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파티의 하이라이트.
가면무도회 대련이 시작되었다.
연회장 한가운데 대련을 위한 무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 가면을 쓴 생도들이 올라 실력을 발휘했다.
대련이 시작한 후 더는 악사들의 연주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대련을 지켜보는 생도들의 환호성이 음악을 대신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졸업반은 다르긴 다르네.”
“와 진짜 깔끔한 연계다.”
파티의 즐거움을 가장 많이 느끼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1학년 생도들이었다.
선배들의 실력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 어떤 수업 시간보다 집중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고블린 가면 쓰러지지 마!”
“마법사 이겨라!”
가면을 쓰고 있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생도들은 그것 역시 상관없다는 듯 즐겁게 대련을 관람했다.
누가 누구인지보다 어떤 실력을 어떻게 보여주는지가 관람하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니.
“선배들은 대련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겠지?”
“3년을 함께했는데, 자세만 보고도 알아맞히겠지.”
“2학년 선배들도 가끔 대련하는 것 같던데?”
대련이 이어질수록 파티의 분위기는 상승곡선을 그렸다.
한참 흥이 오르고 있었지만, 파티를 즐기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미치겠네.’
연회장 구석 해골 가면을 쓰고 있는 생도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마족이라니.’
해골 가면을 쓰고 있던 카단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가면무도회는 영웅 아카데미의 소속된 이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파티.
그러나 불청객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카단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뱀파이어가 된 발렌티나는 루나처럼 마족과 인간을 구분할 줄 알았으며, 마족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쯧. 하필 죄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발렌티나의 말에 따르면 아카데미 어딘가에 마족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발렌티나가 마족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다면, 여기 있는 생도나 교관 중에는 마족이 없어.’
불행 중 다행이랄 것은 적어도 생도, 교관, 교수 중에는 마족이나 마족화가 진행 중인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카데미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뜻인데.’
카단이 불안감을 키우는 사이.
툭.
누군가가 다가와 카단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카단이 몸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늑대 가면을 쓰고 있는 알비스가 서 있었다.
“알비스?”
“카단. 저 선배. 마티아스 선배 아니야?”
카단에게 다가온 알비스가 무대를 가리키며 말했고, 그의 손끝을 따라 무대를 바라보자, 그곳엔 오우거 가면을 쓴 남자 한 명이 보였다.
오우거 가면을 쓴 마티아스는 무대 위로 올라 상대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선배님의 아카데미 마지막 대련 상대가 되어 영광입니다.”
“하. 역시 너였구나. 예상은 했지만, 진짜 나한테 대련 신청을 할 줄이야.”
“졸업반 1위 선배님과 대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놓칠 수 없죠. 아시다시피 저도 이번에 졸업하거든요.”
오우거 가면을 쓴 마티아스가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하얀 민무늬 가면을 쓴 남자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도전자가 된 기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붙어보자.”
민무늬 가면을 쓴 남자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천천히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냈다.
그러자 마티아스도 들고 있던 창을 고쳐 쥐며 자세를 취했고.
“사고, 부상은 걱정하지 마라! 준비되면 시작해!”
이어서 심판을 맡은 교관의 외침과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카단. 저 민무늬 가면을 쓴 선배가 누군지 알아?”
“나야 모르지. 마티아스 선배 말로는 3학년 최강이라던데.”
“맞아. 아까 얘기를 엿듣다가 내가 알아봤거든? 알아보니까, 이번에 라이언 기사단으로 들어가게 된 로울리 선배래.”
라이언 기사단이라는 말에 카단이 어디서 들어봤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이언 기사단이라면….”
“응. 라이덴 녀석의 아버지인 애런 몽브레인 님이 이끄는 왕국 5대 기사단 중 하나.”
영웅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해서 아무나 5대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위 5명만이 5대 기사단에 지원할 수 있었으며, 기사단의 자체 시험에서도 합격해야만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로울리 선배님은 졸업반 상위 5명이라고 알려졌는데, 실질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들었어.”
