 몰라.”
“내 뒤를 이어 용병왕이 될 놈이랑 붙여봐야 하는데, 아쉽군.”
“왜? 지금 대련에 내보낸 제자가 내 제자에게 질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지?”
아이작이 놀리듯 묻자, 제이드는 다시 콧방귀를 뀌며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마티아스가 아니었다면 저 녀석에게 용병왕의 자리를 물려줬을 거다. 걱정은 자네가 해야 할걸?”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아이작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이렇게 제자들을 향한 믿음이 확고하니, 내기하기에 적절한 상황인 것 같군.”
“좋아. 어떤 내기로 할까?”
“간단하게 하지. 대련의 승자가 상대방의 스승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 어때?”
“나쁘지 않군.”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대련을 준비 중인 제자들을 바라봤다.
“아, 자네의 제자 이름이 뭐라고 했지?”
순간 무언가 생각이라도 났는 지, 제이드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작을 바라봤다.
“카단.”
아이작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시선을 옮겨 카단을 바라봤다.
‘네크로맨서 카단이라….’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대련을 준비 중인 두 사람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이번 대련의 심판을 맡은 기사 하만이라고 합니다.”
하만은 카단과 용병왕의 제자를 바라보며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으며.
“준비되셨으면 서로 인사부터 나누시겠습니까?”
이어서 서로에게 인사하라며 손짓했다.
“용병 롭스다.”
용병왕의 제자는 매서운 눈으로 카단을 바라보며 자신을 소개했고.
“영웅 아카데미 생도 카단입니다.”
카단은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예를 갖춰 인사를 전했다.
‘왜 저렇게 노려봐?’
롭스라고 소개한 자는 마치 원수라도 바라보듯 카단을 바라봤다.
그저 상대의 도발이겠지. 카단은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마나를 활성화했다.
“마법사와 성직자가 대기 중이니, 걱정 없이 싸우셔도 좋습니다. 위험한 상황엔 제가 나서죠.”
하만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말했고, 카단과 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럼. 시작하십시오.”
하만의 신호와 함께 롭스가 땅을 박찼다.
슉!
금방 거리를 좁힌 롭스가 재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팅!
카단은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곧바로 뼈 방패를 소환해 공격을 막아냈다.
‘확실히 빨라졌다.’
루나의 도움으로 마나의 흐름을 정리한 이후 전보다 빠르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대응에 당황했는 지, 롭스는 혀를 차며 검을 회수했고.
휙!
곧바로 몸을 돌려 검을 휘둘렀다.
채애앵!
그러나 이번엔 카단이 뽑아 든 단검에 공격이 막히고 말았다.
롭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네크로맨서가….’
반 박자 빠르게 휘두른 검.
일반적인 네크로맨서라면 당황해서 뒤로 물러서거나, 공격에 당했어야 했다.
그러나 카단은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고, 갑작스러운 공격도 손쉽게 막아냈다.
네크로맨서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반응 속도.
“이 정도인가?”
카단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미소를 반지가 끼워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언데드?’
카단이 언데드를 소환한다고 생각한 롭스가 다시 자세를 잡으며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푸슉!
그때 카단의 반지에서부터 붉은색 액체가 빠르게 쏘아졌고.
“커억!”
검을 휘두르려던 롭스의 어깨를 관통했다.
당황한 롭스는 땅을 박차 뒤로 물러났고, 무언가에 관통당한 어깨를 확인했다.
어깨에는 바늘이 관통한 듯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방심했다.’
롭스가 이를 악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사이 카단은 아공간에서 고블린 시체들을 꺼내 바닥 여기저기에 툭툭 내던졌다.
‘고블린?’
이제야 언데드를 소환하나 싶었지만, 카단이 꺼낸 건 고작 고블린의 시체였다.
‘날 기만하는 건가?’
고작 고블린의 시체로 무엇을 하겠다고.
롭스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다시 땅을 박차며 카단을 향해 달려갔다.
‘살살하려고 했는데, 날 기만한 죄값은 치르게 해야지.’
탐색전은 끝냈다는 듯 그의 검에는 푸르스름한 오러가 맺혀 있었다.
롭스는 빠르게 거리를 좁혀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촤르르르르륵!
바닥에 던진 고블린의 시체에서부터 피로 만들어진 밧줄이 튀어나와 롭스의 손과 어깨, 그리고 몸통과 다리를 휘감았다.
꽈아악!
갑작스러운 속박에 당황한 롭스가 몸을 움직이려 하자, 밧줄은 더욱더 거세게 그의 몸을 조여왔다.
“이, 이게 무슨!”
검을 휘두르는 자세 그대로 포박된 롭스가 당황하는 사이.
카단이 단검을 뽑아 들고는 천천히 롭스에게 다가갔고.
스릉.
이내 날카로운 단검을 롭스의 목에 겨누었다.
승리의 기쁨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한 무덤덤한 표정으로 롭스를 일별한 카단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돌려 심판을 바라봤고.
“카, 카단 승…!”
그제야 당황하고 있던 심판이 카단의 승리를 확정 지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카단의 승리가 확정되자 대련을 관람하던 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내기는 내가 이겼군.”
아이작은 당황하는 제이드를 향해 가볍게 말을 던졌다.