“알비스 넌 그런 사실들은 어떻게 알아냈어?”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알비스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쟤네들이 알려줬어.”
“저 녀석들은….”
알비스가 가리킨 곳에는 귀여운 강아지 가면을 쓴 세 명의 남자가 보였다.
한곳에 모여서 수다 떠는 모습만을 보고도 카단은 그들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허먼, 브렌트, 데이비드였나?’
1학년의 대표적인 수다쟁이 삼인방이었다.
카단은 피식 웃음을 흘린 뒤, 다시 고개를 돌려 대련이 시작된 무대 위를 바라봤다.
‘마족이 움직이면 발렌티나한테 알려달라고 했으니, 일단 대련이나 좀 지켜볼까?’
불안한 마음을 잠시 뒤로한 채 카단은 2학년 최강자인 마티아스와 3학년 최강자 로울리의 대련을 지켜보기로 했다.
***
영웅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평화의 숲’.
숲은 밤이 되자 어둠으로 물들었고, 그곳에 검은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숲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남자 하나가 달빛이 드리운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모였겠지?”
기괴한 문어 가면을 쓴 남자는 어둠으로 물든 숲을 향해 질문을 던졌고.
“네!”
숲속에서 간결한 대답들이 들려왔다.
“정말 영웅 아카데미를 부숴버리는 겁니까?”
“모두 죽여도 상관없어요?”
이어서 숲속에서 비릿한 질문들이 던져졌고, 문어 가면을 쓴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어 지내느라 답답했을 텐데, 마음껏 뛰어놀아라.”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족화가 진행 중인. 아니, 이미 마족이 된 인간들이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망할. 요즘에 어딜 가든 죄다 성직자가 있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맞아. 난 기사단에 있다가 성직자 찾아온다는 말에 바로 도망쳤잖아.”
도시 트라팔가에서 마족화가 진행 중인 인간이 발각된 후, 왕국 성직자들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마족의 힘을 얻은 이들은 음침한 곳으로 숨어야 했으며, 활동하던 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야만 했다.
답답함과 막막함으로 절벽 끝으로 몰린 마족들이 반격하기로 마음이라도 먹은 것일까?
어두운 숲속에는 왠지 모를 살기가 가득 뿜어지고 있었다.
“어설프게 시작하면 피해자만 늘어나니, 아카데미에 잠입한 녀석들이 신호를 보낼 때까지 얌전히 대기해.”
그들의 분노를 느낀 것일까?
문어 가면을 쓴 남자가 진정하라는 듯 손짓하며 그들의 살기를 다스리려 했다.
다행히 그의 손짓에 어둠 속에 숨어있던 자들의 흥분이 가라앉았고, 검붉게 물든 그들의 시선이 고요히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문어 가면을 쓴 남자는 밝게 빛나는 연회장 건물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 파티가 될 것이니, 마음껏 즐겨라. 아직 파티의 하이라이트는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
와아아아아아!
마티아스와 로울리의 대련 덕분에 연회장의 분위기는 더욱더 흥이 올랐다.
“오우거! 오우거! 오우거!”
“선배님들! 멋지십니다!”
“로울리 선배님! 저도 선배님을 따라 라이언 기사단에 꼭 들어가겠습니다!”
“마티아스! 2학년의 자랑!”
치열한 대련 끝에 승자가 결정되었고, 승자의 자리는 오우거 가면을 쓴 마티아스가 차지했다.
‘에어록손 성벽에 다녀온 후 마티아스 선배의 실력이 확 늘었네.’
대련이 끝나자 카단은 주먹을 쥔 손에 땀이 흥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티아스와 로울리의 대련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 어떤 제약도 없는 대련.
실전과 같았던 대련이었기에 대련은 더욱 살벌했고, 공방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은 숨을 죽여야만 했다.