“어떻게 네크로맨서가 저런 움직임을….”
제이드는 믿을 수 없었다.
반 박자 빠르게 휘둘러진 롭스의 검을 단검으로 가볍게 막아내던 카단.
그건 네크로맨서가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게다가 언데드도 소환하지 않았다. 오로지 마법으로만 손쉽게 승부를….’
제이드가 당황해하자, 옆에 있던 아이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노여워 말게. 영웅 아카데미 신입생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녀석이니까.”
“아. 이제 생각났다.”
제이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제자의 목에 단검을 겨누고 있는 카단을 바라봤다.
‘마티아스가 말했던 그 네크로맨서였어.’
몇 달 전, 제이드는 영웅 아카데미의 임무를 수행 중이던 제자 ‘마티아스’를 만났었다.
마티아스는 후배 중 하나를 도와주고 있다며 말했다.
-신입생 중 유일한 네크로맨서인데, 이상한 놈입니다. 근접 전투에 관심이 많고, 성장도 빨랐어요. 대단한 녀석입니다.
제이드는 마티아스에게 언제 한 번 직접 만나고 싶다는 말만 남기며 가볍게 흘려들었었다.
그런데 설마 마티아스가 말한 네크로맨서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자네 혹시 저 어린 네크로맨서에게 언데드를 소환하지 말라고 지시했나?”
제이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아이작에게 물었다.
카단이 보여준 대련은 평범한 네크로맨서의 모습이 아니었다.
보통 네크로맨서들은 대련이 시작되는 동시에 언데드를 소환하며 뒤로 몸을 피한다.
그러나 카단은 언데드를 소환하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달려드는 용병을 보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당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의 제자인데, 내가 설마 그런 지시를 내렸겠나?”
아이작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개인의 선택인 것 같네. 그 이유가 짐작 가긴 하지만, 잘은 모르겠어.”
카단이 상대를 얕보거나 자만심을 부린 것도 아니었다.
아이작과 제이드가 본 카단은 진중하게 대련에 임했고, 최선을 다해 용병 롭스를 상대했다.
“쯧. 자네 엄청난 재앙을 키우고 있군.”
“그건 모르지. 재앙이 될지. 영웅이 될지.”
두 사람의 시선은 대련을 끝낸 카단과 롭스를 향했다.
***
트라팔가 영주성의 회의실.
대련이 끝난 후 카단과 아이작, 그리고 제이드와 아론 트라팔가가 다시 회의장에 모였다.
“다들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아론 트라팔가가 미소를 머금으며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역시 트라팔가의 요리사들은 뛰어난 실력자들뿐이로군요.”
“맛있었습니다.”
아이작과 카단이 먼저 답했고, 제이드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여러분들 덕분에 우중충하던 도시의 분위기가 잠시나마 밝아졌습니다.”
아론은 조금 전 성문 앞에서 펼쳐졌던 카단과 롭스의 대련을 떠올리며 말했다.
가디언의 제자와 용병왕의 제자가 맞붙는다는 소식은 도시 안에 있던 사람들은 흥분시켰다.
두 사람의 대련 덕분에 전쟁에 지쳐있던 이들이 조금이나마 활기를 되찾게 되었고, 아론은 그에 대해 감사를 표현했다.
“카단. 마티아스를 알고 있나?”
이어서 용병왕 제이드가 카단을 향해 무심히 물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카단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그를 향해 인사했다.
“근접 전투에 관심이 많다지?”
“근접 전투가 약점이기에, 이를 극복하고자 관심을 가졌습니다.”
용병왕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작을 바라봤다.
“제자 하나 잘 키웠군.”
“뭐, 처음부터 뛰어나서 내가 할 일은 딱히 없었네.”
왠지 모를 훈훈한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낀 아론 트라팔가가 조심스레 아이작과 제이드에게 물었다.
“소문에 의하면 두 분의 사이가 앙숙처럼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닌 듯 싶군요.”
그 말에 아이작과 제이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는 내 오랜 친구입니다. 마족과의 전쟁 당시 함께 팀을 이뤘던 것을 인연으로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만날 때마다 누가 더 강한지 대련을 하는 바람에 앙숙이라는 소문이 난 것 같습니다.”
아이작과 제이드가 번갈아 가며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었다.
“역시 그랬군요. 처음에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은 줄 알고 굉장히 긴장했습니다.”
아론이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왕국에서 감옥에 가둔 용병들을 죽이라고 하는 판국에 아이작까지 찾아와 용병왕과 싸우기라도 하면 도시는 더 깊은 혼란 속에 빠질 테니.
“카단. 너의 스승과 내기했었다. 승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말이야.”
혹시 나에게 원하는 게 있나? 제이드가 여유롭게 질문을 던졌고, 카단은 잠시 입을 다물며 고민했다.
‘용병왕에게 뭘 얻을 수 있을까?’
영웅 아카데미의 증표만 있다면 최고 등급의 용병패도 필요 없었다.
네크로맨서이니 그의 제자가 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을 것이며, 또 효과적이지도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카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똑똑똑!
카단이 막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 누군가가 다급하게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여, 영주님! 콜린퍼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성문을 넘었다고 합니다!”
성문 너머로 병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아이작 교수를 바라봐다.
“흠. 내가 나설 차례인 듯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