손에 땀을 쥘 정도로 대련에 집중했던 건 카단 뿐이 아니었다.
“와. 진짜 살벌하다.”
“저 정도는 되어야 차기 가디언이 되고, 라이언 기사단에 당당히 합격하는 건가?”
“그냥 구경만 했는데, 온몸이 땀에 젖었어.”
다른 생도들도 잔뜩 긴장한 채 대련을 지켜봤고, 대련이 끝난 후에야 후련하게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나 아카데미 그만둘까….”
“세상에 괴물들이 너무 많아.”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라는 거지?”
1학년의 대표적인 수다쟁이 삼인방처럼 커다란 벽을 느끼고 한숨을 내뱉는 생도들도 몇몇 보였다.
그사이, 멋진 대련을 펼쳤던 마티아스와 로울리가 서로 악수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잠깐의 쉬는 시간이 생겼고, 생도들은 급히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음료와 음식이 펼쳐진 곳으로 향해 허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카단도 잠시 목이라도 축일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톡톡.
그때 누군가 카단의 어깨를 조심스레 두드렸다.
“카단?”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눈만 가린 화려한 가면을 쓴 여성이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벨리드 교관님.”
화려한 가면을 쓴 여성은 벨리드 교관이었고, 그녀는 활짝 웃으며 카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파티는 즐거워요?”
“네. 뭐.”
“우리 카단 생도도 슬슬 무대에 오를 준비도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벨리드의 말에 카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전 대련 신청 취소했었는데요?”
아카데미에서 마족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발렌티나의 말에 카단은 곧바로 대련 신청을 취소했었다.
‘힘을 아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카단이 대련 신청했던 상대는 마티아스였다.
마티아스와 대련을 했다간 꽤 많은 힘을 소모할 것이 뻔했기에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대련 신청을 취소했었다.
“카단 생도가 도전자가 아니라, 도전을 받는 쪽으로 무대에 오르는 건데?”
“저한테 대련 신청한 사람이 있습니까?”
“많죠. 3학년 3명. 2학년 5명. 1학년 1명. 물론 안전을 위해 대련은 최대 두 번까지만 가능해요.”
학년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씩 있었다.
‘졸업반 중 한 명은 클로제 선배인가? 2학년 중 한 명은 식당에서 시비를 걸어왔던 그놈일 거고. 1학년은… 한 놈밖에 없네.’
웬만해선 모든 도전을 거부하고 싶었으나, 하나쯤은 받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풀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2, 3학년들과의 대련도 자신은 있었지만, 지금 카단에게 필요한 건 잠깐 몸을 달궈놓을 정도의 가벼운대련.
“그럼 한 번만 하겠습니다.”
“상대를 고를 권한이 있는데, 누구로 하시겠어요?”
“1학년 도전자로 하겠습니다.”
카단의 대답에 벨리드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무대 앞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벨리드 교관은 방긋 웃으며 어디론가 사라졌고, 카단은 불안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걸음을 옮겼다.
“교수님.”
카단이 향한 곳은 아이작 교수가 앉아있는 자리였다.
“카단?”
“잠깐 대화할 시간이 있을까요?”
카단의 물음에 리퍼 가면을 쓰고 있던 아이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음. 여기서 얘기하긴 힘든 건가요?”
카단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작은 알겠다는 말과 함께 근처 발코니의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발코니 문을 닫은 아이작이 고개를 갸웃하며 카단을 바라봤고, 카단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교수님. 제가 저번에 마족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파티 도중에 갑자기 왜 마족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이어질 카단의 말을 기다렸다.
“마족을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네?”
발렌티나에게 들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기에 카단은 하는 수 없이 거짓말을 섞기로 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이상한 기운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카단은 애써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교수님께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마족… 알겠습니다.”
아이작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카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만약에라도 마족이 나타난다면 제가. 그리고 아카데미의 교관과 교수들이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